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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6-08-14 13:08:44

데빌 돌


Devil Doll

1. 개요2. 미스터 닥터에 관하여3. 성시완과의 인연4. 앨범
4.1. The Mark of the Beast (1988년)4.2. The Girl Who Was... Death (1989년)4.3. Eliogabalus (1990년)4.4. Sacrilegium (1992년)4.5. The Sacrilege of Fatal Arms (1993년)4.6. Dies Irae (1996년)

1. 개요

이탈리아/슬로베니아아방가르드 프로그레시브 록/네오클래시컬 다크 웨이브 밴드. 심포닉 록[1], 고딕 록이라고도 하는 등 상당히 복합적인 밴드이며 이외에 클래식이라든가 슬로베니아의 포크송 음악에서도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밴더그래프 제너레이터(와 이 밴드를 이끄는 리더 피터 해밀[2]), 버나드 허먼, 아르놀트 쇤베르크의 영향을 상당히 깊게 받은 밴드이기도 하다.

1987년에 미스터 닥터(Mr. Doctor)라는 수수께끼의 인물에 의해 만들어진 밴드로[3], 원맨 밴드라고도 하지만 악기별로 멤버들이 따로 있고 미스터 닥터는 보컬만 담당하고 있다.[4]

앨범 한 장 한 장이 모두 콘셉트 앨범이며 대부분 한 시간 남짓하는 하나의 트랙으로만 이루어져 있다. 음악 자체가 꼭 한 편의 연극을 보는 듯하며, 미스터 닥터는 홀로 남녀노소의 내레이션을 소화한다.

2. 미스터 닥터에 관하여

파일:MrDoctor.jpg

데빌 돌의 리더이자 유일하게 부각되는 인물로, 슬로베니아 태생이고 베네치아에 살고 있다는 말만 하고 인터뷰도 거절하는 등, 철저하게 자기 자신을 비밀에 숨겼다.

그러나 2007년에 저서인 "45 Revolutions"를 발간하면서 본명이 마리오 판치에라(Mario Panciera)라는 이름의 이탈리아슬로베니아인으로 밝혀졌고[5] 2009년, 미스터 닥터 본인이 음악잡지 Burrn과 Euro-Rock Press에 데빌 돌 및 자기 자신에 관한 비교적 상세한 2번의 인터뷰를 하였다. 이 인터뷰에서 미스터 닥터는 데빌 돌은 이미 1997년에 활동이 중단되었음을 알렸다.[6]

미스터 닥터의 인터뷰에 따르면 그는 1958년 3월 4일에 태어난 이탈리아계 슬로베니아인으로 슬로베니아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다가 10대 중반 외교관인 아버지를 따라 영국으로 이주, 영국의 대학교에서 범죄 심리학 박사과정을 마치고 슬로베니아와 이탈리아 양쪽에 각각 다른 데빌 돌 그룹을 결성, 두 나라를 오가며 활동을 시작하였다.

Sacrilegium 앨범 시기 부터 미스터 닥터는 두 개의 밴드를 하나로 합쳐서 본격적인 활동을 준비하지만 Sacrilegium이 슬로베니아의 사전 라디오 심의에 걸려 방송 불가 판정을 받았다. 그럼에도 미스터 닥터는 좌절하지 않고 신작 The Day of Wrath의 레코딩을 진행한다. 그러나 레코딩 도중에 유고슬라비아 전쟁이 발발하여 유고슬라비아에 위치해 있던 스튜디오가 불타면서 데뷔 앨범부터 모든 데빌 돌의 앨범의 작업에 참여한 프로듀서 유리 토니(Jurij Toni)가 큰 부상을 당하는 사고가 발생한다.[7]

미스터 닥터는 유리 토니가 부상을 입은 이유는 자신이 레코딩을 강행했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극심한 죄책감에 시달렸고 결국, 음악활동 자체를 중단하는 것은 물론 스스로 목숨을 끊는 시도를 하기도 했다. 이후 팬클럽의 간곡한 요청을 수락한 미스터 닥터는 데빌 돌의 마지막 작품으로 Dies Irae를 내놓고 1997년 최종적으로 밴드를 해체한다.

그 뒤 미스터 닥터는 슬로베니아 예술대학에서 무성 영화를 전공하였으며[8] 대학을 졸업한 후로는 이탈리아에서 법의학자로 일하였다고 한다. 지금은 법의학자로서는 은퇴했으며 베네치아에 거주하면서 주로 음악에 관한 책들을 집필하고 있다고 밝혔다.

3. 성시완과의 인연

1989년 라디오 DJ이자 음악비평가인 성시완시완레코드를 설립, 외국의 월드 뮤직(그 중에서도 주로 프로그레시브 록)을 대한민국에 수입, 판매하기 시작했다.

90년대 초반, 성시완은 우연히 데빌 돌의 데뷔 앨범을 듣고 미스터 닥터의 음악적 천재성에 큰 감명을 받아 유럽 여행 중 수소문 끝에 미스터 닥터를 직접 만난다. 이후 두 사람은 의형제를 맺었다는 표현까지 쓸 정도로 절친한 친구가 되었고 성시완은 데빌 돌의 레코드를 외국에 유통, 판매하는 것을 시작으로 시완레코드의 사업 영역을 해외로 확장할 수 있었다.

성시완은 미스터 닥터의 음악적 취향 및 기타 다른 부분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미스터 닥터의 신비주의적 성향을 알기 때문에 그걸 외부에 알릴 일은 없을 것이라고 한다. 또한 데빌 돌의 모든 마스터 테이프도 시완레코드 창고에 보관 중이라고 한다.

단, 1993년, 성시완은 잡지 계간 <아트록>에서 '직접 만난 데빌돌'이라는 제목의 칼럼을 기고하여 미스터 닥터와의 첫 만남을 회고하긴 했다. 성시완의 묘사에 의하면 당시 미스터 닥터는 수염을 덥수룩하게 기르고 풍채가 좋은 외모를 지니고 있었으며 말이 많고 유쾌한 성격의 남자였다고 한다.

4. 앨범

4.1. The Mark of the Beast (1988년)

데빌 돌이 처음으로 녹음한 앨범이지만 미스터 닥터 본인이 일종의 '청각적 미술 작품'으로 여겨 단 1장의 판본만 존재한다. 그러나 공연장에서 공연한 적은 있으며 곡의 일부는 The Girl Who Was... Death에 재활용되었다고 한다.

4.2. The Girl Who Was... Death (1989년)

밴드의 실질적인 데뷔작으로 패트릭 맥구한의 고전 TV 첩보물 《더 프리즈너》에 영감을 받아 제작된 앨범이다.

슬로베니아 쪽 밴드의 멤버로 녹음되었으며 앨범 자체는 1988년에 이미 완성되어 있었다. 초판은 500장 한정판으로 발매되었다. 그마저도 공연에서 150장만 나눠주고 나머지는 다 불태웠다. 미스터 닥터가 직접 쓴 일련번호가 매겨져있고 대부분 미스터 닥터가 직접 배포했다.

다른 데빌 돌의 엘범처럼 한 곡으로만 엘범이 구성되었으며, 38분 46초 이후로 곡이 중단되고 침묵만이 계속되다가 22분여가 지난 후 더 프리즈너의 주제곡을 편곡한 음악과 더 프리즈너의 대사를 녹음한 부분이 나오고 끝이 난다.

데뷔 앨범인 탓인지 덜 다듬어져 있는 사운드가 눈에 띈다. 미스터 닥터 본인은 "데빌 돌의 음악 중 가장 록 성향이 짙은 앨범"이라고 평했다.

참고로 러닝 타임은 66분 6초.

4.3. Eliogabalus (1990년)

데빌 돌의 음반 중 유일하게 다수의 트랙이 수록되어 있는 앨범이다. 초판 중 일부는 벨벳 소재의 특수 커버로 제작되었다.

본래 미스터 닥터는 The Girl Who Was... Death 앨범의 후속작으로 한스 아이슬러의 곡들을 본인의 보컬로 리메이크한 앨범을 녹음하려 하였으나 저작권 문제와 예산 부족으로 좌절되고 차선책으로 자신의 오리지널 창작곡을 녹음했다고 한다. 이탈리아 쪽 밴드의 멤버로 녹음되었으며 스튜디오 대여 일정 때문에 곡들을 완성하고 사전 리허설 없이 곧바로 녹음에 착수했다고 한다.

첫번째 트랙 Mr. Doctor의 원제는 The Black Holes of The Mind 였으며 앨범에 수록되기 전에 라이브에서 불려진 유일한 음악이다. 곡의 내용은 자신이 범죄 심리학을 전공할 때 접한 사례들에서 따왔다고 한다.

두 번째 트랙 Eliogabalus는 프랑스의 작가이자 연극 이론가인 앙토냉 아르토(Antonin Artaud)가 쓴 <헬리오가발루스: 혹은 왕관을 쓴 무정부주의자>(Héliogabale ou l'Anarchiste couronné)에 영감을 얻어 작곡한 곡이다. 가사는 절대 권력을 가졌으나 파멸로 치달았던 엘라가발루스 황제의 광기와 고독, 인간 내면의 악마성에 빗대어 요시프 브로즈 티토를 풍자하고 있으며 앨범을 제작할 당시 혼란스러워하는 유고슬라비아 국민들의 상황을 삶과 죽음의 중간지대에서 사는 광인(狂人)들이 나렌시프의 배[9]에 감금되어 삶과 죽음의 경계를 방랑하는 것으로 빗대어 표현했다.

4.4. Sacrilegium (1992년)

유고슬라비아 전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시기인 1991년 12월에 녹음한 앨범이다.

당시 미스터 닥터는 두 밴드를 하나로 합치고 보다 본격적인 활동을 하고자 했고 이 앨범을 완성한 후 지금까지 발매한 데빌 돌의 앨범들 중 미학적인 관점에서 가장 높은 점수를 주고픈 앨범이라며 흡족해했다.

그러나 앨범이 슬로베니아 당국의 사전검열에서 방송 불가 판정을 받게 되고 설상가상으로 유고슬라비아 전쟁까지 발발하자 큰 실의에 빠져서 미스터 닥터는 밴드의 활동 계획을 전면 백지화 시켰다고 한다.

이후 미스터 닥터는 2009년 인터뷰에 응할 때까지 모든 인터뷰를 거절하고 입을 닫아버린다.

4.5. The Sacrilege of Fatal Arms (1993년)

데빌 돌이 가끔씩 열었던 라이브 공연[10]에서 상영할 목적으로 만든 동명의 무성영화 사운드 트랙으로 제작된 앨범이자 전작 Sacrilegium을 편곡하고 확장시킨 앨범이다. 미스터 닥터가 감독한 무성영화는 유고슬라비아 전쟁의 잔혹한 참상을 고발하는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되어있었으며 영화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칼 테오도르 드레이어잔 다르크의 수난과 비슷했다고 한다.

앨범의 초판은 데빌 돌의 라이브를 보러 온 관객들을 위한 9백 장 한정반으로 제작되었으며 관객들에게 배포한 뒤에도 재고가 절반 이상이 남아서 친분이 있던 성시완이 한국으로 남은 재고들을 수입해서 판매했다고 한다. 초판에는 미스터 닥터가 직접 쓴 일련번호가 매겨져 있다.

비오 12세에 대한 하베무스 파팜(Habemus Papam)과 같이 아돌프 히틀러를 찬양하는 함성이 샘플로 들어간 것이 특징으로, 이 샘플들은 2013년 발매된 K-POP 태초의 노래, 노래의 종말에도 삽입된다.

4.6. Dies Irae (1996년)

1993년, 미스터 닥터는 유고슬라비아 전쟁이 점점 치열해지는 상황에서 신작 The Day of Wrath의 레코딩을 강행하였으나 결국 반군의 습격으로 유고슬라비아에 위치해 있던 스튜디오가 산산조각 나는 사건이 발생하고 만다. 그리고 비록 미스터 닥터 본인은 스튜디오를 무사히 빠져 나왔으나 이 사고로 데뷔 앨범부터 모든 데빌 돌의 앨범 작업에 참여한 프로듀서 유리 토니(Jurij Toni)가 큰 부상을 당하게 되고 The Day of Wrath의 마스터 테이프 역시 분실되어 버리자 미스터 닥터는 심한 죄책감과 우울함에 빠져서 데빌 돌 밴드를 해체하고 은둔하게 된다.

1996년, 미스터 닥터가 팬들과 이탈리아 음반 관계자들의 간곡한 요청을 수락하여 겨우 건진 The Day of Wrath의 마스터 테이프를 바탕으로 곡을 재녹음한 곡이 바로 본작이다. 마지막으로 자신의 모든 것을 담을 생각이었는지 최종적으로 완성된 마스터 테이프의 길이가 무려 75분에 달한다.

이 앨범의 부클릿을 통해 미스터 닥터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자신의 모습을 대중들에게 공개하였다.

데빌 돌의 앨범 중에서 유일하게 파트별로 쪼개져 있는 앨범이기 때문에 입문자들에게 추천되는 앨범.
[1] 심포닉 메탈과는 다르다.[2] 미스터 닥터는 데뷔 앨범을 제작하기 전 해밀을 직접 찾아가서 뮤지션 생활에 대해 조언을 구하기도 했다.[3] 인터뷰를 보면 알겠지만 미스터 닥터는 범죄 심리학 박사과정을 수료했으며 이탈리아에서 법의학자로 일한 경력이 있다.[4] 단, 유일하게 Dies irae에서는 노리나 라도반(Norina Radovan)이라는 이름의 소프라노와 함께 보컬을 담당했다.[5] 이 책은 1976년부터 1979년까지 발매된 영국의 모든 인디 앨범들을 해설과 함께 실은 일종의 백과사전 형식의 책으로 미스터 닥터 본인이 그 앨범들을 전부 소유하고 있다고 한다. 이러한 점에서 미스터 닥터의 완벽주의 성향과 음악에 대한 관심 및 재력을 알 수 있다. 1970년대 중, 후반이 배경인 까닭은 그가 영국에 처음 이민왔을 때가 1970년대 중반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후 1958년 3월 4일 생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이 책 말고도 미스터 닥터는 앨프리드 히치콕의 영화음악을 담당한 것으로 유명한 버나드 허먼의 음악을 정밀하게 분석하는 책 또한 집필했으며 현재는 <Fear of Music - Music of Fear>라는 공포를 조장하거나 불쾌감을 초래하는 천 개가 넘는 음악들을 분석하는 내용의 책을 집필 중이라고 한다.[6] 정확히는 미스터 닥터 자신은 지금 현재도 곡은 계속 쓰고 있으나 그것들을 녹음해서 발매하는 일에 대해서는 큰 흥미를 느끼지 않고 있다고 말하였다. 영어 위키백과에도 활동 연도가 1997년부로 종결되었다고 서술되어 있다.[7] 당시 제작 중이던 신작 The Day of Wrath의 마스터 테이프도 분실되었다. 이때 가까스로 건진 녹음의 일부를 편곡, 재녹음하여 발표한 것이 데빌 돌의 마지막 작품인 Dies Irae이다.[8] 그 대학교에 미스터 닥터가 찍은 영화도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9] 1494년 독일의 문학가 제바스티안 브란트(Sebastian Brant)가 발표한 도덕적 풍자시 '나렌시프(Narrenshiff)'(독일어로 '우매한 자들의 배(Ship of Fools)'라는 뜻)를 인용.[10] 새 앨범을 발표할 때마다 데빌 돌은 새로 발표한 앨범 전체를 연주하는 라이브 공연을 펼쳤다. 증언에 의하면 데빌 돌의 라이브 공연은 여러모로 독특했다고 한다. 무대 전체는 극도로 어두웠으며, 무대 조명은 마치 표현주의 영화의 조명처럼 오직 연주자의 손이나 미스터 닥터의 얼굴만을 비추는 날카로운 스포트라이트가 사용되었다. 데빌 돌 밴드는 록 밴드 특유의 드럼 키트나 앰프가 강조되기보다는 피아노, 바이올린, 첼로 등 클래식 악기들이 배치되어 정적인 분위기를 조성했으며 미스터 닥터는 짙은 화장과 창백한 얼굴, 정장 차림으로 무대에 등장하여 특유의 Sprechgesang 창법으로 무대를 휘어잡았고 절대로 관객과 눈을 맞추거나 소통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곡이 연주되는 동안 미스터 닥터가 감독한 무성영화를 스크린에 띄웠다고 한다. 데빌 돌의 라이브 공연은 사실상 새 앨범 발매를 기념하는 1회성 이벤트처럼 여겨졌으며 몇 몇 공연은 아예 데빌 돌 앨범을 구입해서 데빌 돌 팬클럽에 정식으로 가입해야만 티켓을 구입할 수 있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