맷 르티시에의 수상 이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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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 수상 | ||||
| 1989-90 · 1993-94 · 1994-95 | |||
| [[틀:프리미어 리그 도움왕(1990년대)| 1994-95 PL 도움왕 ]] | | ||
베스트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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맷 르티시에의 기타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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맷 르티시에 Matt Le Tissier | ||
<colbgcolor=#041a6b> 본명 | 매튜 폴 러티셔 Matthew Paul Le Tissier[1][2] | |
출생 | 1968년 10월 14일 ([age(1968-10-14)]세) | |
건지 행정관 관할구, 세인트 피터 포트 | ||
국적 | [[영국| ]][[틀:국기| ]][[틀:국기| ]] ( [[잉글랜드| ]][[틀:국기| ]][[틀:국기| ]] | [[틀:국기| ]][[틀:국기| ]][[건지 섬| ]]) | |
신체조건 | 185cm | |
직업 | 축구선수 (공격형 미드필더 / 은퇴) 분석가 | |
경력 | 선수 | 사우스햄튼 FC (1986~2002) 이스트리 FC (2002~2003) 건지 FC (2013) |
국가대표 | 8경기 (잉글랜드 / 1994~199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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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잉글랜드의 전 축구선수. 선수 시절 포지션은 공격형 미드필더.프리미어리그 미드필더 최초로 100골 득점 고지를 돌파한 사우스햄튼 FC의 레전드로 영국 축구 최고의 재능을 말할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선수이다. 은퇴한 후에는 축구해설자로 활약하는 중이다. 실력, 매너, 그리고 드라마틱한 모습까지
2. 활약
시즌 | 리그 출전 | 득점 |
89-90 | 35경기 | 20골 |
90-91 | 35경기 | 19골 |
91-92 | 32경기 | 6골 |
92-93 | 40경기 | 15골 |
93-94 | 38경기 | 25골 |
94-95 | 41경기[3] | 20골 |
95-96 | 34경기 | 7골 |
96-97 | 31경기 | 13골 |
97-98 | 26경기 | 11골 |
98-99 | 30경기 | 7골 |
99-00 | 18경기 | 3골 |
00-01 | 8경기 | 1골 |
01-02 | 4경기 | 0골 |
통산 | 443경기 162골 |
은퇴 이후, 2011년에 건지 FC 회장직을 지내다가 2014년 8월에 사임했다.
3. 플레이 스타일
잉글랜드가 배출한 최고의 트레콰르티스타로, 정통 10번의 정수를 보여준 선수. 수비 가담과 활동량은 저조했지만 기술적인 능력으로는 흠 잡을 곳이 없었다. 리그 최고급 플레이메이킹 능력, 빠른 발 그리고 당시 공격형 미드필더라고는 믿기지 않을정도의 득점력을 가졌으며, 양발을 자유자재로 사용했다. 당시 거친 축구를 구사하여 투박하지만 헌신적인 선수들을 선호했던 프리미어 리그에서 몇 안되는 테크니션으로 이름을 떨쳤다.전술 이해도가 수준급으로 양질의 패스를 위한 위치 선정에 탁월한 재능을 보였고, 패스 능력도 좋아 저조한 퍼포먼스로 허덕이던 동료들의 발에 공을 붙여주는 구질을 구사했다. 이마저도 통하지 않으면 본인이 직접 만들고 넣었는데, 93/94시즌 사우스햄튼이 리그 내내 49골을 넣고 강등권 (18위) 에서 허우적거리던 때에 25골 9 어시스트, 무려 38경기에서 34 공격 포인트를 쌓아 팀의 1시즌 공격 포인트의 70%를 차지하는 괴랄함도 선보였다. 그 다음 시즌에도 41경기에서 34 포인트를 다시 기록하며 팀의 10위 안착에 크게 기여했다.또한 무시무시한 페널티킥 정확도를 자랑하는 선수로, 커리어 통산 PK를 49회 시도해서 48회 성공하여 실축은 단 1번뿐일 정도로 패널티 상황에서 침착함을 가지고 있었다. 프리미어 리그 역대 페널티킥 최다 득점자인 앨런 시어러도 르 티시에가 자기보다 PK를 더 잘 찰거라는 견해를 밝히기도 했다.
상술했듯이 미드필더면서 팀을 멱살잡고 끌고 갈 정도로 득점력이 뛰어나기도 하지만 골 자체가 굉장히 시원스럽게 들어가거나 멋지게 넣는 스타일이라 프리미어리그 10주년 기념 최고의 골 TOP 10 중에서 르 티시에가 넣은 2골이 선정되기도 했다.가장 유명한 경기로는 2001년 100년이 넘은 홈구장 "더 델"의 마지막 홈경기에서 부상으로 선발에서 제외된 아스날과의 경기가 있다. 부상임에도 후반 교체출전해 역전을 시키는 두번째 골을 발리슛으로 성공시키며 팀의 3:2 승리를 이끈 모습이다. 마지막 황혼기에 보여준 투혼이 대단했다.
커리어 대부분을 중하위권의 사우스햄튼을 위해 헌신한 선수로, 앨런 시어러와 많이 비교되는 선수이다. 둘 다 엄청난 재능을 가졌으면서도 망해가는 중하위권 팀에서 멱살캐리 수준으로 충의의 화신에 버금가는 모습을 보여줬다. 그 댓가로 수상 경력은 초라하지만, 구 사우스햄튼 홈구장 부지에 르 티시에 거리가 있을 정도로 구단 내에서 넘사벽급의 입지를 갖고 있다.
골 셀러브레이션이 매우 건성건성 하기로도 유명한데 골넣고 크게 기뻐하는 모습을 보기 드물다.
총평을 하자면 천재성과 성품을 겸비한 선수였지만 시대와 리그를 잘못 타고난 조금은 운이 나빴던 케이스였다. 일단 2022년 오늘날까지도 잉글랜드 축구 국가대표팀은 르 티시에와 같은 엔간체를 사용하는 전술을 운용한 적이 없고, 애초에 기술적인 10번을 활용한 축구는 르 티시에같은 재능이 등장한게 신기할 정도로 잉글랜드에서는 불모지 수준으로 사용되지 않았다. 보수적인 색채에서 벗어나 외국인 감독들과 발전된 선수관리체계와 전술들이 즐비한 오늘날의 EPL에선 또 다른 모습을 보여줬을수도 있지만, 역시나 수비력이 형편없었다는 점이 단점. '현대 축구의 반역자'로 불린 후안 로만 리켈메의 비야레알이 그랬듯 수비 가담이 모자란 10번들은 그 천재성을 운용하기 위해선 팀이 온전히 플레이메이커에게 맞춰 돌아가줘야 하는 문제점이 있었는데, 르 티시에도 이에 크게 다르지 않았다. 팀원 전체의 압박이 중시되는 오늘날의 프리미어리그에서도 이와 같은 스타일은 중용되기 힘들 가능성이 크지만 특히 미셸 플라티니나 프란체스코 토티 등 플레이메이커들이 이름을 떨친 이탈리아 리그 출신이었다면 더욱 높이 날아올랐을 수 있었을 것이다.
4. 기록
4.1. 개인 수상
- PFA 올해의 영플레이어: 1989-90
- PFA 올해의 팀: 1994-95
- 프리미어 리그 도움왕: 1994-95
- 프리미어 리그 이달의 선수: 1994년 12월, 1996년 10월
- 사우스햄튼 올해의 선수: 1989-90, 1993-94, 1994-95
- BBC 올해의 골: 1994-95
- BBC 이달의 골: 1993년 10월, 1994년 8월ㆍ12월
- 잉글랜드 축구 명예의 전당: 2013
- 원 클럽 맨 상: 2015
5. 기타
- 차비 에르난데스가 우상으로 꼽는 인물이다. 그래서 모 인터뷰때 "차비가 님이 우상이라는데 어케 생각함?"이라고 묻자 "엄청 기쁘다. 티셔츠에 <차비는 나를 사랑해>라고 쓰고 다니고 싶을 정도로"라고 반응하기도 했다.
- 본인의 자서전에서 70초 안에 첫 스로인을 만들어 1 파운드를 얻으려 했고 실제로 공을 밖으로 걷어내려 했으나. 팀 동료의 제지로 무산되었다고 밝힌 적이 있다. 이 문제가 밝혀지고 난 뒤 햄프셔 주[4] 경찰에 회부되었지만 경찰은 공익에 부합하지 않으며 경찰 자원이 동원되는게 적절치 않다고 판단, 조사를 진행하지 않았다.
- 어린 시절 토트넘 홋스퍼의 팬으로 유명했는데, 사우스햄튼에서 21살의 나이에 20골을 득점하며 PFA 올해의 팀에 선정되고 바야흐로 괴물 유망주의 출현을 예고하자 바로 그 토트넘에서 영입 제안이 오게 된다. 서류 작업까지 마무리하며 이적 직전까지 갔지만, 르 티시에 본인이 약혼을 하게 되며 북런던으로 이사를 고사하자 마지막 순간에 무산되게 된다.이 때 토트넘은 폴 개스코인과 게리 리네커라는 잉글랜드 최고의 재능을 둘이나 갖고 있었는데, 르 티시에까지 합세했다면 구단의 역사가 바뀌었을지도 몰랐을 일.
- 코로나19 대유행 당시 봉쇄에 대해 비판하였으며, 마스크 강제착용을 홀로코스트와 비교하다가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안티백신 지지자이다.
-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자행된 부차 학살이 언론의 거짓말이었다는 식의 리트윗을 올렸다는 점이다. 결국, 비난과 반발이 커지자 사우스햄튼 FC 홍보대사직에서 물러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