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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20 13:17:02

레알 마드리드 CF/보슈코브 체제


{{{#!wiki style="margin: -10px -10px"<tablealign=center><tablewidth=320><tablebordercolor=#fff><tablebgcolor=#fff> 파일:레알 마드리드 CF 로고(1941~1997).svg레알 마드리드 C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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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 ~ 1994
초대
존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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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대
카르세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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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대
요렌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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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대
베르나베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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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대
베라온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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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대
퀴란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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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대
헤르츠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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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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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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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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킨코세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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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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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대
킨코세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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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대
키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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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대
알베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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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대
스카로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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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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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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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
비야롱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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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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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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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대
카르닐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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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대
플레이타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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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대
무뇨스
(무뇨스 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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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대
몰로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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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대
밀랴니치
(밀랴니치 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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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대
몰로니
(몰로니(2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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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대
보슈코브
(보슈코브 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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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대
몰로니
(몰로니(3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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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대
디 스테파노
(디 스테파노(1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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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대
아마로
(아마로 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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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대
몰로니
(몰로니(4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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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대
베인하커르
(베인하커르(1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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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대
토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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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대
디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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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대
안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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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대
베인하커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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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대
플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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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대
델 보스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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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알 마드리드 CF 감독(41대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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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알 마드리드 CF
보슈코브 체제
파일:DcRjrX0W0AAZCJR.jpg
제29대 감독
부야딘 보슈코브
<colbgcolor=#fcaf17><colcolor=#fff> 감독 파일: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 국기.svg 부야딘 보슈코브 / 제29대 감독
회장 파일:스페인 국기.svg 루이스 데 카를로스 / 제12대 회장 (1978~1985)
주장 파일:스페인 국기.svg 피리 / 제25대 주장 (1976~1980)
파일:스페인 국기.svg 미겔 앙헬 곤살레스 / 제26대 주장 (1980~1986)
계약 기간 1979년 7월 1일 ~ 1982년 3월 29일
(2년 8개월 28일 / 1002일)
계약 종료 (구단 내 이해관계와 성적 악화로 사임)
연봉 미상
전술 스타일 공격 축구와 조직적 수비의 조화로운 결합
┗ 공격 축구
┗ 상대 팀에 맞춘 유연한 전술
┗ 조직적인 수비
┗ 선수들에게 자율성 부여
┗ 팀워크와 협력 강조 및 멘탈 관리
역대 전적 139경기 80승 31무 28패 (승률 57.55%)
249득점 136실점
우승 경력 1979-80 라리가 (우승)
1979-80 코파 델 레이 (우승)
2회 우승

1. 개요2. 감독 선임 과정3. 연혁
3.1. 1979-80 시즌3.2. 1980-81 시즌3.3. 1981-82 시즌
4. 득점 순위5. 시즌별 성적
5.1. 대회 성적5.2. 승패 기록
6.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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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레알 마드리드 CF의 제29대 감독 부야딘 보슈코브 체제를 정리한 문서이다.

2. 감독 선임 과정

1979년 6월 30일, 루이스 몰로니 감독이 감독 교체를 받아들이고 물러나자 레알 보드진과 접촉했던 부야딘 보슈코브가 예정대로 레알의 29대 감독으로 부임했다.

3. 연혁

3.1. 1979-80 시즌


1979년 여름 이적시장에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주전 수비수로 활약하며 레알의 수비 안정화에 크게 기여한 후안 솔, 엔리케 볼프가 각각 발렌시아 CFAA 아르헨티노스 주니어스로 이적했고, 헤닝 옌센과 아길라르가 AFC 아약스스포르팅 히혼으로 떠났다. 추가적으로 카를로스 게리니, 마테, 비토리아 소리아, 라파엘 가르시아 코르테스도 팀을 떠났다. 방출 후 레알은 스쿼드를 보강하기 위해 여러 자원들을 영입했는데 대표적 영입이 바로 로리 커닝엄이다. 웨스트 브롬위치 알비온 FC에 95만 파운드를 지급하고 영입했는데, 이는 레알 역사상 첫 영국 국적의 선수였다.[1] 이어 앙헬 데 로스 산토스, 미겔 앙헬 포르투갈, 앙헬 페레스 가르시아, 안토니오 가르시아 나바하스 등을 영입했다. 그리고 PSV 에인트호번레네 판더케르크호프FC 샬케 04의 뤼디거 아브람치크 등과 영입 루머가 돌았지만 실제로 일어나지는 않았다.

라리가 2연패에 이어 3연패에 도전하는 레알은 보슈코브의 공격 축구가 성공적으로 이뤄지면서 리그에서 선전했다. 9월 9일 1라운드 발렌시아 CF전 3-1 승리를 시작으로, 3라운드 홈 엘 클라시코에서 전반에만 5골이 나오는 난타전 끝에 커닝엄의 결승 골로 3-2 승리를 거뒀다. 이후 레알 사라고사, 레알 베티스 발롬피에에 모두 1점 차로 아슬아슬한 승리를 거둔 레알은 레알 소시에다드와 우승 경쟁을 치렀다. 리그 초반 소시에다드의 기세는 정말 대단했고 이에 레알은 8경기 6승 2무를 했음에도 2위에 머물렀다. 그리고 9라운드, 그 소시에다드와의 경기에서 비센테 델 보스케가 퇴장당하는 악재가 터지면서 0-4로 대패했다. 하지만 이후 에르쿨레스를 5-0으로 잡아내며 1위 자리를 탈환했다. 이후 1979년의 남은 4경기에서 3승 1무를 거둔 레알은 1위 자리를 지킨 채 새해를 맞이했다.

한편, 유러피언 컵 1라운드에서는 불가리아PFC 레프스키 소피아를 만났다. 원정에서 로베르토 마르티네스의 골로 0-1로 승리했고, 홈에서는 비센테 델 보스케와 로리 커닝엄의 골로 2-0 승리를 거두며 합산 3-0으로 16강에 진출했다. 2라운드에서는 포르투갈FC 포르투와 상대했는데, 페르난도 고메스에 전반 멀티골을 내주며 0-2로 끌려갔다. 52분 커닝엄이 만회골을 넣었으나 동점은 만들지 못했고 원정에서 아쉽게 1-2로 패배했다. 에스타디오 산티아고 베르나베우에서 열린 2차전, 레알은 전반전에 득점하지 못하고 70분까지도 득점하지 못하며 패색이 짙어졌는데 71분 고요 베니토가 귀중한 선제골을 넣었다. 그리고 레알이 이 귀중한 선제골을 지켜내면서 원정 다득점 원칙으로 2-2 무승부임에도 8강에 진출했다.

1980년 1월, 레알은 아틀레틱 클루브발렌시아 CF에 연달아 패배하며 1위 자리를 내줬으나 라요에 7-0 대승을 거두고 바르셀로나 원정 0-2 승리를 포함해 4연승을 기록해 1위를 기록했다. 이후 남은 경기에서 1번도 패하지 않으며 선전했는데, 소시에다드도 32라운드까지 패배하지 않으며 라리가 역사에 남을 치열한 우승 경쟁을 펼쳤다. 20라운드 1위를 탈환한 레알은 26라운드까지 그 자리를 지키다 3연무를 기록했는데, 27라운드 에르쿨레스전 이후 다시 소시에다드에 밀려 2위를 기록했다. 하지만 28라운드부터 7경기 6승 1무로 끝까지 리그 레이스를 진행했고 이후 레알과 소시에다드의 운명이 갈렸다. 32라운드 소시에다드가 다니엘 베르토니의 멀티골로 세비야 FC에 패배한 반면 레알은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에 4-0 대승을 거두며 레알이 기세를 잡았고, 33라운드에 UD 라스팔마스에 선제골을 내준 이후 산티야나의 멀티골로 역전하며 1위를 탈환했다.
순위 경기 득점 실점 득실차 승점 진출 or 강등
1 레알 마드리드 (C) 34 22 9 3 70 33 +37 53 유러피언 컵 1라운드 진출
2 레알 소시에다드 34 19 14 1 54 20 +34 52 UEFA 컵 1라운드 진출
그리고 대망의 최종 라운드, 레알이 홈에서 펼쳐진 엘 비에호 클라시코에서 3-1로 승리하면서 1점 차로 아슬아슬하게 20번째 라리가 우승을 차지했으며 1968-69 시즌 이후 11년 만에 라리가 3연패를 기록했다. 레알에게는 정말 극적인 우승이었는데, 만약 소시에다드가 세비야전을 비겼거나 무승부를 거둔 다른 경기에서 한 번만 승리했어도 승점 동률에 맞대결 전적에서 밀려 소시에다드에 우승을 내줬을 것이다. 양 팀이 리그 레이스를 펼친 과정도 흥미로웠는데, 레알은 다른 팀들보다 약 20골 가량을 더 넣으며 화끈한 공격 축구를 구사했고, 소시에다드는 반대로 리그 최저 실점으로 리그 단 1패만을 기록했다. 소시에다드에게는 리그에서 무려 14무를 기록했는데, 레알보다 득점력이 떨어졌고 단 1번을 더 이기지 못한 것이 우승 트로피의 향방을 갈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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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도적인 공격력으로 바탕으로 스페인을 제패한 1979-80 시즌 레알 마드리드 선수단
한편 유러피언 컵 8강에서는 스코티시 프리미어십 챔피언 셀틱 FC를 만났다. 그리고 이 대진에 대해 커닝엄은 셀틱과 만나는 대진에 매우 만족하다고 말했고, 보슈코브 감독은 커닝엄의 말에 동의하며 자신들이 셀틱보다 우위에 있다며 자만하는 듯한 인터뷰를 했다. 그러자 셀틱의 빌리 맥닐 감독은 "실점하지 않고 이기는 것이 중요하다. 이 경기는 우리가 얼마나 좋은 팀인지 알아볼 기회를 준다." 라고 말하며 오히려 자신감을 드러냈다. 이후 치러진 1차전, 레알은 전반전에 경기를 지배하며 자신들의 발언이 맞다는 듯 셀틱의 수비를 공략했고 이때 이를 본 가디언지의 패트릭 바클레이는 "셀틱이 유럽 축구를 지배하던 시절의 레알이 연상되는 공격력을 가진 팀에게 압도당하고 있다"라고 언급했다.

하지만 셀틱은 피터 래치포드의 선방에 힘입어 레알의 공격을 막았고 후반에 경기의 양상은 완전히 바꼈다. 레알의 공격을 모두 막아낸 래치포드와 달리 레알의 키퍼 가르시아 레몬은 셀틱의 슈팅을 막지 못했고 52분 조지 매클러스키에게 선제골을 헌납해 끌려갔다. 이후 매클러스키가 다시 한 번 골망을 흔들었으나 오프사이드로 취소되었다. 그리고 75분, 레알의 공을 끊은 스네든이 올린 크로스를 존 도일이 헤더로 연결하면서 추가골을 만들어냈다. 결국 레알은 전반전 경기를 주도했음에도 득점하지 못했고 원정에서 0-2로 패배하고 말았다.
셀틱은 그들의 광범위한 유럽 역사 중에서도 가장 놀라운 결과 중 하나를 달성했다.
패트릭 바클레이[2]
바클레이의 말대로 셀틱의 승리는 모두의 예상을 벗어난 결과였다. 그만큼 당시 레알은 매우 강력한 팀이었고 다음 라운드 진출을 거의 확정지은 듯한 분위기였으나 1차전 패배로 레알은 상황이 완전히 달라져 2차전 기적을 바래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레알의 전력은 죽지 않았기에 비록 셀틱이 1차전에서 두 점 차의 승리를 기록했으나 바클레이는 레알의 4강행을 점쳤다.

1980년 3월 19일, 에스타디오 산티아고 베르나베우에서 레알은 11만 명에 달하는 팬들의 지지 속에서 경기를 펼치며 셀틱을 거세게 몰아붙였다. 한편 셀틱은 초반 30분이 제일 중요하다는 것을 인지하고 레알의 공격을 처절하게 막기 시작했다. 특히 래치포드 키퍼는 후아니토비센테 델 보스케의 슈팅을 막아내며 셀틱의 플랜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셀틱의 수비는 전반에 잘 먹혀들었으나 전반 막판인 45분 산티야나가 골망을 가르고 선제골을 넣자 셀틱은 레알에게 완전히 흐름을 내주었다.

후반전, 델 보스케와 커닝엄이 살아나면서 중원과 측면을 장악해나갔다. 56분 커닝엄의 크로스를 산티아냐가 헤딩으로 울리 슈틸리케에게 연결했고 이를 받은 슈틸리케가 골을 넣으며 기어이 레알이 동점을 만들어냈다. 순식간에 동점이 되자 셀틱도 공격을 시도했는데 셀틱이 득점한다면 레알이 1골을 더 넣는다고 해도 원정 다득점 원칙에 의거해 승리하는 상황이었기에 양 팀 다 1골이 매우 절실했다. 그리고 정규 시간 종료를 단 4분 남겨둔 86분, 후아니토가 래치포드 키퍼의 키를 넘기며 헤더로 득점했고 3-0으로 경기가 종료되면서 레알이 합산 스코어 3-2로 역전에 성공해내 기적을 써내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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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부르크 SV의 주장 펠릭스 마가트레알 마드리드 CF의 주장 피리
극적으로 4강에 진출한 레알은 홈인 베르나베우에서 열리는 유러피언 컵 결승에 진출해 1965-66 시즌 이후 14년 만에 유럽 정상에 오르겠다는 각오로 경기에 임했고 레알의 앞을 막은 상대는 함부르크 SV였다. 그리고 1차전 홈에서 레알은 산티야나가 67분과 80분에 득점하며 2-0 승리를 거뒀고, 14년 만의 결승 진출에 한 발자국 더 다가가게 되었다. 이제 레알은 단 1경기만 잘 치르면 되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1980년 4월 23일에 대망의 4강 2차전이 치러졌다. 레알은 1차전 함부르크를 제압한 것이 무색하게도 원정에서 너무 손쉽게 무너져내렸다. 10분 만에 PK를 헌납해 선제골을 내주더니 17분에 다시 실점해 순식간에 합산 스코어가 동점이 되었다. 그나마 실점 이후 커닝엄이 만회골을 넣으며 다시 우위를 점하는 듯 했으나, 40분과 45분에 다시 연달아 실점하며 전반에만 1-4로 끌려가게 되었다. 설상가상 84분 비센테 델 보스케가 퇴장당하며 레알은 완전히 의욕을 잃었고, 90분 쐐기골까지 먹히며 원정에서 1-5로 대패했다. 홈에서 승리했지만 원정에서 큰 벽에 가로막혔고 합산 스코어 3-5로 4강에서 탈락하고 말았다.

남은 대회인 코파에서는 16강에서 로그로녜스를 합산 5-2로 꺾었고, 8강에서 레알 베티스 발롬피에를 만나 1차전 홈에서 선제골을 내줬으나 폴리 린콘의 멀티골이 터지며 2-1 역전승을 거뒀다. 그리고 원정에서 산티야나의 골로 1-1 무승부를 거뒀고 합산 3-2로 4강에 진출했다. 4강 상대는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였다. 1차전 원정에서 패배하지 않고 무승부를 거두며 유리한 홈에서 승부를 낼 수 있게 되었는데, 19분에 선제골을 넣어놓고도 86분에 실점하며 홈에서도 무승부를 거뒀다. 연장에도 양 팀이 무득점을 하자 경기의 향방은 승부차기로 흐르게 되었다. 레알은 2번 키커 커닝엄이 실축했지만 아틀레티코가 2, 3번째에서 실축하면서 4-3으로 승리했고, 지난 시즌에 이어 다시 코파 델 레이 결승에 오르게 되었다.

대망의 결승 상대는 뜬금없게도 레알 마드리드 카스티야 CF였다. 지금은 불가능한 얘기지만, 1990-91 시즌 이전에는 1군 이하 리저브 클럽들도 코파 델 레이에 진출할 수 있었다. 하지만 1군 클럽들과는 수준 차이가 극명하기에 상위 토너먼트에는 거의 올라오지 못했는데, 카스티야는 계속해서 이변을 써내려가더니 기어코 결승에 올랐다. 그렇다고 카스티야의 대진운이 좋지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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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80 코파 델 레이 결승 대진
카스티야는 3라운드에서 2부 리그의 라싱 산탄데르를 3-1로 꺾었고, 4라운드에서는 1부 리그 에르쿨레스 CF를 연장 접전 끝에 5-4로 꺾었다. 이어 16강에서 해당 시즌 라리가 7위를 기록한 아틀레틱 클루브를 원정에서 1-2로 꺾어 8강에 진출했다. 8강에서는 해당 시즌 막강한 모습을 보여주고 당시 리그 1위 팀이자 홈에서 레알 1군을 4-0으로 꺾었던 레알 소시에다드였다. 이번만큼은 소시에다드에게 탈락할 것이 유력했고 원정에서 1-2로 패배하며 현실이 되는 듯 했으나 홈에서 소시에다드를 2-0으로 꺾는 이변이 일어났고 합산 3-2로 카스티야가 4강에 진출했다. 4강에서는 해당 시즌 리그 3위 스포르팅 히혼과 맞붙었다. 카스티야는 히혼 원정에서 0-2로 패배해 위기를 맞았으나 2차전 홈에서 4-1 대승을 거두며 합산 4-3으로 결승에 진출하는 대이변을 만들어냈다. 이는 코파 델 레이 121년 역사상 리저브 팀이 결승에 진출한 유일한 사례이며, 1군이 해당 시즌 리그에서 한 번도 이기지 못한 팀을 2군이 꺾는 진풍경이 나오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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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우승을 자축하는 1군 선수단과 카스티야 선수단
결승전은 사실상 레알의 잔치 분위기였고 사실상 1군의 우승이 확정되는 듯 했으나 혹시 모를 참사에 대비하기 위해 보슈코브 감독은 후아니토, 산티야나, 델 보스케, 커닝엄, 슈틸리케 등 주전들을 대거 출격시켜 확실한 우승을 노렸다. 그리고 주전들을 대거 출전시킨 결과 카스티야를 6-1로 대파하며 14번째 코파 델 레이 우승을 차지했다. 그렇게 보슈코브 감독의 첫 시즌은 라리가와 코파 델 레이 우승, 도메스틱 더블로 매우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다. 그리고 이 시즌을 끝으로 레알 역사상 가장 위대한 미드필더 중 한 명으로 오늘날 손꼽히는 피리가 은퇴해 팀을 떠나게 되었다.

3.2. 1980-81 시즌


여전히 재정 문제가 레알과 데 카를로스 회장의 발목을 잡았다. 회장직에 타격을 입힐 정도였고, 레알이 활발한 이적을 펼치기 힘들게 만들었다. 결국 이 시즌에도 국내 자원들만을 데려와 스쿼드를 보강하게 되었고 부상으로 고생하는 로리 커닝엄을 대체하기 위해 리카르도 갈레고를 영입했고, 라파엘 가르시아 코르테스를 임대 복귀시켰다. 그리고 카스티야에서 골키퍼 아구스틴 로드리게스와 공격수 피네다 가르시아를 콜업했다.

라리가 4연패를 노리는 레알은 1라운드 AD 알메리아전 승리와 2라운드 엘 비에호 클라시코 7-1 대승으로 기분 좋게 리그를 시작했으나 경기력에 기복이 생기며 초반 우승 경쟁에서 밀려났다. 3라운드부터 패-승-패-승-패-승-패-승을 반복했고, 3위부터 9위까지 순위가 롤러코스터처럼 왔다갔다했다. 그리고 11월 30일 엘 클라시코마저 1-2로 패배했고 12월 21일 데르비 마드릴레뇨에서도 패배하며 1980년 전반기를 17전 8승 3무 6패, 6위로 마무리했다. 한편, 유러피언 컵에서는 1라운드서 리메릭 FC를 만나 원정, 홈에서 모두 승리하며 2라운드에 진출했다. 2라운드에서는 부다페스트 혼베드 FC를 만났고 1라운드처럼 홈과 원정에서 모두 승리하며 합계 3-0으로 승리하며 가볍게 8강에 진출했다.

겨울 이적시장에서 레알은 당대 최고의 풀백 중 한 명인 레오베지우두 주니오르에게 영입 제안을 보냈으나 거절당했다. 그리고 시작된 후반기의 성적은 전반기보다 나았다. 비록 1월 첫 2경기에서 패배하고 그 중 스포르팅 히혼전에서는 0-4 대패를 당했지만, 이후 11경기에서 10승 1패를 하며 계속 순위를 끌어올렸다. 중간에 한 번 패배했지만 레알은 막판 7연승을 기록하며 리그 우승에 다시 참여했고 지난 시즌처럼 레알 소시에다드와 우승 경쟁을 펼쳤다. 그리고 32라운드에 2위 자리를 탈환한 레알은 34라운드 최종전에서도 승리하며 승점 45점으로 소시에다드와 승점 동률을 이뤘다.
순위 경기 득점 실점 득실차 승점 진출 or 강등
1 레알 소시에다드 (C) 34 19 7 8 52 29 +23 45 유러피언 컵 1라운드 진출
2 레알 마드리드 34 20 5 9 66 37 +29 45 UEFA 컵 1라운드 진출
그런데 전술한 중간의 딱 한 번의 패배가 문제였다. 하필 그 경기가 소시에다드 원정 경기였고, 그 경기에서 1-3으로 패배했다. 비록 홈에서는 승리했으나 1-0이었고, 맞대결 전적에서 1승 1패 2득 3실로 밀리며 통한의 준우승을 차지했다. 레알이 득실차도 우위였기에 만약 레알이 단 1골을 더 넣어 동률을 이뤘다면 레알이 우승을 차지했을 것이기에 더욱 아쉬운 리그 레이스였다.

리그에서 준우승을 거둔 레알은 남은 두 대회에 집중했다. 유러피언 컵에서는 8강에 올라있었고, 코파 델 레이는 4월~5월에 펼쳐진 16강에서 RC 레크레아티보 데 우엘바를 꺾어 역시 8강에 오른 상태였다. 먼저 유러피언 컵이 치러졌다. 8강에서 FC 스파르타크 모스크바를 만나 원정에서 무승부를 기록했으나 홈에서 이시드로 디아스의 후반 멀티골에 힘입어 합산 2-0으로 승리해 2시즌 연속 4강에 진출했다. 4강에서는 지난 1963-64 시즌 레알을 결승에서 떨어뜨렸던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였다. 그리고 레알은 1차전에서 산티야나후아니토의 골로 2-0 승리를 거뒀다. 그리고 밀라노 원정에서 선제 실점했으나 1골로 막아내면서 합산 2-1 승리를 거뒀고, 1965-66 시즌 이후 15년 만에 유러피언 컵 결승에 오르게 되었다.

대망의 유러피언 컵 결승 상대는 명장 밥 페이즐리 감독이 이끄는 '붉은 제국' 리버풀 FC였으며 결승전 전에 아디다스와 계약을 체결해 클럽 역사상 처음으로 브랜드 로고를 입힌 유니폼을 착용하게 되었다. 결승 시작 전, 양 팀은 모두 부상 문제로 신음을 앓고 있었다. 케니 달글리시가 부상으로 몇 주 간 훈련을 하지 못했고, 앨런 케네디는 손목 골절로 6주간 결장했다. 레알도 주전 공격수 로리 커닝엄이 11월부터 결장하는 악재가 있었다. 경기 초반에는 리버풀이 주도권을 잡았고 11분 앨런 케네디가 슈팅을 날렸지만 아구스틴 키퍼에게 막혔다. 이후 리버풀은 여러 차례 기회를 만들었으나 득점에 실패했고 레알이 점점 경기 영향력을 넓혀갔다. 양 팀의 전술은 서로를 제어하고 있었다. 레알은 경기 속도를 어떨 때는 느리게, 어떨 때는 빠르게 진행하는 전술을 펼쳤고 리버풀은 신중하게 점유율을 확보하고 측면을 공략했다. 그리고 레알은 리버풀의 핵심 선수들을 맨투맨으로 마크했고, 리버풀은 공을 가진 레알의 선수를 가장 가까운 선수가 수비했다.
파일:Liv-vs-RM-1981.jpg
리버풀의 3번 앨런 케네디에게 실점한 레알
그리고 후반, 드디어 득점이 터졌다. 81분, 레이 케네디의 스로인을 받은 엘런 케네디가 왼쪽 하프 스페이스를 돌파했다. 그리고 이를 막아내려던 라파엘 가르시아 코르테스가 헛발질을 하면서 공을 걷어내지 못하고 케네디에게 돌파를 허용했다. 곧바로 키퍼와 왼쪽 측면에서 일대일 기회를 맞은 케네디가 반대편으로 공을 차넣으며 선제골을 기록했다. 수비 실책으로 실점한 레알은 만회하고자 노력했으나 리버풀의 수비는 뚫리지 않았고 결국 경기가 종료되면서 15년 만의 결승은 준우승으로 마무리되었다.

남은 것은 코파 델 레이 하나였다. 결승 이전 5월 20일에 치러진 1차전 원정에서 무승부를 거두며 레알은 유리한 고지를 점했는데, 결승에 이어 치러진 8강 2차전에도 패배했다. 전반과 후반에 각각 1골씩 넣었으나 아벨 루이스에게 30분, 67분, 71분에 연달아 실점하며 해트트릭을 내준 것이 빌미가 되어 8강에서 코파 여정을 마무리했고, 결국 보슈코브 감독의 두번째 시즌은 무관으로 마무리되었으며 1976-77 시즌 이후 4시즌 만에 무관 시즌으로 남게 되었다.

3.3. 1981-82 시즌[3]


시즌 시작 전인 1981년 9월 6일, 회장 선거가 진행되었고 루이스 데 카를로스 회장은 재선 출마를 선언했다. 그리고 이 시즌에도 재정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 이적 시장에서의 영입과 방출이 단 3건이었고 그마저도 주전급 선수들이 아니었다.

그리고 이적 시장에서 제대로 된 보강을 하지 못한 레알은 시즌 초반 흔들렸다. 11월 안정을 찾기 전까지 개막전 레알 소시에다드전 1-3 패배를 포함해 7전 3승 2무 2패로 7위를 기록했고, 극초반에는 10위대 초반까지 내려갔다. 그나마 8라운드 이후 다음해 1월까지 12승 1무 2패를 거두며 전반기는 2위를 마무리했고, 20라운드에는 1위를 탈환했다. 하지만 리그 우승 경쟁 상대인 바르셀로나와 소시에다드에게 패배하면서 향후 리그 우승 경쟁에 악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UEFA 컵에서는 1라운드에서 원정 다득점 원칙으로 아슬아슬하게 올라온 이후 2라운드에서도 FC 카를 차이스 예나를 상대로 3-2 꾸역승을 거두며 16강에 올랐다. 16강에서는 SK 라피트 빈을 만났는데, 빈을 상대로도 1-0 아슬아슬한 경기를 펼치며 8강에 올랐다.

1982년 1월, 레알은 소시에다드전 무승부 이후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원정 3-2 승, 세비야 FC전 1-0 승, 에르쿨레스 CF 원정 1-0 승, 레알 사라고사전 3-0 대승을 거두며 선전했으나 2월부터 완전히 침체기에 접어들었다. 2월 7일 발렌시아 CF전 1-2 패배를 시작으로 리그 6경기 무패를 기록했고, 모든 대회를 통틀어 2월과 3월에 4번밖에 이기지 못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1982년 3월 10일 코파 델 레이 4강 1차전 소시에다드 원정 경기에서 0-1로 패하고, UEFA 컵 8강에서 1. FC 카이저슬라우테른에게 홈에서 3-1로 이겨놓고도 원정에서 0-5 대패를 당하며 탈락한 것이 계기가 되어 결국 3월 28일 UD 라스팔마스전 패배 이후 보슈코브 감독은 사직서를 제출했다. 30분 간의 이사회 긴급 회의에서 보슈코브 감독의 사직서를 수리하기로 결정했고 결국 그는 팀을 떠나게 되었다.

그리고 남은 시즌은 보슈코브 이전 감독이던 루이스 몰로니가 다시 소방수로 부임해 남은 시즌을 치르게 되었다.

4. 득점 순위

순위 이름 레알 소속 기간 경기 수 득점 경기당
득점
국적
1 산티야나 1971 ~ 1988 111 54 0.49 파일:스페인 국기.svg
2 후아니토 1977 ~ 1987 123 49 0.40 파일:스페인 국기.svg
3 프란시스코 가르시아 에르난데스 1978 ~ 1983 90 25 0.28 파일:스페인 국기.svg
4 울리 슈틸리케 1977 ~ 1985 120 20 0.17 파일:독일 국기.svg
5 로리 커닝엄 1979 ~ 1984 61 19 0.31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6 프란시스코 피네다 1980 ~ 1985 53 12 0.23 파일:스페인 국기.svg
7 리카르도 가예고 1980 ~ 1989 73 8 0.11 파일:스페인 국기.svg
이시드로 디아스 1977 ~ 1985 86 0.09 파일:스페인 국기.svg

5. 시즌별 성적

5.1. 대회 성적

시즌 라리가 유럽 대항전 코파 델 레이 인터컨티넨탈컵
1979-80 파일:laLiga_trophy.png
20
유러피언 컵
4강
파일:Copa_del_Rey_Trophy.png
14
×
1980-81 2위
( 1)
유러피언컵
준우승
8강 ×
1981-82[6] 3위[7] UEFA컵
8강
4강[8] ×

5.2. 승패 기록

시즌 경기 수 득점 실점
1979-80 49 31 12 6 96 48
1980-81 47 27 8 12 88 47
1981-82 43 22 11 10 65 41
합계 139 80 31 28 249 136

6. 평가

악화된 재정 상황으로 인해 본인이 원하는 선수를 제대로 영입하지 못했고 카스티야에서 선수를 올려써야 하는 형편이었지만, 보슈코브 자신만의 공격 축구를 선보이면서 첫 시즌 도메스틱 더블에 성공했다. 보슈코브 부임 당시 레알은 산티아고 베르나베우 회장의 사망 이후 회장 선거와 정치 싸움으로 구단 내부가 몹시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는데, 그럼에도 좋은 성적으로 팀이 버틸 수 있게 해준 것은 전적으로 보슈코브 감독의 업적이었다.

대외적으로 루이스 데 카를로스 회장은 보슈코브의 사임 이유를 소시에다드전을 비롯한 성적 악화라고 밝혔지만, 회장 선거를 둘러싼 이해관계로 인한 것이 결정적인 요인이었다. 보슈코브가 사임을 결정하자, 일부 선수들과 그의 지인도 놀라워했다. 그를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을 사람으로 평가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보슈코브는 선수들 사이에서도 인망이 높았는데, 호세 안토니오 카마초는 보슈코브가 선수 생활에 중요한 사람이었고 심각한 부상에서 회복하도록 자신감을 주었으며 훈련 방식이 최고였다고 이야기했다. 또 산티야나는 자신이 겪은 감독 중 최고였다고 극찬하며 시즌을 잘 계획했고 선수들에 대한 확고한 믿음과 낙관주의를 발산한 사람이라고 밝혔다. 비센테 델 보스케는 보슈코브를 높게 평가했으나, 팬들 사이에서는 평판이 좋지 않았다고 아쉬움을 토로하기도 했다.

종합하자면, 부임 첫 시즌 유러피언 컵 4강 및 더블을 이끌며 자신의 능력을 입증했으나 경기 외적인 상황에서 악재가 발생해 마무리를 제대로 짓지 못했다. 그럼에도 레알의 역사에는 성공적인 감독으로 남게 되었고, 어려운 상황에서도 팀이 버틸 수 있게 해준 고마운 감독이었다.
[1] 엄밀히 따지면 대영제국의 식민지였던 아일랜드 출신인 아서 존슨이 있었고 본인 스스로도 자신을 영국인이라고 생각했으나 아일랜드가 이후 독립했기에 완전한 영국 출신을 따지면 커닝엄이 최초이다.[2] 스코틀랜드의 스포츠 작가이자 1980년 당시 더 가디언 소속 기자[3] 보슈코브가 팀을 떠난 3월 29일 기준 성적으로 기재한다.[4] 최종 성적은 3위[5] 최종 성적은 우승[6] 최종 성적이 아닌 보슈코브 사임 당시로 서술한다.[7] 최종 성적은 3위[8] 최종 성적은 우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