나무모에 미러 (일반/밝은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12-16 19:52:29

이임학

<colbgcolor=#000><colcolor=#fff> 이임학
Ree Rimhak
파일:external/www.sciencetimes.co.kr/12.jpg
출생 1922년 12월 18일
일제강점기 함경남도 함흥
사망 2005년 1월 9일 (향년 82세)
캐나다 브리티시 컬럼비아 밴쿠버
국적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
[[캐나다|]][[틀:국기|]][[틀:국기|]]
직업 수학자
가족 아내 Rhoda Ree (재혼)
학력 함흥 제1공립보통학교 (졸업)
함흥공립고등보통학교 (졸업)
경성제국대학 (물리학 / 학사) (1944년)[1]
브리티시 컬럼비아 대학교 (수학 / 박사) (1953년~1955년)
경력 경성대학 조교수 (1946년)[2]
김일성종합대학 교수 (1946년)
서울대학교 교수 (1947년~1953년)
브리티시 컬럼비아 대학교 연구원 (1955년~1961년)
예일 대학교 연구원 (1961년~1962년)
브리티시 컬럼비아 대학교 교수 (1961년~1987년)

1. 개요2. 생애
2.1. 어렸을 때2.2. 캐나다 귀화
3. 연구4. 여담5. 참고

[clearfix]

1. 개요

李林學/ Rimhak Ree / 이임학 / 리림학 (1922 ~ 2005)

함경남도 함흥시 출신으로 캐나다에서 활동한 수학자. 리 군을 연구하여 군론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의 유명한 일화 중 하나로 1947년 그가 청년이던 시절 남대문시장에서 미군이 버린 수학 학회지(Bulletin of American Mathematical Society 1947)를 주워 직접 학회지의 문제를 풀어내어 막스 초른(Max Zorn)을 통해 미국 수학학회지에 논문을 낸 이야기가 있다. # 이 1949년에 출판된 논문은 세계 저널에 한국인이 수학 논문을 올린 최초 사례이다.

2. 생애

2.1. 어렸을 때

1922년 함흥에서 출생했다. 1934년 함흥제1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함흥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다. 이후 1939년에는 함흥고보에서 이름이 바뀐 함남중학교 5학년을 수석으로 졸업하면서 경성제국대학 예과(제16회, 이과갑류[3])에 입학한다. 예과 수료 후 이공학부로 진학하여 경성제국대학 이공학부 물리학과를 졸업했다.

학부 시절 이임학은 ‘수학 천재’로 조선인 학생들 사이에서 전설 같은 존재였다. 그는 자신의 전공이었던 물리학 보다도 수학에 더 관심이 많았고, 물리학 공부는 그다지 열심히하지 않았다. # 그러나 당시 경성제대 이공학부 이과에는 수학과가 없던 시절이었고 물리학, 화학밖에 없었기 때문에 할 수 없이 물리학을 전공한 것이다. 일제의 식민정책으로 인해 대학 자체에 반감을 가져 당시 일본인 교수가 가르치던 강의에는 나가지 않았다. 대신 그에게는 예과 시절 만났던 한국인 조력자가 있었는데 이 동경제국대학을 갓 졸업하고 온 물리학 한국인 선생을 통해 여러 수학 지식을 접하게 됐고 이후 거의 혼자서 공부했다고 한다.

전시 재학연한 단축으로 반년 빠른 1944년 9월 경성제대를 졸업한 후 만주국 봉천(심양)에 위치한 화신산업 계열의 조선비행기회사의 제품검사관으로 취업해 2차대전 징집을 피했고 광복 직전 귀향해 함흥에서 해방을 맞았다. 해방 직후 경성대학 시절 김지정, 유충호와 함께 수학회의 투표로 교수에 임용되었으나 얼마 안 가 국대안에 반대하여 사임한다. 이후 김일성대학의 초청으로 북한을 방문하여 강의를 맡기도 했지만 방북 기간 중 공산주의 북한 사회에 반감을 느껴 1947년 서울대로 복귀한다. 그리고 같은해 그에 대한 유명한 일화가 될 사건이 일어나는데, 이는 남대문시장에서 미군이 버린 수학 학회지(Bulletin of American Mathematical Society 1947)를 주워 직접 학회지의 문제를 풀어내어 막스 초른(Max Zorn)을 통해 미국 수학학회지에 논문을 내 출판했던 것이다. 그의 논문은 1949년 출판되었고 이는 세계적인 학술지에 수학 논문을 올린 한국인 최초의 사례가 된다. #

1950년 6월 6.25 전쟁을 맞아 한강철교가 폭파되는 바람에 피란갈 시기를 놓쳐 이임학의 가족은 서울에 남게 됐는데 하루는 인민군이 징집을 하려 집에 쳐들어온다. 이임학의 어머니는 “임학이는 의용군에 입대했다”고 적절히 둘러대어 위기를 모면했고 이임학은 집에서 조용히 숨어 지낸다. 이후 1.4 후퇴 때는 인천에서 배를 타고 제주도를 거쳐 부산으로 피신했다.

다시 서울대 교수로서 부산에서 전시연합대학의 수학교수직을 맡아 출강하던 그는 해외에 나가 제대로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고 전쟁 중에도 가끔씩 미국공보원(USIS)에 가서 수학학술지인 Math Review의 해외 논문들을 살펴봤다. 하루는 그 학술지에 누군가 올린 논문의 부족한 점을 지적하여 편지를 보냈는데 이 논문의 주인은 다름아닌 캐나다브리티시 컬럼비아 대학교(UBC) 스티븐 아서 제닝스(Stephen Arthur Jennings)였다.[4] 그는 이임학에게 장학금을 제공할테니 학교로 와달라고 회신을 했고 이임학은 곧바로 가겠다고 답장한다. 그리고 1953년 그는 마침내 증기선을 타고 태평양을 건넌다.[5]

UBC에 도착한 이임학은 그를 초대한 스티븐 아서 제닝스 교수의 지도 아래 위트 대수학(Witt Algebra)을 연구했고 이에 관한 졸업 논문을 작성해 1955년 박사 학위를 받는다. #

2.2. 캐나다 귀화

캐나다 UBC에서 박사 과정을 마친 후 그는 여권을 연장하기 위해 미국의 주샌프란시스코 대한민국 총영사관[6]을 찾아갔는데, 거기서 여권을 몰수당한다. 어이없게도 “당신이 한국에 돌아갈 거라고 생각되어 여권을 없애버렸다”는 사유였는데, 한국으로 당장 돌아오라는 이승만 정부의 압박이었다.[7][8] 이에 캐나다 정부는 인도적 조치겸 유수의 석학을 확보하기 위해 옳다구나 즉각 영주권과 시민권을 발급해 주었고, 자칫 국제 미아가 될뻔한 이임학은 캐나다인으로서 인생의 제2막을 살아가게 된다.

이임학 개인에게는 생각도 못한 행운이었을지도 모르지만, 만약 당시 한국 정부가 이임학에게 괜한 압박을 넣지 않고 기다렸더라면 한국 수학계의 발전이 상당히 빨라졌을 것이라는 안타까운 의견이 있다. 당시 몇 안되는 선진수학을 경험한 이임학을 정부가 캐나다에 어이없게 국적까지 말소시켜 깔끔하게 포장해 넘겨 보내주면서(...) 박사 하나가 아쉬운 전후 한국 수학계는 발전할 기회를 놓쳐버렸고, 1980년대 후반에서야 조금씩 인프라가 갖추어지고 연구가 시작되는 등 30여년의 오랜 세월을 허망하게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이임학의 지인들이나 그의 은사, 동문들이 포진한 수학계 원로들이 한국 정부를 증오하는 이유는 이 때문이다.

이임학은 학술 교류를 위한 북한 방문 경험도 있었으며, 미처 탈북하지 못한 가족들의 소식을 들으려다 남한에 남아있는 가족들이 북한과의 서신 교환 혐의로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고초를 겪기까지 했다. 이후 이임학은 입국 금지까지 당하게 된다. 이렇게까지 하면서 북에 남은 가족의 소식을 알아보려 했으나 모두 실패하고, 1980년대에야 겨우 당시 유일하게 어느 나라든 자유롭게 입국이 가능했던 에르되시 팔의 도움으로 소식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예일 대학교에서 박사후과정(포스트닥터) 연수 후 밴쿠버로 돌아온 이후 이임학은 브리티시 컬럼비아 대학 수학과 교수로서 죽을 때까지 연구를 이어나가게 된다. 상당히 커리어가 비슷한 이휘소 박사도 유신정권에 우려를 드러내며 국내복귀를 취소한 바 있는데[9], 이렇듯 이들이 국내에 복귀하지 못한 것에는 정부의 영향이 있다.[10] 물론 학문적 바탕이 좋은 해외로 건너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브리티시 컬럼비아 대학은 당시까지만 해도 딱히 연구의 중심지는 아니었다. 오히려 이임학이 당시 해당 대학의 가장 유명한 연구자 중 하나였을 정도.

이후 1996년 대한수학회 창립 50주년 기념회가 되어서야 입국금지가 취소되었고, 그가 타계한 지 1년이 지난 2006년엔 과학기술인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하지만 한국 정부가 이임학에게 해준 건 별로 없었고 주된 연구와 학문적 성취는 캐나다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헌액 소식이 알려지자 한국 정부는 전세계 수학계로부터 또다시 웃음거리가 되기도 하였다.

3. 연구

그의 업적 중 가장 유명하고, 높이 평가되는 것은 유한단순군에 대한 연구이다. 유한단순군의 한 분류인 리 형 군(Lie-type group)[11] 중 마지막으로 발견된 2F4, 2G2가 그의 업적으로, 그의 이름을 따서 리 군(Ree group)이라고 불린다. 한글로 쓰면 리군(Lie group)과 헷갈리기 쉽지만, 로마자로는 완전히 다른 Ree라는 표기를 사용하므로 세계 수학계에서는 별 혼란을 일으키지는 않는다.[12] 막스 초른을 통해 출판한 첫번째 논문 포함, 32편의 논문을 썼다. 그 중 2편은 수학계 최고 권위를 위시하는 수학연보(The annals of mathematics)에 실렸다.

4. 여담

5. 참고



[1] 수학과 물리학을 공부했으나 당시 경성제국대학은 수학 학위를 제공하지 않았다. #[2] 들어가고 몇달 지나지 않아 국대안 반대로 사임하고 나오게 된다.[3] 이공학부 진학반[4] 스티븐 제닝스는 이후 UBC로 온 이임학의 지도교수가 된다.[5] 하지만 이후 미국워싱턴 대학교에서도 더 큰 장학금을 주겠다는 제의도 있었지만, 한 번 간다고 약속한 후에 변경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생각해 UBC로 진학했다고 한다. #[6] 당시 캐나다에는 총영사관이 없었다.[7] 사학계에서 주류의견으로 받아들여지진 않으나 6.25 전쟁 당시 이임학 교수가 징집을 피한 것을 문제삼아서 괘씸죄로 이랬다고 주장하는 이도 있다. 하지만 6.25전쟁 당시의 혼란함 탓에 징집을 피해갔다고 징벌적 여권 말소를 당한 인물은 현재까지 없다. 오히려 38선 이북 출신인 인물이 북한군에 동조하지 않은것만 해도 한국 정부로서는 감사한 일이다.[8] 한국의 미필 남성들은 2020년대인 오늘날에도 병역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다면 장기간 외국에서 활동할 수 있는 비자를 안내주기는 한다.[9] 서울대 원조계획의 미국측 위원 자격으로 딱 한번 한국에 방문했을 때가 있는데, 소련 출신 과학자들이 소련에 잠깐 방문했다가 납치당한 것처럼 자신도 한국 정부에 납치당할까봐 거의 미국 대사관 숙소 안에만 머물렀다고 한다.[10] 한때 세계 수학의 중심지였던 독일과 폴란드에서도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전쟁과 나치를 피해 수많은 학자들이 미국이나 캐나다 등으로 넘어가서 20세기 유명 학자들의 일대기들을 보면 유럽에서 태어났다가 이후 전쟁 중에 미국으로 넘어가 정착한 사람이 대다수다. 그중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다만 언급했듯 원래 타국 출신 학자들이 연구를 위해 미국 등지의 유명 대학으로 몰려오는 것은 흔한 일이긴 하다.[11] 리군(Lie group)과 대응되는 대수적 군(algebraic group)으로부터 특정한 방법으로 만들어낸 유한군으로, 순환군, 대칭군과 26개의 산재군을 제외한 모든 유한단순군이 이에 해당한다.[12] 오늘날에도 북한의 리씨들은 여권에다 Ri, Ree, Rie 같은 표기를 쓰는 경우가 꽤 있다. 더욱이 두음법칙을 쓰지 않으면 이름도 '림학'이라고 읽히는지라 Rimhak이라는 표기를 썼다. 한국의 일부 교수들은 영어로 된 교과서와 논문을 갖고 강의를 하면서도 입말은 한국어로 하는 특성상 Lie Group과 Ree Group이 함께 빈번하게 언급될 경우 구분하기 위해 국뽕을 들이키고 '이임학군' 같은 호칭으로 부르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