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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21 16:35:23

이발(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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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94153e><colcolor=#ffc700> 이발
李潑
성명 이발(李潑)
경함(景涵)
동암(東菴)
본관 광산
출생 1544년(중종 39년)
조선 전라도 함평군
사망 1589년(선조 22년) 12월 1일
조선 한성부
국적 파일:조선 어기.svg 조선

1. 개요2. 생애3.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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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 중기의 문신. 이조전랑, 부제학, 대사간 등을 역임했다. 기축옥사멸문지화를 당한 사람이다. 호는 동암.

2. 생애

호남의 명문가 광산 이씨 집안 출신[1]으로 전라남도 나주시 남평읍에서 출생해 최영경 등과 친한 사이였다고 한다. 1568년 과거에 급제해 관직 생활을 시작했고 부제학 등 여러 관직을 거쳐 1584년 대사간 자리에 올랐다. 그러나 동서 분당 사태가 일어난 때 이조전랑[2]에 기용되어 자신과 친분이 있는 사람들을 다수 기용하여 자연스럽게 동인의 지도자가 되었다. 동인이었지만 후일에 서인의 거두로 추증되는 이이를 무척이나 존경하여 이이와의 사이가 각별했다. 이이는 이발과 정철을 불러 손을 맞잡게 하고 화해를 주선하기도 했다.

하지만 동서 분당의 감정의 골은 두 사람의 표면적 화해 정도로 끝날 수준이 아니었고 동인 중에서도 최고 강경파인 정인홍이 이발, 이이[3][4]와 함께 심의겸을 탄핵하는 과정에서 "이게 다 서인 놈들이 소인배라 그렇다"라는 말을 멋대로 하는 바람에 선조가 분노하고 이이도 분격하는 사태가 벌어져 이에 책임을 지고 이이, 정철, 정인홍 등이 모조리 사직해버리는 사태가 벌어졌다.[5][6] 본인 역시 동인 중에서도 강경파인 인물이라[7] 심의겸 뿐 아니라 박순, 송익필, 이항복을 탄핵했고 이는 자신의 수명을 단축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1589년 정여립의 난이 일어난 이후 양천회가 상소하여 이발, 이길, 김우옹, 백유양, 정언신, 최영경 등을 정여립과 절친한 조신으로 고발하면서 연루된다. 양천회는 이발 형제가 남도를 왕래하며 정여립과 공모하였으며, 정여립을 존경하여 그를 천거한 한 세력으로 지목했다. 이어 예조정랑 백유함도 이발, 이길 형제를 정여립의 세력으로 고발하면서 선조가 즉시 종성군으로 귀양을 보낸다.

그러다가 정즙, 선홍복을 심문하는 과정에서 이들이 이발, 이길, 백유양, 유덕수 등이 한패였다고 고변하면서 하옥하여 국문을 받게 된다. 이발은 유배지로 끌려가다가 다시 하옥되어 혹독한 고문을 당했는데, 선조수정실록에 따르면 같이 갇혀 있던 이정란에게 "내가 눈이 있으면서 사람을 알지 못하였다. 그대는 죽음을 면하게 될 것이니 모름지기 칼로 내 눈을 뽑아버리라. (...) "내가 조헌의 말을 듣지 아니하여 이 지경에 이르렀음을 후회한다."라고 한탄하였다. 결국 고문을 받다 끔살당했고 그의 형제 이길, 이급도 연이어 죽었는데 정철이 이길은 살려주자고 주장했으나 별 수를 쓰지 못했다. 널리 알려진 일이지만, 선조실록에 따르면 선홍복은 형장에 끌려가 ‘가서(家書)와 버선 안의 글에 이발·이길·백유양 등을 끌어 대면 살려 주겠다 하고 어찌 도리어 죽이려 하느냐?’ 라고 울부짖었고, 선조실록은 이를 대놓고 정철의 소행이라고 지목하고 있다. 하지만 인조 2년에 정여립의 자식들인 정종명, 정홍명 형제는 오히려 정철은 선조의 과한 옥사에 대해서 정철이 어떻게 정여립이 둘이나 있을 수 있겠느냐고 말렸으며 이발의 가족들이 몰살당했을 때 정철은 이미 위관에서 해임된 후였다고 항변했다. 광해군 즉위년에 성혼의 제자 광주 목사 신응구도 정철이 성혼과 의논하여 사대부들을 구하려고 했으나 위관에서 체직된 후라서 그러지 못했다는 내용의 진술을 하였다.

이발, 이길 형제가 죽은 후 82세의 노모 윤씨와 아내, 8살난 아들도 모조리 끌려와 심문받았다. 이발의 80세 노모는 맞아 죽었고 이발의 어린 아들들은 선조의 노여움을 사서 압슬형을 받다가 사망했다. 아무리 봐도 선조는 이발의 가문이 세도정치할 가문이라는 생각으로 착각에 빠지고 있었다. 그 외로도 정언신, 김우옹, 백유양, 정개청, 최영경도 역시 모반 참여 혐의와 왕권에 방해되는 예비 권간으로 지목당하면서 유배를 가거나 죽임을 당했다.

광해군이 즉위한 이후 이발 형제에 대한 신원 요청이 들어왔으나, 광해군은 선조가 한 일을 아들된 입장에서 즉위하자마자 번복할 수 없다고 후일에 처리하겠다고 하였다.[8] 그러다가 인조 2년 5월 29일, 인조는 이발, 이길 일가가 몰살당한 것에 대해서 정철은 죄가 없다고 판정하고 정철의 관작을 복구하였는데, 동시에 이발의 가산이 적몰된 것도 지나친 일임을 인정하고 7월 3일, 이발, 이길, 정개청 등의 직첩을 돌려주면서 완전히 복권하였다.

조정의 결론과는 별개로 정철과 워낙 앙숙지간이었던 탓에 사람들은 정철이 자기 원한을 풀기 위해 이발과 이발의 일가를 처참하게 몰살시켰다고 보았다. 이발의 가족이 모조리 잡혀가기 직전에 이발은 자신의 아들과 종의 아들의 옷을 바꿔 입혀서 아들 하나는 살아남게 했다 한다. 그래서 이발의 가계가 겨우 이어질 수 있었다는 것이다. 오늘날에도 이발의 후손들은 제사를 지낼 때 고기를 다지며 "정철정철정철..."이라고 중얼대는데[9] 정철에 대한 원한이 아직도 가시지 않았다는 것을 짐작케 한다. 하지만 정작 정철은 이발의 죽음에 관여한 바가 없는데 '역모죄는 에 구애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죄없는 가족들까지 수사하여 죽게 만든 것은 선조 본인의 의지였다. 오히려 <선조수정실록>에 따르면 이발의 동생 이길이 연루되어 사형에 처하게 되었을 때 정철이 선조를 찾아가 만류하였으나 선조가 이에 응하지 않았다고 한다.

3. 여담



[1] 특히 이발의 집안은 이발의 8대조부터 이발에 이르기까지 9대가 꾸준히 과거 급제자를 내어 전국에서 알아주던 명문가였다. 참고로 과거 급제자는 200명에 불과했으니 지금으로 치면 고등고시 합격자를 9대 연속 배출했다고 생각하면 된다.[2] 인사(人事)를 책임지는 요직.[3] 동인 세력을 달래기 위해 이이는 심의겸 하나를 탄핵하는걸로 서인과 동인이 화해한다면 그도 어쩔 수 없다고 이발의 설득 이후 심의겸을 탄핵하는 상소를 올린다.[4] 심의겸의 형수는 이발의 딸이었다.[5] 야사에서는 이이의 중재로 둘이 서로 호기롭게 술을 마셨는데 원체 술버릇이 개같았던 정철이 술김에 이발의 얼굴에 침을 뱉어 서로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고 말았다고 한다.[6] 조헌의 문집인 중봉집에서는 반대로 이발이 먼저 정철에게 잘못한 것으로 나온다. 술에 취한 이발이 정철의 수염을 뽑아버리자 이에 화가 난 정철이 이발의 얼굴에 침을 뱉어 버렸다고 한다.[7] 이 때문에 선조 수정실록의 기록에 북인의 일원으로 언급된다 https://sillok.history.go.kr/id/knb_12212001_007[8] 이에 대해 사관은 이발은 역적과 친했으니 그 죄를 면할 수 없으나 죄없는 가족을 죽인 것은 억울한 일이었다고 논평했다.[9] 전라도 사투리 억양과 약간 섞여서 "증철증철증철..."이라 들리기도 한다. 또는 그냥 "철철철철..."이라 중얼대기도 했다고.[10] 다음은 출처 사진들이다. 이발 족보 1이발 족보 2이발 족보 3박이 자서 족보[11] 심지어 조선총독부에서 노인동맹단 체포 뒤, 오직 70살부터는 곧 죽을 나이니까 더 독립운동을 못 할거라는 이유로 전체 단원 중 이승교와 70대 단원까지 두명만 구속을 시키지 않고 기소유예로 풀어주게 하였다. 이후 석방된 이승교가 "왜놈들은 왜 나를 동지들의 배신자로 만드느냐"며 칼로 자살기도를 하다가 주변에서 빨리 막아서 경상으로 끝났다고 알려진다.[12] 강우규 열사 역시 조선총독부 폭탄 투척 사건 후 현장에 있었어도 안 잡혔는데, 그 이유는 66세였기 때문이다. 당시 일본 경찰이 현장의 모든 사람들 중 가능성 있는 젊은 사람들만 조사한다고 해서, 강우규가 66세라고 말하자 일본 경찰이 그냥 풀어줬다. 읭? 잡힌 건 추가수사를 한 나중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