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vil Doll
1. 개요
이탈리아/슬로베니아의 아방가르드 프로그레시브 록/네오클래시컬 다크 웨이브 밴드. 심포닉 록[1], 고딕 록이라고도 하는 등 상당히 복합적인 밴드이며 이외에 클래식이라든가 슬로베니아의 포크송 음악에서도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1987년에 Mr. Doctor라는 수수께끼의 인물에 의해 만들어진 밴드로[2], 원맨 밴드라고도 하지만 악기별로 멤버들이 따로 있고 미스터 닥터는 보컬만 담당하고 있다.[3]
앨범 한 장 한 장이 모두 컨셉트 앨범이며 대부분 한 시간 남짓하는 하나의 트랙으로만 이루어져 있다. 음악 자체가 꼭 한 편의 연극을 보는 듯하며, 미스터 닥터는 홀로 남녀노소의 내레이션을 소화한다.
2. 미스터 닥터에 관하여
데빌 돌의 리더이자 유일하게 부각되는 인물로, 슬로베니아 태생이고 베네치아에 살고 있다는 말만 하고 인터뷰도 대부분 거절하는 등, 철저하게 자기 자신을 비밀에 숨겼다. 단, 의형제를 맺었다고 하는 성시완은 그의 음악적 취향 및 기타 다른 부분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그의 신비주의적 성향을 알기 때문에 그걸 외부에 알릴 일은 없을 것이라고 한다. 다른 사람보다 그를 잘 아니 당연한 것이기는 하다.그러나 2007년에 저서인 "45 Revolutions"를 발간하면서 본명이 마리오 판치에라(Mario Panciera)라는 이름의 이탈리아계 슬로베니아인으로 밝혀졌고[4] 뒤이어 미스터 닥터 본인이 음악잡지 Burrn과 Euro-Rock Press에 데빌 돌 및 자기 자신에 관한 비교적 상세한 2번의 인터뷰를 하였다. 이 인터뷰에서 미스터 닥터는 데빌 돌은 이미 1997년에 활동이 중단되었음을 알렸다.[5]
미스터 닥터의 인터뷰에 따르면 그는 1958년 3월 4일에 태어난 이탈리아계 슬로베니아인으로 슬로베니아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다가 10대 중반 외교관인 아버지를 따라 영국으로 이주, 영국의 대학교에서 범죄심리학 박사과정을 마치고 슬로베니아와 이탈리아 양쪽에 각각 다른 데빌 돌 그룹을 결성, 두 나라를 오가며 활동을 시작하였다. 이때 한국의 음반제작자이자 음악비평가인 성시완이 유럽 여행 중 우연히 데빌 돌의 데뷔앨범을 듣고 미스터 닥터의 음악적 천재성에 큰 감명을 받아 수소문 끝에 미스터 닥터를 직접 만나게 된다.[6] 이후 성시완은 한국으로 돌아와서 직접 시완레코드를 설립, 데빌 돌의 레코드를 외국에 유통, 판매하는 것을 시작으로 점차 영역을 넓혀 외국의 월드 뮤직[7]을 수입, 판매하여 한국의 유일한 프로그레시브 록 전문 레코드사로 성장하게 된다.[8] 안타깝게도 현재 시완레코드 매장은 문을 닫은 상태이고 지금은 주로 인터넷 쇼핑몰을 중심으로 영업 중이다.
Sacrilegium 앨범 시기 부터 미스터 닥터는 두 개의 밴드를 하나로 합쳐서 본격적인 활동을 준비하지만 Sacrilegium이 슬로베니아의 사전 라디오 심의에 걸려 방송 불가 판정을 받음과 동시에 하필 설상가상으로 유고슬라비아 전쟁의 발발로 인해 유고슬라비아에 위치해 있던 스튜디오가 불타면서 당시 제작 중이던 신작의 마스터 테이프가 분실되고[9] 데뷔 앨범부터 모든 데빌 돌의 앨범의 작업에 참여한 프로듀서 유리 토니(Jurij Toni)가 큰 부상을 당하는 사고가 발생한다. 이후 미스터 닥터는 음악활동 자체에 회의를 느끼게 되고 활동을 중단하려다가[10] 팬클럽의 요청으로 마지막으로 Dies Irae를 내놓고 1997년 최종적으로 밴드를 해체하였다. 그 뒤 미스터 닥터는 슬로베니아 예술대학에서 무성영화를 전공했으며[11] 이탈리아에서 법의학자로 일하다가 현재는 베네치아에 거주하면서 주로 음악에 관한 책들을 집필하고 있다고 한다.
미스터 닥터의 인터뷰 원문#과 번역.# 번역은 VOCALOID 프로듀서 상록수가 맡았지만, 현재는 블로그가 폐쇄되어 볼 수 없다.
3. 앨범
3.1. The Mark of the Beast
1988년작. 미스터 닥터 본인이 일종의 '청각적 미술 작품'으로 여겨 단 한 장의 판본만 존재한다. 그러나 공연장에서 공연한 적은 있으며 곡의 일부는 The Girl Who Was... Death에 재활용되었다고 한다.3.2. The Girl Who Was... Death
1989년작. 밴드의 실질적인 데뷔작으로 패트릭 맥구한의 고전 TV 첩보물 《더 프리즈너》에 영감을 받아 제작된 앨범이다. 데뷔 앨범 답게 덜 다듬어져 있는 사운드가 눈에 띈다. 미스터 닥터 본인은 "데빌 돌의 음악 중 가장 록 성향이 짙은 앨범"이라고 평했다. 슬로베니아 쪽 밴드의 멤버로 녹음되었다. 참고로 러닝 타임은 66분 6초.3.3. Eliogabalus
1990년작. 데빌 돌의 음반 중 유일하게 다수의 트랙이 수록되어 있는 앨범이다. 첫번째 트랙 Mr. Doctor의 원제는 The Black Holes of The Mind 였으며 앨범에 수록되기 전에 라이브에서 불려진 유일한 음악이다. 곡의 내용은 자신이 범죄심리학을 전공할 때 접한 사례들에서 따왔다고 한다. 두 번째 트랙 Eliogabalus는 로마의 황제 엘라가발루스에 대한 곡이다. 곡을 완성하고 곧바로 녹음에 착수했기 때문에 거의 라이브로 녹음되었다고 한다. 이탈리아 쪽 밴드의 멤버로 녹음되었다.3.4. Sacrilegium
1992년작. 유고슬라비아 전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시기에 녹음한 앨범이다. 이 시기 미스터 닥터는 밴드를 하나로 합치고 본격적인 활동을 준비하고자 했으나 슬로베니아 당국의 사전검열에서 방송 불가 판정을 받게 되고 설상가상으로 유고슬라비아 전쟁까지 발발하자 큰 실의에 빠진다. 이후 미스터 닥터는 2009년 인터뷰에 응할 때까지 모든 인터뷰를 거절하고 입을 닫아버린다. 여담으로 미스터 닥터 본인이 미학적인 관점에서 가장 높은 점수를 주고픈 앨범이라고 한다.3.5. The Sacrilege of Fatal Arms
1993년작. 데빌 돌이 가끔씩 열었던 라이브에서 상영할 목적으로 만든 동명의 무성영화 사운드 트랙으로 제작되었으며 무성영화의 내용은 유고 내전의 잔혹함에 대한 다큐멘터리로 전체적인 분위기는 칼 테오도르 드레이어의 잔 다르크의 수난과 비슷하다고 한다. 초판은 데빌 돌의 라이브를 보러 온 관객들을 위한 2,000장 한정반으로 제작되었는데 관객이 별로 없어서 2,000장 중 절반 이상을 친분이 있던 성시완이 한국으로 수입해서 판매했다고 한다.이후 미스터 닥터는 유고 내전이 점점 치열해지는 상황에서 신작 The Day of Wrath의 레코딩을 강행하였으나 결국 반군의 습격으로 유고슬라비아에 위치해 있던 스튜디오가 산산조각 나게 된다. 미스터 닥터 본인은 스튜디오를 무사히 빠져 나왔으나 이 사고로 데뷔 앨범부터 모든 데빌 돌의 앨범 작업에 참여한 프로듀서 유리 토니(Jurij Toni)가 큰 부상을 당하게 되고 The Day of Wrath의 마스터 테이프는 분실되어 버려서 미스터 닥터는 우울증에 걸려 모든 음악활동을 접고 은둔하게 된다. 비오 12세에 대한 하베무스 파팜(Habemus Papam)과 같이 아돌프 히틀러를 찬양하는 함성이 샘플로 들어간 것이 특징으로, 이 샘플들은 2013년 발매된 K-POP 태초의 노래, 노래의 종말에도 삽입된다.
3.6. Dies Irae
1996년작. 팬들과 이탈리아 음반 관계자들의 간곡한 요청을 수락하여 마지막으로 제작한 앨범이다. 겨우 건진 The Day of Wrath의 일부 트랙을 중심으로 작곡되었으며 마지막으로 자신의 모든 것을 담을 생각이었는지 최종적으로 완성된 마스터 테이프의 길이가 무려 75분에 달한다. 데빌 돌의 앨범 중에서 유일하게 파트별로 쪼개져 있는 앨범이기 때문에 입문자들에게 추천되는 앨범.[1] 심포닉 메탈과는 다르다.[2] 인터뷰를 보면 알겠지만 미스터 닥터는 범죄심리학 박사과정을 수료했으며 이탈리아에서 법의학자로 일한 경력이 있다.[3] 단, 유일하게 Dies irae에서는 Norina Radovan이라는 이름의 소프라노와 함께 보컬을 담당했다.[4] 이 책은 1976년부터 1979년까지 발매된 영국의 모든 인디 앨범들을 해설과 함께 실은 일종의 백과사전 형식의 책으로 미스터 닥터 본인이 그 앨범들을 전부 소유하고 있다고 한다. 이러한 점에서 미스터 닥터의 완벽주의 성향과 음악에 대한 관심 및 재력을 알 수 있다. 1970년대 중, 후반이 배경인 까닭은 그가 영국에 처음 이민왔을 때가 1970년대 중반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후 1958년 3월 4일 생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이 책 말고도 미스터 닥터는 앨프리드 히치콕의 영화음악을 담당한 것으로 유명한 버나드 허먼의 음악을 정밀하게 분석하는 책 또한 집필했으며 현재는 <Fear of Music - Music of Fear>라는 공포를 조장하거나 불쾌감을 초래하는 1,000개가 넘는 음악들을 분석하는 내용의 책을 집필 중이라고 한다.[5] 정확히는 미스터 닥터 자신은 지금 현재도 곡은 계속 쓰고 레코딩하고 있으나 그것들을 발매하는 일에 대해서는 큰 흥미를 느끼지 않고 있다고 말하였다. 영문위키에도 활동 연도가 1997년으로 종결되어 있다.[6] 1993년, 성시완은 음악 잡지에 '직접 만난 데빌돌'이라는 제목의 칼럼을 기고하여 미스터 닥터와의 첫 만남을 회고했는데 이후 Dies Irae 앨범의 부클릿을 통해 대중들에게 공개된 사진과 다르게 수염을 덥수룩하게 기르고 풍채가 좋은 외모를 지니고 있었으며 말이 많고 유쾌한 성격의 남자였다고 한다.[7] 주로 프로그레시브 록[8] 데빌 돌의 모든 마스터 테이프도 시완레코드 창고에 보관 중이라고 한다.[9] 이때 가까스로 건진 녹음의 일부를 편곡, 재녹음하여 발표한 것이 데빌 돌의 마지막 작품인 Dies Irae이다.[10] 자살까지 시도했다고 한다.[11] 그 대학교에 미스터 닥터가 찍은 영화도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