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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문서는 실제로 일어난 사건·사고의 자세한 내용과 설명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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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62년 9월 10일 대한민국에서 일어난 어린이 유괴 사건.2. 전개
2.1. 사라진 조두형 군
1962년 9월 10일 서울특별시 마포구 공덕동 3-53[1]에 살던 4살(1958년생) 조두형 군이 9시쯤 집 밖으로 놀러 나갔다가 행방이 묘연해졌다. 조 군이 사라진 지 사흘이 지난 후 그의 가족 앞으로 1통의 편지가 도착했는데[2] 내용은 '돈을 주면 두형이를 돌려보내 주겠다'는 것이었다. 비로소 두형이의 유괴 사실을 알게 된 그의 가족은 경찰에 신고했다.2.2. 거국적인 수사
금품을 노린 어린이 유괴라는 이 전대미문의 사건은 크게 주목받았고 거국적인 수사가 진행되었다.[3] 경찰, 검찰은 물론이고 당시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도 대국민 담화를 발표했을 정도였으며, 내무부, 체신부, 문교부, 한국전력, 각종 언론 매체는 물론이고 여성단체들까지 조 군을 찾기 위해 애썼지만 이러한 수사에도 조 군을 찾지 못하였으며 그의 행방조차 알 수 없었다. 경찰은 '자수한다면 관대한 처분을 내리겠다'며 선처를 약속하였지만 소용이 없었다.1963년 5월에는 아시아레코드사 최치수 사장이 '두형이를 찾는 데에 도움을 주자'며 반야월 작사, 라음파 작곡, 가수 이미자가 부른 《두형이를 돌려줘요》라는 노래를 만들었다. 이미자의 슬픈 음색은 부모의 심정을 담은 흐느끼는 대사와 함께 듣는 이들의 가슴과 눈물샘을 자극했다.기사
이런 가운데 마포경찰서 앞으로 마산에서 보내진 것으로 보이는 괴편지가 도착하는가 하면 대구에서 조 군과 비슷한 사람을 목격했다는 제보도 들어와 경찰이 출동했지만 허탕만 쳤다.
2.3. 범인의 편지
첫 번째는 9월 13일 "10만 원을 삼각지로 가져오라"는 내용이었다. 6번째는 9월 15일 돈을 보자기에 싸서 성북구 장위동 철로변의 91호 전신주 밑에 묻으라는 내용이었다. 8번째 편지는 20만 원을 요구하며 "내가 보낸 사람에게 20만 원을 주면 조 군을 10분 후에 돌려주겠다"는 내용이었다.[4]그러나 범인은 20만 원의 몸값만 챙긴 후 조 군을 돌려주지 않고 그대로 달아나고 말았다. 이 기사에는 가짜 돈이라는 말이 있다.
3. 사건 이후 조두형 군의 행방
[age(1962-09-10)]년이 지난 지금도 알 수 없다. 범인의 도주 직후 사력을 다해 범인을 쫓았지만 결국 잡지 못하고 1977년 공소시효 만료로 영구미제로 남게 되었으며 더 이상 조두형 군의 생사여부도 알 수 없게 되었다. 안타깝게도 아마 영원히 생사불명 미제사건으로 남을 것이고 범인도 잡을 수 없을 듯하다. 시간이 시간이다 보니 범인은 이미 고령으로 인해 사망했을 가능성이 높다. 납치범의 나이가 당시 10대라고 해도 [age(1962-09-10)]년이 지난 지금은 최소 70대 중후반 이상이기 때문이다.29년 후인 1991년에 일어난 비슷한 사건인 이형호 유괴 살인 사건처럼 적지 않은 경우 유괴범이 돈을 받아도 아이를 살해한다는 점을 감안하면 범인은 돈을 요구하기 이전에 처음부터이든 돈을 받은 뒤 후환을 방지하기 위해서이든 조두형 군을 죽이고 시신을 어떻게든 처리했을 가능성이 크다. 돈을 받은 뒤 이용가치가 떨어진 애를 계속 데리고 있었을 리는 없고 어딘가에 버려 목숨만은 살려주었을 가능성도 낮다. 더구나 전국적으로 유명해진 사건임에도 조두형 군을 보았다는 목격자도 없으니 더욱 그렇다. 게다가 만약 위에 인용된 기사대로 실제로 가짜 돈이었고 이를 범인이 눈치챘다면 조두형 군에게 무슨 짓을 했을지 알 수 없다. 만약 범인이 돈에 미련이 많은 자라면 조두형 군을 인신매매 등으로 팔아넘겼을지도 모른다. 단 앞서 말했듯 목격자가 없으니 앵벌이는 가능성이 없다고 봐야 한다.
2014년 9월에는 자신이 조두형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자신의 친척을 찾는다며 광고를 냈다. 2014년 10월 10일 《궁금한 이야기 Y》에서 밝히길 정작 DNA 검사 결과 조두형 군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으며 자기 진짜 가족을 부정하고 자신이 조두형이라고 확신하는 망상 증상이 있는 것으로 소개되었다. 그의 형은 "어린 시절 부모님과 따로 떨어져서 살았다. 나도 부모에 대한 기억이 없는데 동생은 오죽하겠나 싶어서 늘 안쓰럽게 생각해 왔었다"며 "IMF 때 해고당하고 처가살이를 하고, 그러면서 '언젠가는 내가 탈출해야겠다'라는 생각에 자신이 조두형이라고 주장하게 된 것 같다"고 증언했다.기사 1, 기사 2, 정리
[1] 현 만리재로16길 2[2] 조 군은 마포에서 굉장히 부유했던 사업가 조 씨 집안의 2대 독자였다.[3] 당시에는 6.25 전쟁의 영향으로 1950~60년대까지 어린아이를 버리는 일은 잦았지만 그 시절조차도 유괴는 흔하지 않았다. 부모가 있는 아이는 길에서 업어오거나 버려진 아이를 데려가서 키우는 경우도 있었지만 금품을 노리고 계획적으로 유괴하는 일은 드물었다.[4] 당시 20만 원이면 현재 물가로 따지면 엄청난 수준의 금액이다. 남아 있는 기록에 의하면 1963년 9월 15일에 삼양라면(100g)이 처음 나왔는데 그 가격은 10원이었으며, 당시에 제법 고가였다. 짜장면 15원 정도, 커피 한 잔에 35원, 김치찌개백반은 30원 정도였다. 네이버 지식인에 올라온 질문의 답변에 따르면 1962년 당시의 화폐가치는 2021년 기준 430.3배 가량 차이가 난다고 하며, 따라서 당시의 20만원은 2021년 기준으로 무려 8,606만원 가량의 거금이 된다. 물론 지식인 답변인만큼 공식적인 정보는 아니지만 해당 답변자는 구체적인 GDP 수치 및 당시 신문기사를 근거로 들고 있고 당시의 물가와 비교해봐도 꽤 비슷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