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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01 00:12:30

리샤르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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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E0F25><colcolor=#fff> 루앙 백작
리샤르 1세
Richard I
파일:리샤르 1세.jpg
이름 리샤르 1세(Richard I)
별명 산 퍼르(Sans-Peur, 겁이 없는 자)
출생 933년 8월 28일
프랑스 왕국 루앙 백국 페캉
사망 996년 11월 21일 (향년 63세)
루앙 백국 페캉
지위 루앙 백작
942년 ~ 996년
아버지 기욤 1세
어머니 스프로타
배우자 엠마, 군노르
자녀 리샤르 2세, 로베르, 모거, 엠마, 하와이즈, 마틸드, 조프루아(사생아), 기욤(사생아), 베아트릭스(사생아), 무리엘(사생아)

1. 개요2. 생애3.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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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노르망디 공국의 전신인 루앙 백국의 제3대 백작.

2. 생애

933년 8월 28일 루앙 백국 페캉에서 출생했다. 아버지는 제2대 루앙 백작 기욤 1세이다. 어머니 스프로타의 기원은 불분명하다. 렌 백작 주헬 베렝거의 딸이라는 설과 샹리스 백작 에베르의 딸이라는 설이 있으나 신빙성이 부족하다고 평가받으며, 스칸디나비아 출신일 가능성도 있다. 932년 노르망디의 모든 노르만 귀족과 파리 백작 대 위그 및 프랑스의 많은 영주들이 참석한 가운데 '덴마크식'으로 기욤 1세와 결혼했다.

942년 12월 17일, 기욤 1세가 플란데런 백작 아르누울 1세의 초대를 받고 피퀴니 인근의 솜강의 한 섬으로 가서 평화 협상을 논의하다가 캉브레 백작의 아들인 보두앵에게 암살당했다. 그 후 그는 10살의 나이에 루앙 백작이 되었고, 베르나르, 라울, 안슬레흐 드 브릭퀘벡, 오스몬드 드 콩텔빌로 구성된 섭정 위원회가 신설되었다. 어머니 스프로타는 기욤 1세가 암살된 후 아스페를렝 드 피트르라는 이름의 부유한 노르만 귀족과 데인족 방식으로 재혼해, 나중에 리샤르 1세와 그의 아들인 리샤르 2세를 보좌한 라울 디브리를 낳았다.

그러나 서프랑크 왕국의 국왕 루이 4세는 리샤르 1세를 영주로서 교육해주겠다는 구실을 대고, 그를 섭정 중 한 명인 오스몬드와 함께 라옹에 있는 자기 궁정으로 이송시켰다. 그는 그곳에서 943년부터 945년까지 머물렀고, 루이 4세는 루앙 백국을 잘게 쪼개 프랑크 공작 대 위그에게 베생과 코탕탱 백국을 수여하고, 몽트뢰유 백작 에르뤼앙에게 루앙 관리를 맡겼으며, 플란데런 백작 아르누울 1세에게 루앙 백국의 나머지 영지를 관리하도록 했다. 이에 반감을 품은 베르나르, 라울, 안슬라흐 등은 945년 다른 귀족과 함께 반란을 일으켜 에르뤼앙을 살해했고, 리샤르 1세는 오스몬드의 도움으로 탈출한 뒤 반란군과 가세해 노르망디를 통치하겠다고 선언했다.

루이 4세는 이에 대응하기 위해 대 위그와 함께 공세를 개시했다. 루이 4세는 페이 드 코를 공격했고, 대 위그는 가체, 에브뢰를 점령한 뒤 바이외를 포위했다. 노르만인들은 이에 대응해 "바다의 왕"을 칭하던 시그트리그(Sigtrygg)에게 구원을 요청했지만, 시그트리그의 노르드 군대는 투르모드가 이끄는 프랑크군에게 격파되었다. 랭스의 수도자 리샤르에 따르면, 9,000명에 달하는 노르만인[1]이 이 전투에서 죽거나 사로잡혔다고 한다.

뒤동 드 생캉탱(Dudon de Saint-Quentin, 960년 또는 970년 ~ 1026)에 따르면, 섭정 중 한명인 베르나르는 루이 4세와 대 위그 사이를 이간질하기로 했다. 그는 먼저 루이 4세에게 노르만인들이 그에게 항복하겠다고 약속해 적대 행위를 종식했다. 이후 그는 대 위그에게 사절을 보내 자신이 왕에게 속았으며 왕에 대항해 위그를 돕겠다고 약속했다. 서프랑크 왕위를 차지할 야욕이 있었던 대 위그는 이를 믿고 루이 4세를 상대로 전쟁을 단행했다. 또한 베르나르는 최근 노르망디에 상륙했거나 오랫동안 정착한 또다른 바이킹 지도자인 하랄드와 연합했다. 945년 7월 13일, 베르나르와 하랄드의 군대는 코봉 전투에서 프랑크군을 결정적으로 격파한 뒤 루이 4세를 생포해 대 위그에게 넘겼고, 대 위그는 루이 4세를 파리에 1년간 감금했다.

946년, 대 위그는 로마왕이자 작센 공작 오토 1세의 압력에 굴복해 루이 4세를 풀어줬다. 이후 루이 4세는 대 위그와 대적해 랭스를 탈환하는 한편, 노르만인들이 대 위그와 연합하는 걸 막기 위해 오토 1세, 플란데런 백작 아르누울 1세, 부르고뉴의 왕 콘라드, 브르타뉴 공작 알란 2세와 연합을 결성했다. 이들은 엡테 강을 건너 루앙을 포위했지만 공략에 실패했고, 이에 역습을 당해 아미앵으로 후퇴했다. 947년, 리샤르 1세는 자기와 화해하려 애쓴 루이 4세에 의해 루앙 백작이자 노르망디의 지배자로 정식으로 인정받았다.

이리하여 노르망디의 지배자로 인정받은 리샤르 1세는 아버지 기욤 1세와 마찬가지로 교회 복원에 힘을 기울였다. 960년 지난날 바이킹에 의해 파괴되었던 생방드리유 수도원에 새로운 수도자들을 보내 파괴된 수도원을 복원하도록 했다. 또한 자기가 태어난 마을인 페캉에 공작의 궁전을 세웠고, 인근에 수도원을 건립했다. 그는 이 수도원에 클뤼니 수도원장 마율을 초대하려 했지만, 마율이 거절하면서 실패했다. 여기에 오랫동안 공석이었던 리지외, 세스, 아브랑챙 교구에 새로운 주교를 세웠고, 바이외, 루앙, 에브뢰, 쿠탕스 교구는 갱신되었다.

954년, 루이 4세가 사망한 뒤 아들 로테르이 서프랑크 왕국의 왕이 되었다. 2년 후인 956년, 프랑크 공작 대 위그가 사망했다. 대 위그의 아들 루이 카페는 당시 나이가 어렸고, 대 위그의 가신이었던 블루아 백작 티보 1세가 섭정했다. 뒤동에 따르면, 티보 1세는 리샤르 1세를 무너뜨릴 계획을 세웠다. 그는 로테르 왕과 그의 어머니 게르베르가, 쾰른 대주교 브루노를 자기 편으로 끌어들였다. 로테르와 브루노는 리샤르 1세를 2차례 초대했지만, 리샤르 1세는 함정이라고 여기고 가지 않았다. 플로도아르 드 랭스(Flodoard de Reims, 894 ~ 966)에 따르면, 리샤르 1세는 961년에 로테르 왕이 수아송에서 개최하고 있던 공의회를 방해하려 시도했지만 실패했다고 한다.

그 후 로테르는 티보 1세의 설득을 받아들여 드루에에 군대를 모은 뒤 에브뢰를 점거하고 티보 1세에게 넘겼다. 그 후 여세를 이어가 노르망디 공국의 수도인 루앙을 향해 진군했지만, 962년 리샤르 1세가 루앙 인근에서 역습을 가해 로테르를 격파했다. 그 후 양자간의 전쟁은 수년간 이어졌다. 리샤르 1세는 적과 맞서기 위해 이베리아 반도에서 약탈을 자행한 뒤 돌아오던 바이킹들을 고용해 샤르트르를 파괴했다. 티보 1세는 전세가 불리해지자 에브뢰를 그에게 돌려주는 대가로 평화 협약을 맺었고, 로테르 왕은 965년에 에페 강둑에서 리샤르 1세와 평화 협약을 체결했다. 이에 따르면, 노르만족은 모든 군사 활동을 중단하기로 했고, 로테르는 노르망디에 대한 모든 종주권을 포기하기로 했다.

이렇듯 로테르 왕과 티보 1세를 성공적으로 격퇴하는 한편, 리샤르 1세는 위그 카페와 손잡기로 했다. 960년, 그는 위그 카페의 여동생인 엠마와 결혼했다. 그리고 위그 카페는 968년에 롤로의 손녀이자 리샤르 1세의 사촌인 아키텐의 아델라이드와 결혼했다. 968년 헌장에서 리샤르 1세는 자신을 위그 카페의 봉신이라고 선언했고, 위그 카페가 왕위에 도전하는 걸 도와주기로 했다. 991년, 위그 카페가 멜룬을 포위 공격할 때 앙주 백작 풀크 3세와 함께 그를 도왔다. 그러나 앙주 백작이 낭트에 지배력을 행사하자, 브르타뉴를 자국의 영향권으로 간주했던 노르망디 공국은 동맹 관계를 뒤집기로 마음먹었다. 리샤르 1세는 블루아 백작 외드 1세와 동맹을 맺었고, 뒤이어 아키텐 공작 기욤 4세, 플란데런 백작 보두앵 4세, 렌 백작 코난 1세와 함께 반 앙주 연합을 결성했다. 그는 동맹을 굳건히 하기 위해 후계자인 리샤르 2세를 코난 1세의 딸 주디트와 결혼시켰고,코난 1세는 자기 아들 조프루아 1세를 리샤르 1세의 딸 하와이즈와 결혼시켰다. 그 후 노르만군은 992년 브르타뉴인들과 함께 코난 1세가 풀크 3세를 상대하는 걸 도왔지만, 풀크 3세가 콩퀴어뤼일 전투에서 승리하고 코난 1세를 사살하는 걸 막지 못했다.

한편, 리샤르 1세와 잉글랜드 왕국과의 관계는 다소 험악했다. 잉글랜드 국왕 애설레드 2세는 리샤르 1세가 자기 왕국을 약탈하는 데인족을 도와준다며 비난을 퍼부었고, 리샤르 1세의 딸인 엠마를 납치하려 했다. 그 후 교황 요한 15세가 전쟁을 막기 위해 특사를 보냈고, 양자는 특사의 중재를 받아들여 991년 3월 18일 각자의 적을 돕지 않겠다고 약속하는 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은 노르망디 공국과 잉글랜드 왕국 사이의 상업 관계가 발전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996년 11월 21일, 리샤르 1세는 페캉에서 사망했다. 뒤동은 그에 대해 "어린 나이에 작위에 올라 일시적으로 혼란을 겪은 영토에 평화와 번영을 회복했으며, 철권으로 지방을 통치했다. 장수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자신의 권위를 행사할 수 없는 젊은 상속인만을 남겼다"라고 평했다. 사후 리샤르 2세가 루앙 백작이 되었다.

3. 가족



[1] 리샤르는 이들을 이교도라고 지칭했으며, 리샤르 1세가 이들의 압력에 굴복해 기독교를 저버리고 우상을 숭배했다고 주장했다.[2] 동프랑크 왕국의 왕 하인리히 1세의 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