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스푸리우스 루크레티우스 트리키피티누스의 딸이자 루키우스 타르퀴니우스 콜라티누스의 아내.로마 왕국의 마지막 왕 루키우스 타르퀴니우스 수페르부스의 왕자 섹스투스 타르퀴니우스에게 겁탈당한 후 자결했다. 이는 로마 왕정이 공화정으로 전환되는 계기가 되었다.
2. 생애
스푸리우스 루크레티우스 트리키피티누스의 딸 루크레티아는 장성한 후 루키우스 타르퀴니우스 콜라티누스와 결혼했는데 서로에게 충실한 부부였기에 루크레티아와 콜라티누스의 결혼은 이상적인 로마 남녀의 결합으로 묘사되었다. 리비우스에 따르면, 루크레티아는 로마에서 아름답고 정숙한 여성으로 명성이 자자했으며 로마 부녀자들의 본보기였다고 한다.전승에 따르면 기원전 509년, 로마의 왕 루키우스 타르퀴니우스 수페르부스는 부유한 도시 루툴레아를 차지하기 위해 그 도시의 주인인 아르데아인에게 전쟁을 선포했다. 타르퀴니우스의 아들이자 로마의 왕자 섹스투스 타르퀴니우스는 이 전쟁터에서 귀족, 장군들과 연회를 벌였는데 여기서 로마의 귀족들은 서로 자신의 부인이 가장 정숙하다고 자랑했다. 그 중 섹스투스의 친척이자 왕의 사촌 동생이었던 콜라티누스는 자신의 부인이 가장 정숙하다고 자신하며 왕자와 내기를 벌였는데, 두 사람은 곧 왕의 허락을 받아 로마로 돌아간 뒤 상대방의 아내를 면담했다. 대부분의 여자들은 유흥을 즐기고 있는 반면 루크레티아만이 홀로 시녀들과 자수를 놓고 있었다. 여기서 루크레티아의 덕망과 미모에 반한 섹스투스는 그녀에 대해 추잡한 욕망을 품게 된다.
얼마 후 아르데아 공방전을 벌이던 중, 타르퀴니우스 왕은 섹스투스를 로마로 심부름 보냈는데 섹스투스는 콜라티누스의 저택에 방문해 극진한 대접을 받았다. 이윽고 밤이 되자 섹스투스는 본인이 묵던 집의 안주인인 루크레티아의 침실로 들어가 그녀를 겁탈했다. 루크레티아는 절개를 지켜야한다며 저항했으나 섹스투스는 그녀를 협박했고 그래도 통하지 않자 결국 "널 겁탈한 뒤에 남자 노예를 데려와서 둘 다 죽여놓겠다"고 최후통첩을 한다. 이는 미천한 노예와 불륜을 저지르다가 도중에 발각되어 그 자리에서 누군가에게 처형당한 것으로 위장시켜 노예와 붙어먹는 더러운 여자로 만들어 극도로 명예를 실추시키겠다는 협박이다. 할 수 없이 루크레티아는 자신의 명예를 위해서 타르퀴니우스에게 굴복하고 둘은 성관계를 한다. 이는 접대의 관습으로 호의를 보인 집주인에 대한 최악의 모욕이었다.
섹스투스가 도망친 후, 루크레티아는 아버지 스푸리우스 루크레티우스 트리키피티누스와 남편에게 당장 집에 와달라는 전갈을 보냈다. 두 사람이 브루투스와 함께 오자, 그녀는 남편이 없는 사이 다른 남자에게 더럽혀졌다고 고백했다. 그녀는 자신의 강간에 대해 말하기 전에 스스로 설명할 기회를 달라 요청했고, 그녀의 결백을 증명할 증인들을 불러들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렇게 그녀의 설명을 들은 남자들이 이 사건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나 논의하는 동안, 루크레티아는 정절을 지키지 못한 책임을 지고 자결하겠으니 복수하겠다고 맹세하라고 청한 후 단검을 뽑아 자신의 심장을 찔렀다. 루크레티아는 죽으면서 아버지 스프리우스, 남편, 남편의 친구 루키우스 유니우스 브루투스에게 복수를 부탁했다.
리비우스에 따르면, 스푸리우스와 콜라티누스, 주위에 있던 로마 부녀자들이 슬픔에 못 이겨 울부짖고 있을 때, 브루투스가 단검을 루크레티아의 가슴에서 뽑은 뒤 들어올리며 맹세했다고 한다.
"가증한 왕의 아들로부터 받은 모욕 전에는 순결했던 여인의 이 피를 보시오! 나는 내 힘이 닿는 모든 수단을 다해 오만한 타르퀴니우스와 그의 범죄한 아내,[1] 그리고 그의 모든 종족을 징벌할 것이며, 어떤 왕도 로마에서 다시는 군림하지 못하게 할 것이오!"
브루투스는 로마에서 무장 봉기를 일으켜 도시를 순식간에 장악한 뒤 민회를 소집해 왕권 폐지와 왕가 추방을 결의하게 했다. 그 후 루툴레아를 포위 공격하고 있던 군대 막사로 떠났다. 한편, 타르퀴니우스는 반란 소식을 전해듣자 소수의 추종자를 거느린 채 로마로 돌아갔다. 그러나 시민들은 성문을 걸어잠그고 입성을 거부했다. 이에 군대로 돌아가려 했으나, 브루투스가 이미 군영에 도착한 뒤 모든 병사들을 포섭해놓았다는 걸 알게 되자 어쩔 수 없이 에트루리아의 도시인 가비이로 피신했다. 그 후 로마인들은 1년간 통치를 맡을 2명의 집정관으로 브루투스와 콜라티누스를 선출했다.
이렇게 갑작스러운 그녀의 죽음에 분노한 로마인들은 복수를 맹세했으며, 이것이 기폭제가 되어 로마인들은 로마 왕정을 전복하고 로마 공화국을 세우게 된다. 또한 섹스투스 타르퀴니우스는 분노한 로마 시민들에게 맞아죽었다. 심지어 로마 시민들이 아예 왕정까지 폐지시켜 버리는 바람에 섹스투스 타르퀴니우스는 자신의 행위로 아버지의 왕위까지 잃게 만들었다.
3. 기타
"미래에는 정절을 지키지 못한 여자들이 나 루크레티아를 예로 들며 변명하지 못할 것이오."
로마 역사학자 티투스 리비우스 파타비누스, 로마사 제1권
로마 역사학자 티투스 리비우스 파타비누스, 로마사 제1권
사실 루크레티아의 생애와 죽음에 대해 동시대의 자료는 기원전 390년 로마 약탈로 인해 없으며, 역사가들이나 전승마다 구체적인 세부 사항에 대해 이야기가 다르다. 때문에 이 이야기는 로마 공화정 탄생에 대한 신화적 윤색의 일부로 여겨지기도 한다.
루크레티아 이야기는 정절을 지키지 못한 여성이 죽음으로써 덕성을 보였다고 해서 로마사의 대표적인 열녀 이야기로 인기가 있었다. 유명한 이야기인지라 후대에 윌리엄 셰익스피어 같은 작가가 희곡으로 쓰기도 했고 고전 미술의 주요 소재 중 하나로 다루어지기도 했다. 허나 자결하는 장면이나 남편에게 고백하는 장면보다는 타르퀴니우스가 나체의 루크레티아를 겁탈하려는 선정적인 장면 위주다. 물론 꼭 선정적인 그림만 있는 것은 아니고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의 루크레티아 그림처럼 자신의 자전적인 경험이 반영된 작품도 있다.
Hans von Aachen 1600년 作 "루크레티아의 강간" | Jacopo Robusti 1578년 作 "타르퀸과 루크레티아" |
그녀의 이름은 현대에도 루크레치아를 비롯한 로망스어군 여성 인명에 계승되었다.
[1] 타르퀴니우스의 아내 툴리아는 남편이 아버지의 왕위를 찬탈하도록 부추겼으며, 아버지가 길바닥에 내팽개쳐졌을 때 마차를 타고 그 위를 질주해 짓밟히게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