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조에밀리아 Reggio Emilia | |||
국가 | 이탈리아 | ||
지역 | 에밀리아로마냐 | ||
면적 | 230.66km2 | ||
인구 | 172,518명[1] | ||
시장 | 마르코 마사리 | ||
시간대 | UTC+1 (서머타임: UTC+2) | ||
레조에밀리아 | ||
1. 개요
이탈리아 에밀리아로마냐 주의 주요 도시로 파르마, 모데나와 함께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치즈인 파르미지아노 레지아노의 생산지이기도 하다.2. 역사
레조에밀리아는 로마 공화국의 집정관이었던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가 세운 비아 아이밀리아를 세우면서 세운 도시로 처음에는 레기움 레피디(Regium Lepidi) 간략하게 레기움(Regium)으로 불렸다. 로마 시대 레기움은 매우 번영했으며 자체적인 행정과 사법을 가진 무니키피움[2]으로 성장하였다. 하지만 서로마 제국이 쇠락하자 이탈리아 반도는 야만인들의 침략을 계속받게 되었다. 특히 레기움은 교통의 요충지에 위치해 너무 쇠퇴해서 암브로시우스가 황폐해진 도시에 포함시키기도 했다. 서로마 제국의 마지막 황제인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가 오도아케르에게 폐위된 후 레기움 일대는 오도아케르의 영토가 되었다. 하지만 레조에밀리아는 롬바르드족, 프랑크족, 마자르족이 계속 침략하였으며 그 때 마다 도시는 약탈당하고 불탔다. 10세기 인근에는 파르마, 브레시아, 모데나, 페라라, 만토바와 함께 토스카나 변경백으로 합병되었다.레조에밀리아는 당시 이탈리아 자유 도시와 마찬가지로 교황청을 지지하는 구엘프와 신성로마제국 황제를 지지하는 기벨린 사이의 다툼이 시작되었고 12세기를 지나서 Scopazzati(빗자루로 도시에서 쓸어 버린 것을 뜻함, 귀족)와 Mazzaperlini(이를 죽이는 사람, 평민)사이의 갈등도 추가되 도시 내부는 격렬한 갈등을 벌였다. 결국 이들 사이의 다툼은 베르트랑 뒤 푸제 추기경이 레조에밀리아를 교황령으로 병합하면서 끝났다. 1452년 레조에밀리아는 모데나 레조 공국의 영토가 되었다. 모데나 레조 공국의 대공인 에르콜레 1세 데스테는 레조에밀리아에 막대한 세금을 부관하고 시인인 마테오 마리아 보이아르도를 시장으로 임명하기도 했다. 하지만 1513년 레조에밀리아는 다시 율리오 2세 교황에게 넘겨졌지만 하드리아노 6세 교황이 죽은 후 모데나 레조 공국으로 반환하였다. 그 후 다른 이탈리아의 도시들과 마찬가지로 이탈리아 통일 운동이 벌어지자 레조에밀리아 시민들은 적극적으로 가담하였다. 1859년 독재자 루이지 카를로 파리니의 지도 하에 레조에밀리아는 통일 이탈리아의 일부가 되었고 1860년 3월 10일 주민투표로 이를 확실하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