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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01 00:35:23

박석원(조각가)

<colbgcolor=#f4ecd5><colcolor=#015566> 박석원
朴石元 | Park Suk Won
파일:1=틀=작품 앞에서 박석원 작가. 고양 도내동 작업실에서. 사진=권동철.2023.11.10=.jpg
출생 1942년 5월 4일 ([age(1942-05-04)]세)
경상남도 창원군
(現 경상남도 창원시)
국적
[[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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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틀:국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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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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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령
]]
직업 미술가, 입체 평면
주요 작품 핸들, 적(積), 적의(積意)
인스타그램 박석원 인스타그램

1. 개요2. 생애3. 미술운동4. 년대별작품영상5. 작품세계 발자취6. 개인전·주요단체전·미술관소장·수상7. 박석원 화론(畵論)8. 외부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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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조각가. 세상에 없는 새로운 의식들을 찾아내려 끊임없는 노동의 가치를 수행하며 예술의 본질에 접근하고자 탐구하는 것을 슬로건으로 잡고 있다.

2. 생애

파일:2=생애.사진제공=박석원.jpg
(왼쪽부터)상경하신 아버지와 어머니를 모시고 창경원에서 1970년. 태권도 도장 앞에서 1957. 진해고등학교 시절 1958. 홍익대교정 박석원 작품을 배경으로 동기들과 함께 1964. 사진제공=박석원.
1942년 5월4일 경상남도 창원군 웅남면 안민리 325번지에서 출생했다. 본관은 반남 박씨(潘南朴氏)로 아버지 박재만(朴在萬,1909~1989) 어머니 황능순(黃能順,1909~1979)의 9남2녀 중 8남이다. 진해도천초등학교시절 개울에서 건져낸 검은 찰흙놀이가 훗날 예술가의 첫 단초가 되었다라고 회고했다. 진해중학교, 진해고등학교시절 운동을 좋아했고 미술반에서 활동하며 아티스트의 꿈을 키웠다. 1960년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조소과에 입학하였고 75년 동대학원 조소과 졸업했다.

대학시절 김경승(金景承,1915~1992)교수에게 점토의 물질적 특성을 강조하며 특히 모든 조각은 하나의 (點)에서부터 시작해서 우주공간을 형성한다는 조각관에 접근하도록 지도받았다. 김정숙(金貞淑,1917~1991)교수는 철조각의 세계적 흐름을 알려 주고 나아가 철의 열기 속으로 자신을 깊이 있게 끌어넣어야 좋은 작품을 창조할 수 있는 토대가 된다고 강조했다. 그리고 1960~90년대 한국현대미술방향성을 제시해 준 미술비평가 이일(李逸,1932~1997)교수에게 석사논문을 지도받았다.

교육자로서 전북대학교 사범대학 미술교육학과 조교수(1984~86), 중앙대학교 예술대학 조소학과 부교수(1987~92),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조소과 교수(1993~2008)를 역임했다. 박석원은 1989년 6월29일 반려자 박문선(朴文善,1959~)과 재혼하였고 슬하에 삼형제를 두었다.

3. 미술운동

파일:3=미술운동.사진제공=박석원.jpg
(왼쪽부터)서승원, 박석원, 김찬식, 박서보, 한국현대조각회전 1969. 제2회 한국현대조각회전 신문회관화랑 1970. A.G오픈전시로 왼쪽부터 이승택, 신학철, 이강소, 하종현, 김한, 김구림, 이승조, 박석원, 이건용, 기자, 송번수, 서승원, 최명영, 경복궁현대미술관 1971. 에꼴드 서울 오픈展 1979. 사진제공=박석원.
박석원은 한국아방가르드협회(A.G,1969~75) 창립멤버로 하종현, 최명영, 서승원, 이강소, 미술평론가 이일, 오광수 등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진취적이고 새로운 미술운동을 펼치며 지속적인 주도적 역할을 했다.

1970년 중앙공보관에서 열린 ‘확장과 환원의 역학’창립전에서 석고라는 원재(元材)로 확장이라는 우주적 원리에 주안점을 둔 기념비(Monumental)적 ‘핸들’대형작품을 처음선보였다. 71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A.G 2회 ‘현실과 실현’전에서 성격이 각기 다른 즉 가공된 것과 자연적인 것의 관계성을 추구하는 실험적 작품 ‘71-積-A’를 제시했다. 74년 국립현대미술관덕수궁에서 열린 ‘서울비엔날레’전에 물질과 비물질의 관계성을 찾고 있는 ‘積-응력-對’작품을 출품했다.

또한 박석원은 김찬식(金燦植,1932~97), 이승택(李升澤,1932~), 최기원(崔起源,1935~), 박종배(朴鍾培,1935~) 등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조소과 동문으로 구성된 5명과 함께 1969년 '한국현대조각회'를 창립했다. 한국현대조각의 새로운 조각문화비전을 논리(論理)와 작업을 통해 세계화를 지향하는 열의 있는 작가들로 시작하였다. 현재까지 이어져오고 있는 대한민국최장조각그룹이다. 이와 함께 1975~96년 에꼴드서울, 1975~79년 앙데팡당, 1976~85년 서울현대미술제 등에 매회 출품하였다.

4. 년대별작품영상

5. 작품세계 발자취

파일:5-1=박석원 작품세계 발자취=1964-68, 1969-79년.jpg
(위 왼쪽부터)교수상(像), 철 1961. 作品8, 65×35×25㎝, 철 용접 1961. 無題6429, 80×70×50㎝, 철 1964. 作品S.W-337, 60×65×30㎝, 철 1964~65. 悲宇, 130×130×50㎝, 알루미늄주조 1968. (아래 왼쪽부터)變質-X, 40×250×250㎝, 무쇠주조, 각목 1970~71. 핸들-積7169, 200×60×60㎝, 알루미늄주조 1971. 積7376, 40×40×250㎝, 나무 1973. 積-應力, 70 ×600×600㎝, 캔버스 천, 나무 1973. 제1회 박석원 개인전 전시전경, 명동화랑 1974. 積78-9, 25×240×25㎝, 나무 1978. 사진제공=박석원.
◇새로운 세계를 찾아 나서는 자신의 규명(1964~1968)=혈기왕성했던 젊음의 시기였지만 암울했던 시대상황을 관통해야만하기도 했다. 거듭된 치열한 고민 끝에서 떳떳하게 자기를 규명하고 예술의 조건이 될 수 있는 해답을 찾아낸다. 바로 철저하게 혼신의 작업에 몰두하는 것으로 귀결 짓는다. 그 위에 방법론적으로 가장 거칠고 어려운 대상들을 붙잡는데 그것이 (鐵), 용접이라고 하는 것이었다. 강렬하고 감정을 깊이 있게 발산할 수 있는 완벽한 대상으로서 철 작업을 개척해 나가며 자신만의 새로운 조형세계를 구축했다.

“나중에 자연스럽게 상(償)도 타게 되는데 나의 생각과 몸짓에서 탄생된 것들을 결과로 만들어 낸 것이다. 나는 그것을 귀하다고 생각한다. 조각적인 나아가 내 인생에서 가치규명을 해 볼 때 더욱 의미가 크기 때문이다.[1]” “회화이든 조각이든 앵포르멜적인 작품을 제작하던 작가들은 당시 한국 사회에서 팽배해 있던 실존의 문제에 천착하고 있었고, 이러한 작품들은 사회적 갈등과 부조리한 현실에 강열한 저항의식을 드러내고 있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2]

◇물질의 변용과 확산 그 기하학적 메카닉(1969~1979)=이 시기 ‘핸들(Handle)’시리즈는 물질이 행위를 통해서 거듭나고 확대되어가는 메카닉(Mechanic)한 형식을 말한다. 물질의 변용에서부터 확산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변화해가는 형상의 문제에 도달된다. 어떤 힘이 가해졌을 때 변형과 변용의 새로운 과정을 만들어 낸다. 그러한 과정을 추구해 나가는 작위(作爲)에 박석원 적의(積意)’시리즈가 적용된다.

“나무작업은 주로 좌우(左右)를 다루었는데 통나무 원재를 분할하여 음양(陰陽)의 문제를 제안하였다. 물질내면에서부터 형성되어 있는 실재(實在)를 작위를 통해 그 본성을 나타내었다.[3]” “그의 행위는 ‘절단과 쌓음’이라는 소모적인 것처럼 보이는 ‘반복성’을 보였다. 이러한 반복은 곧 ‘시간의 쌓음’이라는 다른 세계로 우리를 유도했다.[4]

“박석원의 방법론은 사물의 표면적 특성이 아니라 그 안에 내재한 비가시적 본성에 주목하고 이를 시각화한 것이다.[5]” “항상 매끈하게 하거나 날카로운 동시에 유연한 평면들과 각들이 서로 교차하며 계속해서 일어나는 대위법, 때로는 편편한 표면들과 파동 치는 표면들. 작품의 양면성을 지닌 그 특징은 박석원 자신의 의지로 물질적인 재료를 장악함으로써 그의 본질 자세가 된다.[6]

파일:5-2=박석원 작품세계 발자취=1980-89년.jpg
(왼쪽부터)積8049, 70×90×60㎝ 브론즈주조 1980. 積8138, 60×60×60㎝ 화강석 1980. 積8325, 110×130×10㎝(each), 철 1983. 積8672, 220×50×50㎝ 마천석 브론즈 1982~85. 積8707, 화강석+현무암 820×300×200㎝(뒷면), 올림픽조각공원, 1987. 積意0231, 70×70×17㎝, 철 1983~2001. 사진제공=박석원.
◇자유롭고 다양한 표현과 환원의 축적의식(1980~1989)=절삭이라는 형식을 빌려서 파괴하거나 해체한다거나 하는 행위와, 작위 이후에 그 잔재를 다시 제자리로 돌려놓는 환원(還元)이라는 문제와 연결되는 시기이다. ‘쌓인다.’고 하는 본질이 환원의 형식을 통해서 새로운 형상으로 나타난다. 원형의 형식을 집적(集積)하거나, 물질을 변화시켜서 다시 제자리로 환원하는 것이 축적의식의 본질이다.

“박석원의 경우 절단이라는 물리적 현상은 면밀히 계산된 행위로 여기에는 물리적인 것과 개념적인 것이 하나의 덩어리 안에 융합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7]” “박석원의 조각에는 언제나 자연의 본성을 개방시키려는 인간적 여유가 소박한 하나의 의지로서 나타나고 있으며 이 의지를 통해 돌의 표면은 새로운 숨소리와 호흡으로 가득 차게도 되는 것이다.[8]” “일정하게 잘려진 돌덩어리는 정직하게 잘린 원래의 부분에 다시 물리면서, 그 반복되는 덩어리의 규칙적인 전제로 인해 그의 종전의 목조작품에서 보였던 반복과 증식의 극히 자연스런 변이로 파악하게 하고 있다.[9]

파일:5-3=박석원 작품세계 발자취=1990-현재.jpg
(위 왼쪽부터)積意9317, 250×250㎝ 침목 석고 철, 1992. 積意9321, 화강석 300×300×50㎝, 1993. 積意9909, 마천석 95×210×40㎝, 1998. 積意03, 화강석 400×350×150㎝, 2003. 積意05-B, 철 용접 45×240×45㎝, 2004. 積意050918, 화강석 150×450×45㎝, 2004~2005. 積意0629, 스테인레스 스틸, 300×400×50㎝, 2005~2006. (중앙 왼쪽부터) 積意, 130.3×130.3㎝ 한지접합, 2021. 162.2×130.3㎝ 2022, 130.3×130.3㎝ 2020. 181.8×181.8㎝ 2022. 162.2×130.3㎝ 2022, 181.8×181.8㎝ 2023. 사진제공=박석원. (아래 왼쪽부터 1~3번)김세중미술관 기획초대전 전시전경 2022. (4~6번)더페이지갤러리 비유비공(非有非空) 전시전경 2024. 사진=권동철.
◇해체와 절삭 사물의 증폭일체화의 환원(1990~현재)=해체와 절삭을 통해서 재조립, 재구축하는 형상으로 발전된다. 철은 강력한 (熱)로 녹여 해체작업을 했다. 그때 예기치 않은 구멍(穴)이 발생하는데 전체파이프원통형상에 자연스럽게 생겨난다. “올림픽조각공원의 작품들이 절단과 적립, 또는 부분과 전체의 영원한 미완의 구조적 ‘관계’의 세계를 집대성한 것이라면, 2000년대는 2천도의 고열로 녹이고, 뚫고, 구부린 철 파이프와 석물(石物)의 기둥, 그리고 나무로 이루어진 작품들이 대종을 이룬다. 모두 중후한 질량과 마티에르의 구조물이면서도 문화맥락을 갖는다는 공통된 특징이 있다.[10]

“박석원은 억지나 부자연스러움을 걷어내고 편하고 잔잔하게 작품을 이끌어간다. 규칙성인위성에서 벗어나 자연의 본성을 되찾아주기라도 하듯이 사물의 존재감을 증폭시키고 그것과의 일체화를 도모하고 있다.[11]” “한지(韓紙)작업은 무한드로잉으로 진행되고 그것은 다시 절삭과정을 통해서 해체된다. 해체하고 또 환원하며 쌓는다는 것은 철이나 돌이나 다른 물질에서처럼 한지에서도 같은 방법으로 나타난다.[12]” “박석원의 태도는 있는 그대로의 물성을 변질시키지 않고 잠재의식 깊은 곳에서 물질을 고찰하여 흡수한다. 사물이 머금은 박자, 선율의 함축으로 감각을 낯설게 하고 그 원초성을 드러내어 관념적 지식을 벗어나 자유로워진다.[13]

6. 개인전·주요단체전·미술관소장·수상

△주요개인전=2024 더페이지갤러리, 2023 가나아트보광, 2022 김세중미술관, 2018 노화랑, 2014 박석원 야외조각전(경남도립미술관), 2011 제9회 문신미술상 수상작가 박석원 초대전( 창원시립마산문신미술관), 2008 가나아트센터, 2002 노화랑, 1997 가인화랑, 1993 토탈미술관, 1991 인공갤러리, 1987 바탕골미술관, 1985 두손갤러리, 1981 공간화랑, 1980 무라마츠 갤러리(도쿄), 1979 공간갤러리, 1977 견지화랑, 1974 명동화랑.

△주요단체전=2023 시원(始原)을 향하여(가나아트센터), 2015 built in steel(포항시립미술관), 2015 물성을 넘어 여백의 세계를 찾아서(가나아트센터), 2011 기(氣)가 차다(대구시립미술관),
2003 국제아트 심포지움(산토티르소 포르투칼), 2000 한국과 서구의 전후추상미술: 격정과 표현(호암갤러리), 1987 88올림픽기념 1차 국제야외조각 심포지움(올림픽조각공원), 1982 현대종이의 조형전-한국과 일본(국립현대미술관), 1975~96 에콜 드 서울전(국립현대미술관), 1974 제3회 인도트리엔날레(인도), 1973 1회 시드니비엔날레(호주), 1970~72 A.G전(중앙공보관, 국립현대미술관), 1969 제10회 상파울로비엔날레(브라질), 1968~69 한국현대작가초대전(국립현대미술관), 1966 제5회 파리비엔날레(프랑스).

△미술관소장=국립현대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 호암미술관, 쉐라톤워커힐미술관, 포항시립미술관, 제주현대미술관, 홍익대학교박물관, 토탈미술관, 올림픽조각공원.

△수상=2010 문신미술상 수상(문신미술운영위원회), 2008 서울시 문화상 수상(서울특별시), 2003 제17회 예총예술문화상 수상(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 1996 김수근 문화상 수상(김수근문화사업회), 1992 김세중 조각상 수상(김세중기념사업회), 1974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추천작가상 수상, 1968~69 17,18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 국회의장상 수상, 1963 문화공보부 신인예술상 수상.

7. 박석원 화론(畵論)

파일:7=박석원 화론=작업실에서 박석원 작가. 사진=권동철. 2023~2024..jpg
고양 도내동 작업실에서 박석원 작가, 2023~2024. 사진=권동철.

나는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초등학교 때 6.25 전쟁을 겪었었다. 가난과 궁핍과 공포의 상황에서 삶에 대한 인식의 폭은 제한되었다. 다만 혼자서 방과 후에 산을 타고 내려온 얕은 개울에서 건져 올린 찰흙이 유일한 손 놀이의 대상이었다. 흙을 옷에 묻혀가며 만지는 재미에 시간을 잊어버리고 저녁 늦도록 흙장난에 심취 했다. 토끼, 다람쥐 등 공예식의 만들어진 동물들을 학교에 가져가면 선생님의 특별한 칭찬이 있었고 그 말은 나를 더욱 그 일에 집념하도록 해주었다. 그렇게 점토의 점력(粘力)에 대한 느낌으로 여러 가지 형상(形像) 매체에 접근하면서 조금씩 무언가 새로움과 기쁨을 느끼는 단계에 이르게 되었다. 자연과 더불어 놀며 사유하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를 일깨워 준 시대정신이 아니었나 싶은 것이다. 한편으로 저 멀리 전개되는 진해바다 수평선의 광활함, 고향을 품고 있는 장복산(長福山)의 위용을 호연지기(浩然之氣)로 느끼며 한 인간의 세계가 영글어가는 것을 체감한 것은 아름답고 고귀한 체험임에 틀림이 없다.

◇삶의 연륜(年輪)이 축적된 가치
점토(粘土) 흙은 내가 예술의 길을 갈 수 있는 조건을 체험할 수 있었던 바탕이었다. 나의 가슴을 움직이게 하고 어떤 의지(意志)와 생각을 샘솟게 하는 요인이 된 것이다. 물론 중학시절 미술반에서 그림을 그렸고 그러한 흥미와 관심이 고등학교, 대학에도 연결된 것이지만 점토라는 특수한 물질이 작가의 길로 가는 아주 중요한 본질적 요인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이와 함께 일생동안 가장 중요하게 여겼던 것은 맑은 정신적 조건이 잉태하는 참신함 등에 대한 요소의 갈망이었다. 다른 주변의 특이한 현상들 이런 것들이 나를 항상 새롭게 만들고 갈구해주고 변화를 주는 요인이라고 여긴다. 예술이란 특별한 논리보다 삶의 궤적이 엮어지고 쌓여져 만들어지는 가치라고 여긴다. 자신의 창의적 사고를 넘어서 이루어지는 것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박석원 조각가 작업실에서. 대담정리=권동철 미술칼럼니스트, 2024.6]

8. 외부링크

(한국현대추상조각 선각자) 조각가 박석원‥궁극의 밸런스 환원과 순환의 야성

(권동철의 갤러리)한국추상조각거장 박석원‥자연의 내부 그 은일한 수행

조각가 박석원‥분할과 확산 저 시공간의 몸짓

(인터뷰)조각가 박석원‥“내 작업은 한지특성의 물질감을 분할하는 것”



[1] 박석원 작가 인터뷰, 대담:권동철 미술칼럼니스트, 2024.[2] 김이순 미술사가, 철의 원초성에 대한 음미, 2007.[3] 박석원 작가 인터뷰, 대담:권동철 미술칼럼니스트, 2024.[4] 김용대 미술평론가, 가공된 기하학으로서의 인간학, 2007.[5] 김이순 미술사가, 탈인간중심주의 탈재현적 일루전, 2022.[6] 이일 미술평론가, 환원성의 덩어리, 1979.[7] 이일 미술평론가, 절단, 1980.[8] 윤우학 미술평론가, 인간과 자연의 원초적인 관계, 1981.[9] 오광수 미술평론가, 물질과 구조의 본질을 천착하는 뚝심, 1985.[10] 김복영 미술평론가, 분절과 결합의 시대, 2008.[11] 서성록 미술평론가, 박석원의 적의(積意), 2011.[12] 박석원 작가 인터뷰, 대담:권동철 미술칼럼니스트, 2024.[13] 김용대 미술평론가, 비유비공(非有非空), 20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