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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707070><colcolor=#ffffff> 독일연방공화국 제8대 연방의회 의장 라이너 바르첼 Rainer Barzel | |
출생 | 1924년 6월 24일 |
독일국 동프로이센 브라운스베르크[1] | |
사망 | 2006년 8월 26일 (향년 81세) |
독일 바이에른 뮌헨 | |
재임기간 | 제8대 연방의회 의장 |
1983년 3월 29일 ~ 1984년 10월 25일 | |
배우자 | 크림힐트 쾰너 (결혼: 1948, 사별: 1980) 헬가 헨젤더 (결혼: 1983, 사별: 1995) 우트 크레머 (결혼: 1997) |
자녀 | 1명 |
학력 | 쾰른 대학교 (법학 / 박사) |
종교 | 가톨릭 |
소속 정당 | {{{#!wiki style="display: inline; background-color: currentcolor; padding: 2px 4px; border-radius: 3px; font-size: .9em" |
의원 선수 | 8 (하원) |
지역구 | 파더보른-비덴브뤼크 (1957~1980)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비례대표 (1980~198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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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독일의 정치인으로 독일연방공화국의 제8대 연방의회 의장을 지냈다. 하지만 의장으로서의 삶보다는 CDU/CSU의 연방 총리 후보자로 1972년 서독 총선에서 사민당의 빌리 브란트 총리와 맞붙어 패배를 당했던, 그리고 의장 취임 뒤 플릭 스캔들에 연루되어 비참하게 정치 생활을 마무리해야 했던 인물로 더 유명하다.2. 생애
2.1. 기민련의 권력을 쥐다
1969년 총선에서 쿠르트 게오르크 키징어 총리가 이끄는 CDU/CSU가 3석을 잃었지만 원내 1당을 지키며 승리했지만, 빌리 브란트 대표가 이끄는 사민당이 발터 셸 대표가 이끄는 자민당과 전격적으로 소연정을 구성하고 브란트 내각을 출범, 독일연방공화국 출범 후 첫 정권교체에 성공하면서 기민련은 창당 이후 최초로 정권을 잃었다.정권 상실 직후 전당대회를 통해 키징어는 1971년까지 2년간의 유예기간을 부여받았지만 68운동의 영향 및 나치 독일 부역 의심으로 인해 청년 당원들의 극심한 반발을 산 탓에 그 권력을 더 유지할 수 없었다. 결국 1971년 기민련은 창당 이후 최초의 당대표 경선을 치러 후임자를 결정해야 되는 상황이 되었다.
유력한 경쟁자는 독일 역사상 최연소 주지사 당선 기록을 만든 라인란트팔츠 주지사 헬무트 콜이었다. 두 후보의 입장은 한 가지에서 갈렸는데, 바르첼은 다가오는 총선에서 승리하기 위해 총리 후보 - 당대표 - 하원 원내대표 직을 한 명이 독점해 통일된 지휘구조를 갖춰야한다고 주장했지만 콜은 차기 총선을 위한 총리 후보와 당 개혁을 맡을 당대표직을 분리해야된다고 맞받아쳤다.
결국 뒤셀도르프에서 열린 전당대회에서 바르첼이 344표를 얻어 147표를 얻는데 그친 콜을 상대로 압승을 거둬 키징어의 뒤를 잇는 총리 후보 겸 기민련 대표 겸 CDU/CSU 원내대표가 되었다. 청년 조직과 당내 기독교 사회주의 그룹인 CDA는 콜을 지지했지만, 당내 가톨릭 세력은 물론이고 중도 보수 성향 의원들의 지지를 확보한 바르첼을 넘어설 순 없었다.
바르첼의 승리는 당시 기민련의 만연했던 안일한 인식을 보여주는데, 1969년의 사회-자유 연정의 결성을 키징어와 자민당의 갈등으로 인한 일시적인 사고로 보고 기민련이 현재의 방향을 유지해도 금방 정권 탈환이 가능하리라 여기고 있었던 것. 실제로 이 당시 기민련은 이전에는 일종의 정치적 금기로 여겨지던 내각불신임결의[2]를 공공연히 언급하며 브란트 총리를 압박하고 있었다.
실제로 바르첼과 CDU/CSU는 1972년 4월 27일, 동방정책에 반대하는 것을 매개로 에리히 멘데 전 자민당 대표 등 자민당 내 보수파와 손잡고 독일 역사상 최초의 내각불신임투표를 진행했지만 단 2표가 모자라 이를 통과시키는데 실패했다. 동독 비밀경찰 슈타지에 의한 의원 매수와 비밀투표로 인한 다수의 반란표 출현으로 인한 것이었다.
하나 의외인 점이 있다면 이 시기 바르첼 대표가 브란트 내각의 동방정책 관련 입법에 대하여 기민련이 기권표를 행사하도록 지시하면서 의회를 통과할 수 있도록 간접적으로 지원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여러 해석이 있는데, 가장 주류적인 해석은 바르첼이 콘라드 아데나워 총리 시절 전독일부장관을 지내면서 동독에 대한 인도적 지원에 긍정적인 입장을 보였던 점을 끌어와 바르첼 개인은 동방 정책을 소극적으로나마 인정하는 입장이 아니었냐는 것이다.
2.2. 운명의 1972년 총선
비록 불신임 표결에서 실패하긴 했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바르첼은 불신임 표결을 한 자체가 정치적 승리라고 판단하고 있었다. 자민당의 분열[3]로 브란트 내각은 사실상 의회에서 소수 내각으로 전락했다고 판단했고 동독과의 화해 정책에 반대하는 독일 내 보수층, 특히 추방민 연합 등의 도움을 받아 수월하게 정권을 탈환할 것이라 전망했다.한편 브란트 총리는 의회 내 과반 상실로 정책을 추진하기 어려워졌고, 불신임 결의에서 살아남기 위해 기민련 의원들에게 살려준다면 의회 해산을 통해 국민들의 심판을 받겠다고 공언한바 있기 때문에 이를 지키기 위해서 독일연방공화국 역사상 최초의 의회 해산 및 조기 총선을 실시하기로 결정한다.
조기 총선 국면으로 전환되자 승리를 자신하던 바르첼이었지만, 이건 명백한 오판이었다. 가장 큰 문제는 두가지였는데, 바르첼 본인의 낮은 인기와 동방정책에 대한 독일인들의 인식이었다. 같은 당 내에서도 인기가 많다고 보기 어려웠던 바르첼 대표와 달리 브란트 총리는 이미 1971년 노벨 평화상 수상 이후 독일의 전국적인 스타로 떠오른 상황이었고, 일반 대중 사이에서는 독일 변화의 상징으로 초당적인 지지를 받고 있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
동방정책 역시 처음 추진될 때의 논란과는 달리 , 당시 여론조사에서는 서독 국민들 중 70%가 넘게 동방 정책에 대해 긍정적인 의사를 표명했으며 76% 이상은 그 공로가 브란트 총리와 사민당에게 있다고 보고 있었다.
또한 경제 정책 역시 CDU/CSU가 인플레이션 문제를 지적했지만 1972년 총선이 열리는 시점까지는 브란트 내각의 경제 실적이 나쁘지 않았고, 오히려 적정한 수준의 경제 성장과 함께 기존 기민련이 해결하지 못했던 분배 문제에 적극적으로 나서면서 성공적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거기다 11월 19일로 예정된 선거 직전에 동서독 기본 조약이 연방 하원에서 비준되면서 선거의 화제는 완전히 브란트 총리와 동서독 화해 무드에 장악되었다.[4] 여기에 더해 미국 민주당의 영향을 받아 대중집회와 플래카드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며 상당히 세련된 선거운동을 펼치던 사민당에 비해 기민련은 아데나워 - 에르하르트 시절의 구태의연한 조직 중심 선거운동을 펼쳤다.
결국 투·개표 결과, 91.1%라는 역대급 투표율 속에서 브란트 총리가 이끄는 사민당이 230석을 획득해 전후 처음으로 원내 1당 지위를 차지했고, 연정을 구성하고 있는 자민당 역시 11석을 늘리며 선전했다. 반면 바르첼이 이끄는 CDU/CSU는 44.9% 득표율로 225석 획득에 그치면서 전후 처음으로 원내 2당 지위로 내려왔다. 선거 결과로만 놓고 봤을때는 참패라고 보기 어렵지만, 브란트 이전 CDU/CSU 우위의 서독의 기본 정치 지형을 생각해봤을 때는 역사상 유례가 없던 패배를 당했다.
2.3. 패배에서 사임까지
기민련 역사에 남을 패배를 당하면서 바르첼이 총리 후보자 - 당대표 - 원내대표 직을 독점한 것이 오히려 족쇄가 되었다. 선거 패배의 책임이 오롯이 자신의 것이 된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르첼은 곧장 사임하지는 않고 직을 유지했다.바르첼의 사임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건 선거 패배가 아니라 동서독 동시 UN 가입 문제였다. 사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키징어 전 총리를 비롯해 바르첼은 물론이고 콜까지도 모두 찬성하고 있었지만, 정작 CDU/CSU 원내 교섭단체은 이에 대해 매우 부정적이었다. 특히 기사련을 이끌고 있는 프란츠 요제프 슈트라우스가 반대 세력을 규합해 교섭단체 회의에서 찬성 93표, 반대 101표로 이를 부결시켜버렸다.
결국 당내 장악력을 완전히 상실했다고 생각한 바르첼은 1973년 5월 9일, 당대표 및 원내대표직에서 일괄 사임하면서 직에서 물러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