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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21 10:40:13

박명환/선수 경력

파일:상위 문서 아이콘.svg   상위 문서: 박명환

1. 아마추어 시절2. 프로 시절
2.1. OB-두산 베어스 시절2.2. LG 트윈스 시절
2.2.1. 2007년~2010년2.2.2. 2011년2.2.3. 2012년
2.3. NC 다이노스 시절
2.3.1. 2014년2.3.2. 2015년
3. 국가대표 경력4. 연도별 성적

1. 아마추어 시절

서울청구초등학교, 충암중학교, 충암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충암고 2년 선배로 신윤호, 1년 선배로 조성환, 동기생이 장성호였다. 고1때부터 두각을 나타냈는데 봉황대기 8강전에서 김재현, 조인성 등이 포진한 막강타선의 신일고를 상대로 7이닝 무실점, 이어 등판한 신윤호가 2이닝 무실점으로 막으며 충암고를 4강에 올려놓았고[1][2] 3학년 때는 봉황대기 전국고교야구대회에서의 활약으로 선린상고를 결승전에서 제압하고 충암고를 우승시키며 최우수선수로 선정됐다.[3][4]

고교 시절부터 145km/h의 강속구를 던지며 고교 유망주 투수 랭킹 상위에 이름을 올려놓았고[5], 150km/h 대의 속구를 던질 수 있는 재목으로 일찍부터 기대받고 있었다.

고교 졸업 후, 원래는 고려대학교에 진학할 예정이었지만[6]이미 동기생 김선우가 고려대에 스카웃되었고, 집안 사정도 매우 가난했던 바람에[7]프로로 직행하게 된다.[8]만약 박명환이 고려대 야구부에 입단했다면 고려대는 90년대 후반 대학야구의 최강자로 군림했을지도 모르는 일.

2. 프로 시절

2.1. OB-두산 베어스 시절

파일:두산 박명환.jpg 파일:/image/109/2006/05/19/200605191921461101_1.jpg
본인의 최전성기인 두산 베어스 시절

1996년 신인드래프트에서 OB 베어스의 고졸우선 지명을 받아 입단했다.[9][10][11]#

OB에 계약금 3억원을 받고 입단하는데 이는 전년도 심재학김재걸이 기록했던 2억 1천만 원을 갈아치운 신기록이었으나 불과 한 달 후 미국에서 건너온 삼성의 최창양이 5억을 받으며 깨지고 만다.

OB/두산 시절에는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우완 파워 피처 중 한 명이었다. 140km/h 중후반대를 기록하는 묵직한 강속구와 슬라이더 조합이 위력적이었으며, 데뷔 시즌이었던 1996년 시즌에 10승은 실패했으나[12] 피안타율 .221, 185.1이닝 139삼진 평균자책점 3.84라는 인상적인 성적을 기록했다.[13] 시즌 도중 손바닥에 물집이 생겼으나, 그 뒤에도 부상으로 공친 1999년~2000년 시즌, 그리고 2003년 시즌을 제외하고 나름대로 안정적인 성적을 기록한 투수였다.[14]

2001년에는 팀 내 선발진에서 최다승을 기록하기도 했다. 다만, 2001년 박명환은 말이 좋아 선발투수였지 실질적으로는 스윙맨에 가까웠다. 38경기에 올라왔으나 실제로는 5경기 선발, 33경기 계투였고 8승을 거뒀지만 7세이브, 3홀드도 같이 거뒀다. 그 해 최다승을 거둔 투수는 아이러니하게도 마무리 투수인 진필중과 똑같이 스윙맨으로 굴려진 이혜천이었고 둘 다 10승도 못 거뒀다.[15] 즉, 01시즌 두산은 단 한 명의 10승 투수도 없이 우승을 했다는 소리다.

위력적인 포심과 슬라이더와는 별개로 이 시절부터 부상이 잦은 게 문제였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200이닝을 넘겨 본 적이 없으며, 특히 두산에서 보낸 마지막 두 시즌 역시 피안타율 2할대 초반, 이닝당 1개 이상의 탈삼진율 등 비율 성적은 매우 좋았지만, 부상으로 두 시즌 합쳐 234.2이닝 투구에 그쳤다. 사실 고졸 3년차까진 180이닝 거뜬히 소화한 투수였으니[16] 처음부터 유리몸이었다곤 할 수 없다. 고졸 신인을 1년차부터 3년까지 마구잡이로 굴려먹은 김인식 감독의 기용이 문제였다. 다만 그런 부분과는 별개로 박명환 본인은 김인식 감독을 스승으로 모시면서 존경하고 있다. 이는 방송이나 여러 모습에서 볼 수가 있는 부분이다.

파일:external/3.bp.blogspot.com/53ffd9a31adab4447f29.jpg

2005년에는 갑상선 항진증으로 인해 양배추를 넣고 투구하다가 규정 위반으로 걸린 사건으로 인해 "박배추"라는 별명이 생겼다. 양배추잎을 모자에 넣으면 시원해지지만 이 일 이후 KBO양배추잎을 '이물질'로 규정, 반칙과 위반으로 판명하고 그 이후에 양배추잎을 모자에 넣는 행위를 금지하게 된다. 참고로 이는 이승엽의 56호 홈런 이후 두 번째로 미국 현지 언론에 보도될 정도로 유명한 해프닝이었다.[17][18]

파일:스펀지박명환.jpg

파일:attachment/민병헌/minbaechoo.jpg

이는 스펀지에서 먼저 소개된 적이 있었으며, 아내가 스펀지를 보고 추천했다고 한다. 그래서 아내와 함께 스펀지 100회에 특별출연 하기도 했다. 또한 일본에서도 모자 안에 양배추잎을 넣으면 시원해진다는 생활 속 지혜의 대표적인 예로까지 알려지게 되었다... 흠좀무 여담으로 당시 스펀지에서 양배추 실험 대상자 중 한명이 덕수고 시절의 민병헌. 해당 문서 참조. 그리고 개그 콘서트에서 개그맨 윤성호가 개그 코너 하류인생에서 패러디를 했을 정도로 임팩트가 컸던 사건이다.

후에 한 박명환야구TV 영상에서 그 때 썰을 풀었는데 당시 10연승 중이라 징크스 때문에 머리를 안 잘라서 모자가 뜬 탓에 양배추가 떨어진거 같다고 밝혔다. 그리고 아이스박스에 이닝당 1개씩 양배추를 9개씩 넣었다고 한다. 남은 것은 다른 동료들이 썼다고.[19]
2002년부터 2006년까지 두산의 선발진을 쭉 지키며 매년 10승 정도는 거둬서 제 몫을 했다. 특히 2004년에는 12승을 거두면서 에이스 역할을 했다.

하지만, LG 트윈스로 이적할 때부터 이야기가 달라진다.

2.2. LG 트윈스 시절

파일:/image/109/2010/04/12/201004120919021101_1.jpg
LG 트윈스 시절

2.2.1. 2007년~2010년

어쨌건 당시 FA 선수 수집에 돈을 아끼지 않던 LG 트윈스가 4년 40억 원(계약금 18억, 연봉 5억, 옵션 +/- 2억) 이라는 거액에 그를 낚아챘다.[20][21] 이 때 두산에서 같은 금액을 제시했는데 LG로 갔다는 오해를 많이 샀다고 하는데 실제로는 두산은 금액 자체를 제시한 적이 전혀 없었다고 한다. 즉, 제시했다는 언플만 했다는 것. 관련기사[22][23] LG에서의 첫 시즌인 2007년에는 10승 6패 평균자책점 3.19, 155.1이닝 동안 117삼진이라는 나름대로 괜찮은 기록[24]을 내며 전년도 꼴찌[25]였던 LG를 5위로 끌어올리는 데 일익을 담당했으나[26]….

그 뒤 2008년부터 2010년까지 부상에 시달렸다. 3년 동안 던진 투구 이닝이 115이닝, 올린 승수가 단 4승이며, 이마저도 2010년 한 해 올린 승수이다. 1년 당 38⅓이닝, 선발 6이닝으로 6~7 경기 정도로 생각해볼 수 있다. 박명환 본인은 자비로 수술 받고 재활을 원했는데 투수코치인 양상문이 복귀를 부추겨서 말아먹은 감도 없지 않다고 한다.[27]

2010년 시즌엔 76이닝을 던지면서 94안타를 허용하고 삼진 개수가 46개에 불과하다. 이미 전성기의 구위는 잃어버린 지 오래인 듯. 그나마 인상적인 경기는 6월 10일, 6회 2사까지 퍼펙트게임을 시전한 경기였다. 물론 야갤러들이 설레발 치자마자 박살났지만...

LG에서 4년 동안 40억을 받으면서 던진 투구 이닝이 270⅓이닝, 쌓은 승패가 14승 16패, 전매특허였던 탈삼진 역시 185개에 불과하다. 참고로 류현진2010년 1년간 기록한 삼진 개수가 187개, 본인 최다 기록이 181개였다.

sWAR도 4년간 3.49로 1WAR당 12억 언저리, 당시 최고액에 근접함을 생각하면 우규민의 FA 이상으로 효율이 나빴다고 볼 수 있다.

2.2.2. 2011년

결국 2011 시즌을 앞두고 연봉이 5억 원에서 5,000만 원으로 무려 90%가 삭감되었다.[28] 이 삭감률은 현재 한국프로야구 출범 이래 최대 삭감률이었으나[29]. 2020년에 이택근이 5억에서 5000만원으로 삭감당하며 타이기록을 세웠으며 2023년, 이재원이 10억에서 1억으로 연봉삭감을 당하며 90%의 삭감률로 또 한번의 타이기록을 세웠을 뿐만 아니라 박석민이 7억에서 5천만원으로 삭감당하며 92.9%의 미친 삭감률로 기록을 깼다. 사실 연봉만을 따졌을 때 90%일 뿐이지, 실제 계약 액수를 감안해 본다면 1/20토막(95% 삭감)이 된 것. 하지만 LG 팬들은 연승을 끊는 남자와 더불어 왜 5,000만원씩이나 주냐고 분노했었다.

거기에 새로 취임한 백순길 LG 트윈스 단장에게 언론을 통해 직접적으로 디스까지 당했다. 그러게 진작에 잘했으면 이런 일을 당하나

들려 오는 소식으로는 대학 팀하고 연습경기에 등판했지만 신나게 두들겨 맞고 떡실신했다고 한다. 구위를 회복한다고 해도 LG 트윈스의 마운드 상황이 창단 이래 가장 널널한 편이었기 때문에[30] 박명환이 껴들수 있을 여지도 없던 데다가, 구속 & 변화구 모두 무뎌진 상황이라 이대로 간다면 은퇴할 가능성이 짙다고 평가되었다.

2.2.3. 2012년

LG에서는 그를 보류선수 명단에서 제외하지 않았고, 연봉도 5천만원으로 동결했다. 이로써 그에게 2012년 한 해 더 기회가 주어졌다... 라고 쓰고 선수협 총알받이라고 읽는다[31] 그리고 기회만 주어졌고 여전히 소식은 없다. 승부조작 사건으로 인해 김성현과 박현준이 이탈했다고는 하나 이미 박명환은 2군에서도 부진해서 기회는 전혀 없었다.

7월 10일 독립 야구단 고양 원더스의 선수들에게 배트·글러브 교환권을 제공했다고 한다.

결국 노쇠화로 부활에 실패하며 구단에서는 2012년 시즌 종료를 앞두고 경헌호, 김유선, 심광호, 이대환, 손인호, 이대진 등과 함께 박명환을 방출하기로 했다. 2012년 11월 8일 기사에 의하면 자유계약 신분으로 풀어질 것으로 보인다. 그러면서 선수 자신은 아쉬움이 컸는지 LG 트윈스에서 재기를 노리고 싶다고 밝혔다.

2013년 1월 10일 기사에 따르면 선수 생활을 계속하겠다는 의지를 보이고 있다. 해외 진출을 도전할 것이라고... 이후 최원호가 운영하는 피칭 센터에서 꾸준히 준비했다.[32]

2.3. NC 다이노스 시절

파일:/image/076/2015/05/17/2015051801001882400132161_99_20150517170615.jpg
NC 다이노스 시절

공개 테스트를 자청하여 입단 테스트를 받은 후 2013년 10월 5일 연봉 5,000만원의 조건으로 NC 다이노스에 입단했다. 로케이션으로 승부해 왔던 손민한과는 달리 직구 & 슬라이더 일변도의 구종으로 승부했던 박명환이었던지라 부활의 가능성에 대해서는 의구심을 갖는 팬이 많았지만, 그나마 유종의 미를 거두기를 바라는 팬들도 많다.

2.3.1. 2014년

2014년 2월 22일 대만퉁이 세븐일레븐 라이온즈와 맞붙은 연습경기에서 첫 실전 등판, 1이닝 3실점으로 부진했다.

3월 11일 LG와의 시범경기에 등판. 1이닝 무실점으로 활약하였다. 이 경기를 계기로 계투조로 낙점받았다.#

이후 최고 구속 144km/h를 기록하며 나쁘지 않은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손민한에 이어 부활해 준다면 젊은 선수들 위주인 NC에 큰 플러스가 될 것이다.

하지만 시범경기에서 그저 그런 성적을 보이며 개막 엔트리에 포함되지 못했다.

6월 1일 1군에 등록되었다.# 원래는 올스타전 전후에 등록 예정이었지만, 김경문 감독이 일정을 앞당겼다.

6월 4일 넥센 히어로즈전 9회초에 등판, 1이닝 무실점으로 경기를 마쳤다. 오랜만에 등판에 긴장했는지 몸이 덜 풀렸는지 몰라도 볼넷만 3개를 내줘 위기를 자초했지만, 1루수 플라이 아웃과 삼진 2개로 이닝을 마무리했다.[33] 이날 1,425일만에 올라온 1군 무대에서 박헌도를 삼진 아웃으로 잡으면서 역대 5번째 1400K 기록을 세웠다. 경기후 인터뷰

6월 13일 태드 웨버가 부상으로 한 이닝도 던지지 못하고 강판된 경기에서 9회말에 등판했지만, 1사 상황에서 민병헌에게 볼넷을 준 이후 폭투와 오재원 타석에서 삼진을 잡을때 슬라이더가 빠지며 끝내기 폭투로 패전 투수가 되었다. 이후 다음날 1군에서 말소되었다. 김경문 감독의 말에 의하면 아직 시간이 더 필요한 것같다며 말소 이유를 밝혔다. 얼마 던지지는 못했지만 실제로 슬라이더는 건재했으니, 다시 올라오면 괜찮은 모습을 보여 줄 것으로 기대된다.

7월 22일 한화 이글스와의 경기에 10회말 1사 1, 2루 상황에서 등판하였으나, 2연속 볼넷으로 결국 결승점을 헌납하였다.

김경문 감독이 남은 시즌은 선발로 기용한다고했다.

10월 17일 시즌 마지막 경기 두산 베어스전 연장 10회말 1:1 상황에 등판하였다. 선두 타자 김응민에게 몸에 맞는 볼을 허용하며 흔들리나 싶었지만 이후 11회말까지 무실점으로 막아내고 지명타자 소멸로 12회초 타석에 올라와서 3구 삼진을 당하였다. 12회말 1사 1루에서 정수빈의 타구가 애매하게 빠져나가고 NC 내야수들의 개그수비로 1,3루가 되었고 결국 김진형에게 끝내기 적시타를 맞아 패전 투수가 되었다. 비록 지기는 했지만 투구 내용은 나쁘지 않았던 편.

준 플레이오프 엔트리에서 제외되었으며, 다음 시즌 선발로 활약하기 위한 준비에 들어간다고 한다. 나이가 많은데다가 2014년 성적이 좋다고만은 볼 수 없는지라 다음 시즌엔 어떨지 미지수.

2.3.2. 2015년

2군에서 시작하며 어김없이 부활 기사가 나오고 있다.

연습경기의 투구 내용도 나쁘진 않은 편이기에 이번 시즌에 손민한처럼 재기할 수 있을지 주목되고 있다. 팬들은 07시즌 이후 성적과 부진 때문에 딱히 기대는 없지만 손민한처럼 부활하면 좋겠다는 미적지근한 반응만 보였다.

하지만 개막 엔트리에 포함되지 못했고, 시즌 개막 직후 2군에서 열심히 얻어맞았다.

그러다가 언제 1군에 등록되었는지 5월 6일 KIA전 선발로 예고되었다. 상대도 하필이면 양현종이라 팬들도 로또 긁는 심정으로 경기를 지켜봤으나 의외로 5이닝 2실점으로 나쁘지 않은 피칭을 보여 줬다. 그러나 팀의 깝깝한 타격으로 패전 투수가 될 뻔했다가 팀이 8회 3득점, 9회 끝내기 안타로 팀이 승리하면서 패전은 면했다.

5월 17일 삼성 라이온즈전에 선발 등판하여 6이닝 무실점 2피안타 무사사구 4삼진으로 호투하여 1,789일 만에 선발승을 거두었다.

그러나 그 뒤로 1군에서 사라졌다. 어디까지나 1군에서의 부활투는 유종의 미에 가까웠을 뿐. 2군 성적을 보면 은퇴해도 할 말이 없을 정도다. 프로경력 20년차에 39살이라는 나이를 감안하면 사실상 소생 가능성은 낮다.

10월 28일 있었던 프야매 카드깡 이벤트 방송에서 정수근의 언급에 따르면 투수코치로 새출발하게 되었다고 한다. 2군에서 지도자 수업을 받았다고 하며, 2015년 11월 9일 NC 다이노스에서 공식 은퇴를 발표했다. 보직은 2군 투수 보조코치라고 하며, PO 종료 이후 지도자로 나서고 있다고 한다.

그가 남긴 통산 성적은 103승 93패 8세이브 9홀드.

LG 시절의 먹튀 이미지가 강해서 그렇지, 이 선수도 통산 100승 투수이며 OB-두산 베어스의 역사에 길이 남을 레전드임은 사실이다.[34]
2000년대에 그와 함께 우완 3대 트로이카라고 불리던 손민한이나 배영수가 110승을 돌파하면서 현역으로 뛴다는 점에서도 이래저래 아쉬울 따름이다.[35]

3. 국가대표 경력

3.1. 2006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2006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을 앞두고 국제야구연맹이 주관해 실시한 도핑 테스트에서 금지 약물 중 하나인 노르안드로스텐디아올이 검출되어 1경기만 출장한 채 대표팀에서 낙마했다.

4. 연도별 성적

역대 기록
연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승률 ERA 피안타 피홈런 4사구 탈삼진 실점 자책점 WHIP
1996 OB 28 185⅓ 7 12 0 - 0.368 3.84 149 18 87 139 86 79 1.225
1997 26 154⅔ 8 12 0 - 0.400 3.96 138 8 82 126 74 68 1.377
1998 31 187
(2위)
14
(5위)
11 0 - 0.560 3.22 159 8 120 181
(2위)
75 67 1.449
연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승률 ERA 피안타 피홈런 4사구 탈삼진 실점 자책점 WHIP
1999 두산 7 16⅓ 1 1 1 - 0.500 4.96 13 0 13 20 9 9 1.531
2000 6 11⅔ 1 0 0 1 1.000 3.09 6 3 7 19 4 4 1.114
2001 38 77⅔ 8 5 7 3 0.615 4.29 76 6 34 77 41 37 1.378
2002 30 185⅔ 14
(5위)
10 0 0 0.583 3.44 173 12 75 169
(2위)
78 71 1.298
2003 19 100⅔ 5 10 0 0 0.333 5.19 113 13 49 76 65 58 1.579
2004 26 158⅔ 12 3 0 0 0.800
(2위)
2.50
(1위)
130 4 59 162
(1위)
50 44 1.147
(2위)
2005 20 112⅓ 11 3 0 0 0.786
(2위)
2.96 81 4 64 113 40 37 1.237
2006 28 122⅓ 7 7 1 4 0.500 3.46 90 6 50 132 52 47 1.128
연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승률 ERA 피안타 피홈런 4사구 탈삼진 실점 자책점 WHIP
2007 LG 27 155⅓ 10 6 0 0 0.625 3.19 133 11 76 117 59 55 1.320
2008 5 23 0 3 0 0 0.000 8.61 32 1 21 16 22 22 2.217
2009 4 16 0 1 0 0 0.000 6.19 14 2 9 6 12 11 1.438
2010 15 76 4 6 0 0 0.400 6.63 94 17 34 46 62 56 1.645
2011 1군 기록 없음
2012
연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승률 ERA 피안타 피홈런 4사구 탈삼진 실점 자책점 WHIP
2014 NC 5 5 0 2 0 0 0.000 7.20 7 1 9 7 5 4 3.000
2015 11 26 1 1 0 0 0.500 4.85 36 6 5 15 14 14 1.58
KBO 리그 통산
(17시즌)
326 1613⅔ 103 93 9 8 0.526 3.89 1408 114 799 1421 734 669 1.344
완투, 완봉 기록
연도 완투 완봉
1996년 5완투 3완봉
1997년 2완투 0완봉
1998년 5완투 1완봉
2006년 1완투 0완봉
통산 13완투 4완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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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준결승전에서 주형광의 부산고에 패했다.[2] 먼 훗날 2019년 본인의 유튜브 채널에서 이 당시 승리를 합작한 선배 신윤호를 게스트로 초청해 썰을 풀었는데, 전국대회 4강에 진출해야 대학 진학이 보장되는 시스템으로 인해 굉장한 부담감을 가지고 출전했지만 7이닝 무실점으로 잘 막고 내려왔으며 당시 3학년 졸업반이었던 신윤호가 남은 2이닝을 무실점으로 깔끔하게 막아 잘 마무리했다고 회고했다. 학교는 다르지만 5살 위 선배인 강병규 역시 비슷한 일화가 있다.[3] 충암고는 박명환의 동기생 이경원이 먼저 등판해서 일찍 무너지기 시작하면 박명환을 투입시켜 불을 끄는 경기운영 패턴을 주로 보여줬다.[4] 이경원은 박명환과 같은 해 드래프트의 고졸 우선지명을 받아 LG에 입단해 프로에 진출한다. 다만 프로에서 크게 성공하지는 못 했고 1998년에 OB로 이적, 다시 2003년에 KIA로 이적했고 2005 시즌을 끝으로 은퇴했다.[5] 당시 그의 동기로 휘문고의 김선우, 광주일고의 서재응이 있었다. 다만 박명환은 이들보다는 아래로 평가되었다. 결과적으로 이들은 각각 고려대와 인하대에 진학했다가 중퇴하고 1997, 1998년에 미국으로 건너간다.[6] 먼 훗날 박명환이 개인 유튜브 채널인 박명환야구TV에서 밝힌 바로는, 고려대에서는 2학년까지 다니고 요미우리 자이언츠로 보내준다는 조건을 걸었다고 한다. 이 때가 4살 위 선배인 조성민이 고려대를 졸업하고 요미우리로 이적했을 때다.[7] 아버지의 양복 사업은 두 차례나 망했고, 그의 누나는 대학 진학 대신 볼링장 사환으로 취업했을 정도로 어려웠다. 박명환 본인도 굉장히 어려운 경제사정에서 야구를 했다.[8] 같은 해 또 다른 유망주 동기생도 가난한 집안 사정으로 인해 마찬가지로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거액의 계약금을 받고 프로에 직행하는데 그가 바로 광주의 김상진이다.[9] 그 당시 같이 고졸우선 지명을 받았던 선수 중 한 명이 휘문고등학교김선우다.[10] 동기생 이경원도 고졸 우선지명으로 프로에 진출하지만 박명환과는 다르게 잠실 라이벌 LG에 지명받았다.[11] 부모님이 충청도 출신이라 예전부터 OB의 팬이었다고 밝히기도 했다.[12] 당시 OB는 전년도 우승팀이었는데, 급격한 후유증을 겪으며 꼴찌로 내려앉았다. 사실 막판에는 이듬해 드래프트에서 대학 최고 포수였던 진갑용을 2차 1순위로 잡기 위한 탱킹 성격이 강하긴 했지만...하지만 홍성흔이라는 괴물이 등장하여 이도 헛수고에 그쳐버렸다[13] 특히 그 해 3완봉승을 기록하여 1992년 빙그레 정민철이 기록한 단일시즌 순수 고졸신인 최다 완봉승과 타이 기록을 이뤘지만 박명환 이후 순수신인 2완봉 이상 투수는 나오지 않고 있다.[14] 그런데 2000년에는 아예 공친 건 아니고, 한국시리즈에 등판하기도 했었다. 6차전을 마무리한게 그였으니.[15] 심지어 박명환은 그렇다 쳐도 진필중은 마무리 투수가 50경기 이상 올라와서 89이닝 이상을 던졌다. 포스트시즌을 합치면 100이닝 언저리를 던졌다는 소리. 이혜천도 다를 바가 없어서 53경기 142이닝을 던졌고 포스트시즌을 합치면 150이닝을 우습게 넘는다. 또한 차명주는 84경기 97이닝을 던졌는데 역시 포스트시즌을 합치면 100이닝을 훌쩍 넘어버린다. 그 만큼 두산 투수진이 답이 없었다고 봐야겠지만.[16] 게다가 신인 첫 해 기록한 185.1이닝은 191.2이닝을 투구했던 5년 선배 진필중에 이은 팀 내 2위였다.[17] 사실 모자 속에 양배추를 넣은 것은 베이브 루스가 원조다.[18] 훗날 이 사진은 컴프매에서 박명환의 프로필 사진으로 남는다.[19] 그러니까 박명환 외에도 다른 두산 선수들이 모자에 양배추를 넣었다는 것이다.[20] LG에서는 예전부터 FA 시장의 큰 손으로 불려오며 여러 명의 거액 FA를 영입했으나, 줄곧 실패한 사례가 많았다. 2001년 홍현우를 4년 18억으로 영입했으나 해태 시절 과도한 웨이트 트레이닝의 여파로 인해 그 후유증으로 부상과 부진이 연달아 찾아오며 퇴물로 전락, 2004년 진필중을 4년 총 30억으로 영입했으나, 두산 시절부터 김인식의 혹사로 망가진 그는 FA 직전해인 2003년 이미 하락세를 보였고, 결국 진필패로 전락해서 2007년 방출, 마해영은 사실 계약은 2004년 KIA와 4년 총 28억에 했으나, 계약기간을 채우지 못하고 LG로 트레이드되면서 LG가 잔여연봉을 대신 내줘야했었다. 그렇게 해서 LG가 마해영에게 쓴 돈이 8억 남짓. 심지어 마해영은 2군 수당 문제로 구단과 소송전까지 벌였다. LG의 FA 잔혹사는 이진영정성훈을 영입한 후인 2009년에야 끝난다.[21] 일본 진출설도 나왔다. 한신 타이거즈를 포함해 4개 팀이 관심을 보였다는 기사도 나왔다.[22] 애초에 두산은 프랜차이즈 선수 잘 안 잡는 구단으로 유명하다. 더군다나 박명환의 경우는 잔부상을 달고 살았으니 구단 입장에서는 찝찝했을 터.[23] 스톡킹에서 밝히길, 아예 제안도 안하고 몸만 갔다고 한다.[24] 물론 이 해는 역대급 투고타저 시즌이었고 이닝 이팅 능력도 그저 그랬다. 스탯만 놓고보면 무난해보이지만 박명환이라는 이름 값 + 연봉 5억원을 생각하면 가성비가 별로 좋은 편은 아니다.[25] 뿐만 아니라, 6668 암흑기였다.[26] 이 해 LG가 PO에 탈락한 데에는 마해영의 .072라는 역대급 먹튀와 우규민의 후반기 체력 저하로 인한 13블론세이브가 컸다. 하지만 마해영 탓만 하기에는 마해영은 딱 11경기 밖에 안 뛰고 나머지 시즌 내내 2군에서 썩었던지라....[27] 그래서인지 박명환이 양상문을 그리 좋게 보지만은 않는다. 정작 양상문이 가장 이상적이라고 본 스타일의 투수가 박명환이었다.[28] 이 신연봉제의 여파로 인해서 심수창은 3000만원으로, 경헌호는 3300만원으로 삭감되었다. 그리고 작은 이병규와 오지환이 억대 연봉을 받게 되었다.[29] 최고 삭감금액의 기록은 이후 한화 이글스의 외야수인 이용규가 17시즌 부상으로 부진하게 되자 스스로 FA와 연봉 인상을 포기하며 4억원에 계약해 이 기록은 깨졌으나 2달뒤 2018년 1월 삼성 라이온즈의 투수 장원삼이 7억 5000만원에서 2억으로 이용규보다 더 많은 5억5천만원 삭감되면서 그 기록을 깼다.그리고 윤석민(투수)이 18시즌 부진하게 되자 12억 5000만원에서 10억 5000이 깎인 2억이 되었다! 윤석민의 18시즌기록이 0승 8패 11세이브에 방어율이 무려 6.75...[30] 당시 LG는 박명환의 부활이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보고 그를 대신할 하위 선발로 KIA에서 입지가 약해진 이대진까지 영입했다. 물론 둘 다 부활에 실패하고 같이 옷을 벗었지만.[31] 이 시기 박재홍 회장이 선수협 사무총장으로 박충식을 선임하려고 하던 걸, 두산의 이혜천, KIA의 김상현, 삼성의 현재윤과 같이 반대해서 욕을 먹었다.[32] 2012 시즌을 끝으로 최원호는 LG 재활코치일을 그만두고 피칭 연구소를 개업했다.[33] 볼넷이 많아지면서 투구수가 32개로 1이닝을 던진것 치고는 많은 편이었다.[34] 사실 잔부상만 아니었더라면 더 많은 승수를 올렸을 지 모른다. 그의 마지막 전성기인 2007년에는 130승까지 노려 본다는 분석도 있었으니...[35] 배영수는 2000~2019년까지 20년간 선수생활을 하면서 138승을 거뒀고, 손민한은 1997~2015년까지 19년간 선수생활을 하면서 123승을 올렸다. 이 중에서 승수가 가장 앞서던 쪽은 가장 먼저 프로에 입단한 박명환이었지만, 2007년을 끝으로 주춤한 사이에 나머지 두 선수가 앞지르게 된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