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CDD5B2><colcolor=#000000> 작센바이마르아이제나흐 대공국 카를 프리드리히의 대공비 러시아의 마리야 파블로브나 여대공 Великая княгиня Мария Павловна России | ||
이름 | 러시아어 | 마리야 파블로브나 로마노바 (Мария Павловна Романова) |
독일어 | 마리아 파블로브나 로마노바 (Maria Pawlowna Romanowa) | |
출생 | 1786년 2월 16일 | |
러시아 제국 차르스코예 셀로 예카테리나 궁전 | ||
사망 | 1859년 6월 23일 (향년 73세) | |
작센바이마르아이제나흐 바이마르 벨제데 성 | ||
배우자 | 작센바이마르아이제나흐 대공 카를 프리드리히 (1804년 결혼 / 1853년 사망) | |
자녀 | 카를, 마리[1], 아우구스타[2], 카를 알렉산더 | |
아버지 | 파벨 1세 | |
어머니 | 뷔르템베르크의 조피 도로테아 공녀 | |
형제 | 알렉산드르 1세, 콘스탄틴, 알렉산드라, 옐레나, 예카테리나, 올가, 안나, 니콜라이 1세, 미하일 | |
종교 | 러시아 정교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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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작센바이마르아이제나흐 카를 프리드리히 대공의 아내이자 러시아 제국의 여대공.2. 생애
2.1. 어린시절
1786년 2월 16일 러시아의 파벨 황태자와 마리야 황태자비의 다섯째이자 3녀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에는 예쁘지 않다고 평가받았고, 게다가 천연두로 인한 흉터도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재능이 뛰어나고 호기심이 많아 무엇인가를 하려는 성격이어서, 할머니 예카테리나 2세는 손녀의 재능을 좋아했다고 한다.[3]특히 음악에 재능이 있어서 피아노를 매우 잘 쳤고 뛰어난 작곡가들에게서 레슨을 받았다고 한다.
2.2. 결혼
첫째 언니 알렉산드라와 둘째 언니 옐레나가 시집을 간 뒤 다음 혼사는 마리야의 차례였고, 아버지 파벨 1세와 두 언니가 세상을 떠난 후인 1803년에 작센바이마르아이제나흐 공작의 장남이었던 카를 프리드리히와 혼담을 진행한다. 카를 프리드리히의 어머니인 헤센다름슈다트의 루이제 아우구스테의 가족관계의 영향이 있어서 혼담이 가능했는데, 카를 프리드리히의 둘째이모는 프로이센 왕국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의 왕비 루이제, 셋째이모는 바덴 대공국의 대공세자비인 아말리인데 아말리의 3녀이자 마리야의 올케언니였던 바덴의 루이제 공녀가 카를 프리드리히의 사촌이었고, 넷째이모인 빌헬미네는 아버지 파벨 1세의 전처였다.이후 1803년 카를 프리드리히가 러시아에 당도해 1년 간 머물렀다. 이 기간 동안 마리야와 카를 프리드리히는 서로에 대해 알아갔으며 결과적으로 결혼 생활에 큰 도움이 되는 계기가 된다. 마리야와 카를 프리드리히는 1804년 정식으로 결혼했고 9개월 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지냈다.
2.3. 나폴레옹 전쟁
1804년 결혼 당시 작센바이마르아이제나흐 공국의 수도였던 바이마르 사람들은 마리야에 대해 기대가 컸다. 마리야와 카를 프리드리히가 바이마르로 돌아오자 그곳의 사람들은 무도회, 불꽃놀이 등, 다양한 행사로 새 신부인 마리야 파블로브나를 매우 환영했다. 이후 바이마르에서 마리야 파블로브나는 마리아(Maria)로 불리게 된다.강력한 러시아 제국의 여대공인 마리야의 존재는 작센바이마르아이제나흐 공국의 매우 훌륭한 방어막이 되었다. 당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유럽 전체를 휩쓸던 시기였고 작센바이마르아이제나흐 공국의 비롯한 유럽의 작은 공국들이 나라를 지키기 힘든 상황이었다. 실제로 1806년 마리야는 잠시 전쟁을 피해 슐레스비히 지역으로 가기도 했다. 특히 1806년 예나 전투 이후 나폴레옹이 유럽을 제패할 때 시아버지인 카를 아우구스트 공작은 라인 연합에 가입하라는 압력을 받았음에 불구하고 자신의 영지를 지켰다.[4]
이후 나폴레옹이 러시아에 전쟁을 선포하자마자 마리야는 바이마르를 떠나야만 했고, 한동안 보헤미아에 머물면서 오스트리아 제국의 보호를 받았다. 하지만 나폴레옹이 패배하고 러시아가 그 중심에 있게 되면서 마리야는 러시아와의 관계를 더 공고히 하면서 바이마르의 이익을 추구했고 빈 회의에도 갔다. 이때 자신의 새 조국이자 시가였던 작센바이마르아이제나흐는 대공국으로 승격한다.
2.4. 작센바이마르아이제나흐의 대공비
나폴레옹 전쟁 이후 마리야는 자신의 나라 작센바이마르아이제나흐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특히 황폐화된 나라를 보고 여러 가지 일을 하기 시작한다. 수많은 자선사업 단체를 조직하고 운영하면서 백성들에게 사랑을 받게 되는 계기가 된다.[5]1828년 남편 카를 프리드리히가 대공이 되어 마리야 역시 대공비가 되었다. 마리야는 대공비가 된 이후 당시 바이마르를 예술과 과학 방면으로 발전시켰다는 평가를 받았다.
앞에서 언급하다시피 과학이나 예술에 대한 관심도 매우 컸다. 마리야는 평생 예술가들과 많은 교류를 했는데 러시아 시인인 바실리 주코프스키는 물론, 독일의 유명한 시인인 프리드리히 쉴러 역시 마리야에게 시를 바치기도 했다. 과학에도 관심이 많았기에 예나 대학교의 알렉산더 폰 훔볼트의 수업을 듣기도 했다. 후에 마리야는 프란츠 리스트를 바이마르로 초청하기도 했고, 이러한 인연으로 리하르트 바그너 역시 바이마르에서 연주했다. 특히 작센바이마르 인근에 있는 예나 대학교에 여러가지로 많은 기여를 했다고 한다.
2.5. 말년
1853년 남편 카를 프리드리히 대공이 죽자 관례대로 궁정에서 은퇴해서 조용한 삶을 살았다. 1855년 남동생 니콜라이 1세가 죽고 조카 알렉산드르 2세가 즉위하자 마리야는 조카의 대관식을 참여하기 위해 70대의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러시아에 갔었다고 한다.1859년 마리야는 건강이 매우 나빴지만 아들 카를 알렉산더 대공의 생일 전날까지는 양호한 상태를 유지했었다. 아들의 생일을 축하하러 가다가 급작스럽게 7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파벨 1세와 마리야 표도로브나의 자녀들 중 가장 장수했다.
3. 가족관계
3.1. 조상
본인 | 부모 | 조부모 | 증조부모 |
러시아 제국 여대공 마리야 파블로브나 (Grand Duchess Maria Pavlovna of Russia) | <colbgcolor=#fff3e4,#331c00> 파벨 1세 (Paul I) | <colbgcolor=#ffffe4,#323300> 표트르 3세 (Peter III ) | |
홀슈타인고토르프 공작 카를 프리드리히 (Karl Friedrich, Duke of Holstein Gothorf) | |||
러시아 제국의 안나 페트로브나 황태녀[6] (Tsesarevna Anna Petrovna) | |||
예카테리나 2세 (Catherine II) | |||
안할트체르프스트 공작 크리스티안 아우구스트 (Christian August, Prince of Anhalt-Zerbst) | |||
홀슈타인고토르프의 요한나 엘리자베트 공녀 (Princess Joanna Elisabeth of Holstein-Gottorp) | |||
뷔르템베르크의 조피 도로테아 공녀 (Princess Sophie Dorothea of Württemberg) | |||
뷔르템베르크 공작 프리드리히 2세 오이겐 (Frederick II Eugene, Duke of Württemberg) | |||
뷔르템베르크 공작 카를 알렉산더 (Charles Alexander, Duke of Württemberg) | |||
투른운트탁시스의 마리 아우구스테 공녀 (Princess Marie Auguste of Thurn and Taxis) | |||
브란덴부르크슈베트의 프리데리케 공녀 (Princess Friederike of Brandenburg-Schwedt) | |||
브란덴부르크슈베트 변경백 프리드리히 빌헬름 (Friedrich Wilhelm,Margrave of Brandenburg-Schwedt) | |||
프로이센의 조피 도로테아 공주[7] (Princess Sophie Dorothea of Prussia) |
3.2. 자녀
자녀 | 이름 | 출생 | 사망 | 배우자/자녀 |
1남 | 작센바이마르아이제나흐의 카를 공자 (Prince Charles of Saxe Weimar Eisenach) | 1805년 9월 25일 | 1806년 4월 10일 | |
1녀 | 프로이센의 카를 왕자비 마리 (Marie, Princess Charles of Prussia) | 1808년 2월 3일 | 1877년 1월 18일 | 프로이센의 카를 왕자[8] 슬하 1남 2녀[9] |
2녀 | 독일 제국의 황후이자 프로이센의 왕비 아우구스타 (Augusta, German Empress and Queen Prussia) | 1811년 9월 30일 | 1890년 1월 7일 | 빌헬름 1세[10] 슬하 1남 1녀[11] |
2남 | 작센바이마르아이제나흐 대공 카를 알렉산더 (Charles Alexander, Archduke of Saxe-Weimar Eisenach) | 1818년 6월 24일 | 1901년 1월 5일 | 네덜란드의 소피 공주[12] 슬하 1남 3녀 |
자녀로는 장남 카를, 장녀 마리, 차녀 아우구스타, 차남 카를 알렉산더가 있다.
마리야 역시 형제자매들 못지않게 후손이 번성했다. 장녀 마리의 친손녀인 루이제 마르가레테는 영국 빅토리아 여왕의 3남인 코넛과 스트래선 공작 아서 왕자의 아내였다. 이 루이제 마르가레테의 장녀인 코넛의 마거릿 공녀는 스웨덴의 왕세자비가 되어, 현재 마거릿의 친손자와 마거릿의 외손녀가 각각 스웨덴의 국왕과 덴마크의 여왕으로 재위하며 자손을 이어가고 있다.[13] 차녀 아우구스타는 바로 독일 제국의 초대 황제 빌헬름 1세의 황후로 현재 호엔촐레른 가문은 모두 아우구스타의 직계 후손들이니 자녀들 중 최고의 아웃풋이다.
[1] 프리드리히 카를 왕자의 어머니이자 코넛과 스트래선 공작부인 루이즈 마거릿의 할머니.[2] 빌헬름 1세의 황후.[3] 이에 대해 예카테리나 2세는 마리야가 딸이 아니라 아들로 태어났다면 더 좋았을 것이라고 이야기했다.[4] 카를 아우구스트의 며느리 마리야가 알렉산드르 1세의 여동생인 점으로 인해 작센바이마르아이제나흐 공국은 러시아의 보호를 받을 수 있었다.[5] 마리야가 러시아 여대공이기에 개인 재산이 많아서 여러 자선사업 단체를 운영할 수 있었다.[6] 표트르 1세와 예카테리나 1세의 장녀.[7]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와 하노버의 조피 도로테아의 차녀.[8] 바로 밑에 빌헬름 1세의 동생이다.[9] 프리드리히 카를 왕자 등[10]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의 차남이다.[11] 프리드리히 3세, 바덴의 대공비 루이제.[12] 빌럼 2세와 마리야의 여동생 안나의 딸이다.[13] 아이러니하게도 칼 16세 구스타프와 마르그레테 2세는 마리야 여대공의 두 딸인 마리 왕자비와 차녀 아우구스타 황후의 후손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