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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4-07 16:05:26

라파엘로 태피스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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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카툰과 태피스트리의 제작 과정3. 카툰의 여정4. 카툰

1. 개요

라파엘로 산치오가 바티칸에 남긴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있는 걸작이다. 교황 레오 10세의 의뢰로 시스티나 예배당을 장식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현대에도 특별한 행사가 있을 때에만 태피스트리가 예배당의 남쪽과 북쪽 벽 아래에 걸린다. 모두 10개이며, 라파엘로가 태피스트리를 위해 제작한 밑그림(=cartoon, 카툰)은 7개가 남아 있다.

태피스트리는 미켈란젤로의 천장화와 견주어지는 르네상스 시대의 가장 유명하고 영향력 있는 디자인 중 하나였으며, 판화 형태로 복제되어 르네상스와 바로크 시대의 예술가들에게 잘 알려졌다. "현대 미술의 파르테논 조각"이라고 묘사되기도 한다.[1]

2. 카툰과 태피스트리의 제작 과정

라파엘로의 강력한 라이벌 미켈란젤로율리오 2세가 의뢰한 대작 시스티나 예배당의 천장화를 1512년에 완성하며 일반에 공개했다. 같은 시기에 라파엘로도 라파엘로의 방 작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1513년에 즉위한 레오 10세는 시스티나 예배당에 자신의 흔적을 남기고 싶었다. 예배당에서 남은 유일하게 자유로운 공간은 가장 아래쪽의 벽이었다. 당시 이 벽에는 커튼을 표현한 평범한 프레스코 장식이 그려져 있었다. 레오 10세는 이곳을 교회를 세운 사도 베드로와 바울의 삶을 묘사하는 태피스트리 시리즈로 덮기로 결정한다.

1515년, 라파엘로는 서명의 방(1511년)과 엘리오도로의 방(1514년)의 작업을 막 마무리한 상태였다. 이 작업으로 라파엘로의 명성은 드높아져 로마 최고의 예술가로 추앙받고 있었다. 레오 10세는 시스티나 예배당의 태피스트리도 라파엘로에게 맡기기로 결정하고 의뢰하게 된다. 라파엘로는 1515년 6월, 1516년 12월에 레오 10세로부터 두 번의 보수를 받았고 아마 2번째 지급은 작업 완료 시점이었을 것이다.

라파엘로는 미켈란젤로의 천장화와 자신의 태피스트리가 비교될 것이라는 것을 매우 잘 알았기에 심혈을 기울여 밑그림 작업에 착수한다. 라파엘로는 3가지 도전 과제를 마주한다. 먼저 1480년대에 완성되어 있는 기존에 장식된 다른 그림들과 부합해야 했다. 곧 이전 세대의 스타일에 자신의 디자인을 어울리게 맞춰야 한다. 그리고 종이에 그린 밑그림을 덜 정교한 작업인 태피스트리로 변환되었을 때 의미있는 효과를 낼 수 있는 디자인을 해야한다. 마지막은 직조 과정에서 좌우가 반전된다는 점이다.

라파엘로는 밑그림에 강렬한 구도와 광대한 효과를 넣는데 집중했다. 곧 그림의 세부 묘사나 섬세한 처리보다 그 보여지는 효과에 중점을 잡았다. 이 효과는 특히나 훗날 축소된 판화 버전으로 재현되었을 때 디자인의 효과를 극대화되어 보이는 이유이기도 하다. 카툰은 여러 장의 종이를 붙여서 만든 풀 템페라로 그려졌다. 현재 카툰은 캔버스에 부착되어 전시되고 있으며 남아있는 7점은 상태가 양호한 편이다. 'Cartoon'이라는 단어는 이탈리아어 'cartone'에서 번역된 것이며 본디 '큰 종이'를 의미한다.

카툰은 모두 약 3m 이상의 높이와 3-5m의 너비의 거대한 작품이다. 카툰은 완성된 태피스트리의 거울쌍 이미지이며(=좌우가 바뀜) 태피스트리는 카툰의 뒤쪽에서 작업했다. 라파엘로의 제자들도 카툰의 완성에 기여한 것으로 보이며, 카툰은 매우 정교하게 마무리되었다. 카툰은 태피스트리에서 재현된 것보다 훨씬 다양한 색상과 더 미묘한 그라데이션을 가진다. 카툰을 준비했던 것으로 보이는 작은 스케치도 일부 남아 있다.[2] 모든 주제에 대한 다른 스케치도 있었을 것이나 소실되었고, 최초의 판화는 이 스케치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태피스트리에는 넓고 정교한 테두리가 있는데 카툰에는 생략되어 있다. 테두리 디자인도 라파엘로가 한 것이고 테두리 카툰도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테두리 장식에는 고대 로마의 부조나 조각한 포피리(porphyry)[3] 등이 활용되었다. 이 테두리는 훗날 다른 태피스트리의 제작에 다시 쓰이기도 했다 한다.

제자와 조수들도 밑그림 제작에 참여했기에 어느 정도까지가 라파엘로의 작업인지 논쟁이 있지만, 결과물을 보면 그는 전반적인 구성과 대부분의 실행에 직접 책임지고 조수들의 간헐적인 개입을 감독하고 조화시킨 것이 분명하다. 카툰은 1516년 말에 모두 완성된 것으로 보인다. 카툰은 당시 태피스트리 제작의 최고봉인 브뤼셀에 위치한 피에터 반 엘스트(Pieter van Aelst)의 공방으로 이송된다. 태피스트리가 짜여지기 시작하고 1519년 12월 26일부터 1521년 12월까지 총 10개의 태피스트리가 바티칸에 도착했다. 1519년 12월 26일 성 스테파노 축일에는 7개만 도착해서 전시되었다. 당시 라파엘로가 태피스트리를 예배당에 어떻게 배열했는지는 기록에 남아 있지 않아 알 수 없다. 그리고 라파엘로는 4개월 후인 1520년 4월에 사망했다.

태피스트리는 현재 그리스도의 변용과 함께 바티칸 미술관의 피나코테카에 전시되어 있다.

3. 카툰의 여정

태피스트리는 시스티나 예배당의 특별한 행사에 전시될 목적이었음이 분명하다. 그러면 카툰의 최종 목적지는 어디였는가. 라파엘로가 사망하고 1년 후인 1521년 12월에는 레오 10세도 사망했기에 이들이 의도한 카툰의 목적지는 불명확해졌다. 가능성 중 하나는 외부의 소장가에게 가는 것이다. 1521년에 '사울의 개종' 카툰이 베네치아의 그리마니 추기경의 컬렉션에 들어갈 예정이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게 아니라면 추가 태피스트리의 제작을 막기 위해 다시 바티칸에 돌아왔어야 할 수도 있다.

아마 카툰은 브뤼셀의 공방에 남아있었던 것 같다. 1533년에 프랑스의 프랑수아 1세를 위해 태피스트리 1세트가 제작된다. 1797년까지 프랑스 왕실 컬렉션에 남아 있었으나 프랑스 혁명 이후 금, 은을 추출하기 위해 불태워졌다. 1542년에 영국의 헨리 8세에게도 1세트가 전달되었다. 1649년까지 영국 왕실 컬렉션에 있었으나 당시 왕이 사망한 후 빚을 청산하는 등 왕실의 자금 마련을 위해 다른 2000여 점의 예술품과 함께 매각된다. 그리고 베를린의 카이저 프리드리히 박물관(현재의 보데 박물관)에 인수되었는데 1945년 2차 세계대전 말미에 파괴되었다. 1540년대 말, 1550년대 초에 2세트의 태피스트리가 스페인의 카를 5세 혹은 그의 아들 펠리페 2세와 이탈리아 만토바의 곤차가 추기경에 의해 인수되었다. 이 태피스트리는 테두리가 원작과 다른 모습이다.

카툰은 17세기 초반에 이탈리아의 제노바에서 갑자기 다시 나타났다. 그리고 미래에 영국의 찰스 1세가 되는 찰스 왕자가 카툰을 구입하여 1623년에 영국으로 가지고 왔고, 런던 서부의 모틀레이크에 1619년에 세운 태피스트리 제작소에서 태피스트리를 만든다. 당시 찰스의 컬렉션에 들어올 때부터 카툰은 세로로 길게 스트립들로 잘려 있었다. 아마 브뤼셀에서 쉽게 다루고 보관하기 위해 그렇게 했던 것 같다고 추정된다. 각 스트립은 뒷면에 모두 찰스의 모노그램 스탬프를 찍었다. 이때에도 헨리 8세의 태피스트리는 아직 왕가 컬렉션에 남아 있었고 찰스 1세도 자신만의 태피스트리를 제작하고 싶었다. 모틀레이크의 독일 출신 디자이너 프랜시스 클라인(Francis Cleyn)이 카툰 원본을 복제했고 1626-42년 동안 찰스 1세의 태피스트리가 제작되었다. 이 태피스트리는 훗날 프랑스의 루이 14세에게 인수되어 현재는 프랑스 컬렉션에 남아있다. 귀족들도 세트 제작을 의뢰하기 시작했는데 그 중 3대 데본셔(Devonshire) 백작(1617-84)이 채츠워스 하우스(Chatsworth House)를 위해 의뢰한 세트가 제작되어 현재도 걸려있다. 또한 펨브로크(Pembroke) 백작이 의뢰한 세트도 있는데 이것도 현재까지 남아서 빅토리아&앨버트 박물관(V&A)의 라파엘 코트에 전시되어 있다. 역시 이 태피스트리들도 원작과는 테두리가 다른 모습이다.

1649년 찰스 1세가 처형되고 나서 올리버 크롬웰이 이끄는 공화정 하에서 찰스의 컬렉션은 대중에게 팔려나간다. 다행히 라파엘로의 카툰은 예외가 되어 국가 소유로 남아 있었다. 1660년 공화정이 종식되고 군주제가 복원되며 카툰은 찰스 2세의 소유로 돌아왔다. 그리고 1689년 윌리엄 3세의 즉위 후 카툰은 공개 전시될 준비를 하게 된다. 1697년에 카툰은 궁전의 창고에서 나와 복사본을 만드는데 쓰인다. 왕의 그림 감정가인 패리 월튼(Parry Walton)과 화가인 헨리 쿡(Henry Cooke)이 기존에 쪼개졌던 카툰의 스트립들을 합쳐서 복원해 냈다. 다음해에 윌리엄 3세는 햄프턴 코트에 카툰을 전시할 갤러리를 만들어 귀족들에게 공개가 시작되었다. 카툰은 보존을 위해 머리 높이 이상에 걸렸고 녹색 실크 커튼을 쳐서 빛으로 인한 손상을 막았다. 그리고 전시실의 습도를 낮추기 위해 불도 계속 켜두었다고 한다. 햄프턴 코트의 갤러리는 아직도 남아 있다.

카툰은 이후 버킹엄, 윈저를 거쳐서 다시 1804년에 햄프턴 코트로 돌아왔다. 1857년에 왕의 그림 감정가였던 리처드 레드그레이브(Richard Redgrave)는 카툰이 종종 부주의하게 다루어졌다고 비판했다.[4] 언론에서도 많은 비판이 가해졌다. 1824년 내셔널 갤러리가 세워지며 카툰도 이곳으로 가야한다는 의견과 다른 대안이 대립하다가 흐지부지 되었다. 1851년에 치뤄진 대박람회는 사우스 켄싱턴 박물관(훗날의 V&A)의 설립으로 이어졌고, 레드그레이브는 그 담당자 중 한 명이었다. 결국 1865년 빅토리아 여왕과 남편 앨버트 공은 라파엘로 컬렉션에 대한 경의로 다음과 같은 언급과 함께 사우스 켄싱턴 박물관에 카툰을 대여해 준다.
'예술사에서 가장 위대하고 고귀한 천재의 가치 있는 표상(worthy representation of the greatest and noblest genius in the history of a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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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툰은 1950년에 현재 위치인 갤러리 48a 로 옮겨졌고, 현재 이 장소는 라파엘 코트로 알려져 있다. 본디 박물관의 인도 예술 및 건축 컬렉션을 위한 장소였는데 시스티나 예배당과 면적이 거의 비슷하다.[5] 카툰은 본래 있어야 할 장소와 유사한 조건에 걸리면서 단독 작품으로서의 위상을 회복할 수 있었다. 과거 전시 당시에는 위의 사진처럼 카툰이 전시된 뒷벽이 희어서 그림에서 생기가 빠져 보였고, 조명도 좋지 않아 유리에 빛이 반사되며 작품을 감상하는데 최악의 조건이었다. 그래서 카툰의 명성 회복에 지장이 있었는데, 2021년 V&A 가 라파엘 코트를 재단장하며 뒷벽을 잉크 블루색으로 칠하고, 빛의 반사를 해결하면서 그림을 감상하는 걸림돌이 사라졌다.

현재 라파엘로의 카툰 원작은 빅토리아&앨버트 박물관에 대여되어 있으며, 라파엘 코트에 전시되어 있는 것은 실물 크기의 사본이다.

4. 카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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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의 라파엘 코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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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기잡이배의 기적(The Miraculous Draught of Fishes)
'루가 복음 5:1-11'의 내용을 다룬 카툰이다. 너비 399cm * 높이 319cm.
성 루가 복음에 따르면 그리스도는 가난한 어부 시몬(=베드로), 안드레를 그의 첫 번째 사도들로 선택한다. 그들은 갈릴리 바다에서 낚시를 해왔지만 성공적이지 못했다. 그 때 그리스도가 나타나 베드로에게 깊은 물에 그물을 내리라고 한다. 그들은 기적적으로 많은 물고기를 잡아 배가 물고기로 넘쳤다. 다른 배에서는 야고보와 요한이 엄청난 양의 물고기를 끌어올리기 위해 애쓰고, 그들의 아버지 세베대는 배를 안정적으로 유지하려 한다. 베드로는 그리스도를 거룩한 사람으로 인식하고 기도하는 자세로 그 앞에 무릎을 꿇었다. 안드레는 그 기적에 놀라 손을 펼치며 앞으로 나오고 있다. 그리스도는 침착하게 축복의 손짓을 하고 있다. 그림 뒤편의 해안에서는 신자들이 이 기적적인 사건을 바라보고 있다. 이 이야기는 베드로가 '사람을 낚는 어부'로서 다른 사람들을 기독교로 개종시키는 역할을 하게 되었음을 알려준다. 또한 그는 그리스도 앞에서 자신의 죄를 고백하며 겸손함도 보여준다. 초기 기독교 시대부터 교회는 배로 상징되었고, 물고기는 그리스도와 기독교의 경건함의 전통적인 상징이었다. 여기서 물고기는 베드로의 그물에 걸린, 구원받은 영혼들을 상징하며, 이는 그림의 앞에서 학에게 먹히는 버려진 조개들과 대조를 이룬다. 어부 베드로는 그리스도의 첫 번째 사도로 바울과 함께 로마 교회의 창시자 중 한 명이었다. 교황은 지상에 있는 그리스도의 대리자로서 베드로의 후계자로 간주되었는데, 레오 10세는 시스티나 태피스트리에 베드로와 바울의 삶에서 중요한 에피소드를 포함함으로써 교황 승계의 정당성을 강조하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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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쇠 증정(Christ's Charge to Peter)
'마태 복음 16:18-19'과 '요한 복음 21:15-17'의 내용이 섞여 있다. 너비 532cm * 높이 343cm.
서기 5세기부터 여기서 묘사된 두 사건이 때때로 혼합되어 전승되었다. 가이사레아 빌립보에서 그리스도는 그의 제자들에게 연설하며 베드로에게 말한다. '내가 천국의 열쇠를 네게 주리라.' 그리스도는 부활한 후 티베리아스 바다에서 일곱 제자 앞에 나타나 베드로에게 '내 양들을 먹이라'고 명한다. 복음서의 이 두 텍스트는 교황 권위의 가장 중요한 성경적 정당화이다. 이 장면은 그리스도가 베드로를 교회의 반석으로 선택했기 때문에 사도들 중에서도 그가 우위에 있음을 보여준다. 여기서 그리스도는 한 손으로 양 떼를 가리키고, 다른 한 손으로는 무릎을 꿇고 있는 베드로에게 지시한다. 이 구성으로 그리스도에 의해 베드로에게 주어진 교회의 지도력을 상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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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름발이 남자를 치료하는 베드로(The Healing of the Lame Man)
'사도행전 3:1-8'의 내용이다. 너비 536cm * 높이 342cm.
예루살렘 성전에 군중이 모여 있고 그림의 중앙에서 베드로가 불구자를 치유하고, 요한이 지켜보고 있다. 라파엘로 시기의 르네상스에는 이렇게 생긴 고대 기둥들이 예루살렘의 솔로몬 성전에서 왔을 것으로 여겼다. 베드로의 영적 치유와 유대인들의 개종을 상징하는 그림이며 '총독의 개종' 카툰과 함께 보아야 한다. 이는 베드로와 바울의 다른 사명을 보여준다. 베드로의 사명은 유대인을 개종시키는 것이고, 바울의 사명은 이방인을 개종시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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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니아의 죽음(The Death of Ananias)
'사도행전 5:1-5'의 내용이다. 너비 532cm * 높이 342cm.
사도들은 부자들에게 땅과 집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기부하도록 설득했다. 그 중 하나인 아나니아는 그의 재산을 처분한 금액 중 일부를 비밀리에 남겨두었다. 베드로가 그의 탐욕과 기만에 대해 책망하자 아나니아가 그 말을 듣고 쓰러져 죽고, 사람들은 충격을 받는다. 카툰의 왼쪽에서는 사도들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구제를 베풀고 있으나, 오른쪽 끝에서는 아나니아의 아내 삽피라가 녹색 가운을 입고 동전을 세고 있다. 그녀는 남편이 죽는 줄도 모르고 있으며 자신의 부의 일부를 남기기로 결정했다. 몇 시간 안에 그녀 역시 죽었다. 이 에피소드에서 베드로는 유대인들의 불복종에 대해 벌을 내리고 있는데, 이 기적은 르네상스 시기 전반에 걸쳐 심각한 문제였던 교회 자금 횡령에 대한 벌로 해석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림의 의뢰자인 교황 레오 10세 자신도 태피스트리 의뢰를 위해 부적절하게 교회 자금을 전용했다는 혐의를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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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테네에서 설교하는 성 바울(Paul Preaching at Athens)
'사도행전 17:16-34'의 내용이다. 너비 442cm * 높이 343cm.
바울이 아테네의 아레오파고(사법 위원회)에서 의원들에게 설교하고 있다. 바울의 왼쪽 뒤에는 두 인물이 열중해서 설교를 듣고 있는데, 수염 난 남자는 로마의 새로운 그리스 아카데미 책임자 야누스 라스카리스가 모델이고, 통통하고 면도한 남자는 아마도 교황 레오 10세를 모델로 했을 것이다. 레오 10세는 설교에 관심이 있었고, 바울을 '설교의 왕자'로 여겼다. 그래서 라파엘로는 레오 10세가 바울 가까이에서 설교를 듣는 모습을 묘사함으로써 그가 바울의 발자취를 따르고 있음을 보여주었을 것이다. 또한 레오 10세가 로마에 그리스 아카데미를 설립했기 때문에 그 책임자의 초상을 포함시키는 것도 이 장면의 그리스 설정에 적합하고(라스카리스는 그리스 사람이다), 레오 10세가 고전 학문을 장려한 것에 대한 숨은 칭찬일 수도 있다. 카툰의 오른쪽 아래 앞에 있는 남녀는 바울의 웅변에 의해 기독교로 개종하는 모습으로 그려지지만, 인물의 위치나 장면에서 따로 노는 것처럼 보이는데, 아마도 라파엘로의 제자 줄리오 로마노가 추가로 그렸을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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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스트라에서의 희생제의(The Sacrifice at Lystra)
'사도행전 14:8-18'의 내용이다. 너비 532cm * 높이 347cm.
바울과 바르나바(바울 왼쪽에 서 있는 월계관을 쓴 사람)는 현재 터키의 하툰사라이로 알려진 리스트라에서 불구자를 치유했다. 이 기적적인 치유로 인해 리스트라 사람들은 두 사람을 주피터, 메르쿠리우스 신으로 착각하고 그들에게 희생제의를 올리려 한다. 바울은 이 우상 숭배 행위에 분노하여 옷을 찢고 있으며 바르나바는 군중에게 희생을 중지하도록 요청한다. 군중 속 한 젊은이는 바울의 분노와 바르나바의 간청에 응하며 도살자에게 다가가 소를 도살하지 못하도록 막으려 하고 있다. 라파엘로는 배경의 메르쿠리우스 동상과 전경의 제단 등 이교도 모티프로 화면을 채우는데, 이는 리스트라 사람들이 우상 숭배자임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르네상스 시기에 고전적이고 이교적인 아이디어와 이야기는 인기가 많았는데 그것들이 기독교와 적대적이라는 견해와 충돌하고 있었다. 라파엘로는 이 카툰을 디자인할 때 교황 레오 10세에 의해 고대 유물 발굴의 책임자로 임명되기도 했다. 그 과정에서 라파엘로는 과거의 로마와 긴밀하게 접촉할 기회를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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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독의 개종(The Conversion of the Proconsul)
'사도행전 13:6-12'의 내용이다. 너비 446cm * 높이 342cm.
마법사 엘리마스는 바울과 바르나바가 로마의 아시아 총독 세르기우스 파울루스를 기독교로 개종시키는 것을 막으려 했다. 그래서 바울에 의해 방금 실명했고, 그 걸 본 총독은 그리스도를 믿게 된다. 총독이 앉은 받침대 아래에 있는 텍스트는 이야기의 결말을 요약하고 있으며,'아시아의 총독, 루키우스 세르기우스 파울루스는 바울의 설교를 통해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였다.'는 내용이다. 이 장면은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불구자의 치유'와 함께 베드로와 바울의 다른 사명을 보여주고 있다. 라파엘로와 제자들은 종종 카툰의 디자인에 대한 아이디어를 작은 스케치로 작업했는데 이 카툰의 보존된 스케치들은 그가 증인들의 표정과 빛과 그림자의 분포를 실험한 후 오늘날 우리가 보는 구성으로 결정했음을 보여준다고 한다.
[1] 출처: V&A 홈페이지, 영문 위키백과[2] 그 중 '총독의 개종' 스케치는 현재 영국 왕실 컬렉션, 성 바울이 옷을 찢는 모습의 인물 연구 스케치는 말리부의 게티 박물관에 존재한다.[3] 고대 로마 시대에 많이 사용된 자주색 또는 붉은색 계열의 화강암, 황제나 귀족의 조각상, 기둥, 관 등을 만들 때 사용되었고 권위와 고귀함을 상징한다. 고운 입자 속에 더 큰 결정이 박혀 있는 독특한 질감을 가지고 있어서 쉽게 식별할 수 있다.[4] '큰 종이 시트가 카툰에 고정되어 있고, 단단한 연필로 선을 그렸다.'[5] 예배당 548m2, 라파엘 코트 546m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