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대통령 각하 만세의 작중 설정을 정리한 문서.2. 이념 및 사상
- 삼균주의
신분제 타파(균권)와 빈부격차를 좁히고(균부), 교육(균학)을 통해 모든 국민이 평등한 국가를 건설하자는 정치이념. 작중의 삼균주의는 원래의 조소앙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내 좌우파를 결합하기 위해 창시한 중도좌파 사회민주주의 이념이었던 삼균주의와는 전혀 다른 이념이다. 조지원이 창시하기는 했지만 실제로 이념을 체계화한 사람은 신채호라고 볼 수 있다. 작중의 삼균주의도 처음에는 공상적 사회주의, 이후에는 자본주의의 일종, 이후에는 제3의 위치 자리를 꿰차는데 이는 파시즘 및 파시즘 이전 사상[1]이 역사적으로 흘러온 길과 일치한다. 우연이라 할 순 없을 듯.
작중의 삼균주의에 대해 좌익세력은 삼균주의의 사회주의적 측면에 집중하지만 우익세력은 민족주의적 측면에 더 집중하면서 등장인물들 사이에서도 삼균주의에 대한 해석이 갈리기 때문에 삼균주의가 도대체 무엇인지 알아보기 위해서는 아래의 항목들을 참고하는 것이 좋다. - 생디칼리슴 - 1일 8시간 노동정책
- 협동조합주의 - 협동조합 위주의 경제 정책
- 민족 볼셰비즘 - 반제국주의, 민족주의 혁명 노선
- 슈트라서주의 - 민족주의와 사회주의의 결합
- 보수혁명
- 드골주의, 신대통령제 - 삼균주의는 의회정치 자체를 귀족과두정의 잔재라고 규정하며 국민이 선거를 통해 강력한 권한을 가진 지도자, 곧 제왕적 대통령을 선출하는 식으로 선거마다 혁명을 할 수 있는 신대통령제가 가장 혁명적인 정치체제라고 주장한다.
- 포퓰리즘
- 좌파 파시즘 - 종합적 분류
- 국수주의 - 조지원의 심상 묘사를 보면 위의 사상적인 부분들은 전부 국가를 운영하기 위한 방법론에 불과하고, 삼균주의의 본질이자 조지원 본인이 품고 있는 사상은 한민족만 잘 된다면 무슨 짓이건 해도 좋고 다른 민족들은 어떻게 되건 상관 없다는 식의 국수주의라고 할 수 있다.
- 정석 시리즈
아나키스트 요리책이 모티프. 혁명을 진행하기 위한 참고서이자 조지원이 팔아먹으려고 만든 혁명 굿즈이다. 내용이 내용이다 보니 출간하자마자 서방 진영에서는 모조리 금서로 지정되었다. 원 역사의 정석 시리즈처럼 내용이 수정 보완된 개정판이 꾸준히 출간되고 있다고 한다. - 시위의 정석
폭력적 시위와 평화적 시위를 하는 방법이 수록되어 있다. - 파업의 정석
내부에 숨어든 프락치를 색출하는 방법과 사태가 장기화될 때 동지들을 돌보는 내용도 포함된다. - 테러의 정석
각종 테러 방법뿐만 아니라 반드시 노려야 할 표적과 절대 노리면 안 되는 표적을 구분하는 방법도 포함되어 있다. - 수사의 정석
반혁명진영의 입장에서 혁명가를 어떻게 추적하는지에 대한 내용이 있는 듯하다. - 반란의 정석
최종 목표인 혁명을 진행하기 위한 내용이 수록되어 있는 모양. 출판된 건 아닌 듯하고 김원봉이 수카르노에게 전달한 한 권만 존재하는 것으로 보인다.
3. 국가 및 단체
- 정보기관
조지원의 권력을 뒷받침하는 정보기관들이자 작중 묘사되는 악행들을 도맡는 기관들. - 군사보안국 → 보위사령부
조지원이 최측근 이준영을 초대 국장으로 설립한 군사 정보기관. 그러나 민국 초창기에는 민간에까지 손을 뻗어서 체제를 수호하기 위한 더러운 일들도 다 도맡았다. 이준영 숙청 후에는 보안사령부로 거듭났고, 대통령의 지시가 있지 않는 한 군 내부의 일에서는 무소불위의 권한을 갖게 되었다. 작중 묘사된 것은 특무 1~4과[2]뿐이지만, 그 외에도 알려지지 않은 비밀스러운 부서들이 많고, 그 목적이 목적인 만큼 같은 군인들도 경원시하며, 열강과의 전쟁 때는 해방한 지역에서도 말썽을 일으켜서 '하루라도 피를 보지 않으면 혀에 가시가 돋는 귀신 소굴'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 또한 초대 국장 이준영이 조지원에게 토사구팽당한 것을 민간 관료들의 탓으로 돌려서 내부 분위기는 이들에게 매우 적대적이다. - 우정총국 고등연락원 → 국가보안국
나라가 망국의 위기였을 때 정보기관이 필요해서 전국적인 연락망을 갖고 있는 유일한 기관인 우정총국을 모태로 만들어졌다. 대한민국 정부의 눈과 귀로 국내/해외에 걸쳐 모든 분야의 정보를 수집하지만 자체적인 무력은 없어서 힘을 써야 할 때는 경찰이나 용병과 함께 움직인다. 원래는 민간 조직이 모체로 시작되어서인지 험한 일엔 부적합했지만, 김구가 국장을 맡은 이후로는 보위사령부 못지 않게 과격해진 것으로 보인다. - 대통령 안전수석비서실 → 국가보위부
대통령 안전수석비서실을 모체로 대통령 직속 정보기관들을 통폐합하면서 탄생했다. 대통령의 눈과 귀인 만큼 모든 분야에 개입할 수 있고 자체적인 무력도 있다. 존재만으로 공포를 불러 일으키는 기관이어야 하기 때문에 봉천 한복판의 고려 호텔에 본부를 두고 공공연하게 활동하며, 백정들의 조직인 형평사를 통해 요원들을 수급한다. 작중 수장은 계속 표지훈.
- 발해연방
한청전쟁에서 한국이 승리한 뒤 수립된 대한민국+청나라(만주)를 포함하는 영역을 지닌 가상의 국가이다. 형식적으로는 문화적, 역사적, 이념적 동질성을 공유하는 주변국들의 국가연합이라고 설명하고 있으나 실질적으로는 한국이 만주를 집어삼키기 위해 설치한 기구로, 발해연방=한국이나 다름없다. 연방 내 주도권은 한국인(구 조선계)이 가지고 있으나, 한국인을 포함한 예맥인이라는 관념을 주입시켜 장기적으로는 단일민족으로 취급하려 하고 있다. 국력은 2차 대공황 전 이미 이탈리아 수준의 경제력에 근접하였고 군사력은 그보다 더 높다. 중국을 둘로 쪼개고 일제를 패망시킨 시점에는 아시아의 최강국이었고, 그 후 미국과 유럽을 자중지란에 빠트려 멸망의 구렁텅이로 몰아넣고 인류연방을 창설해 그 지도국이 된다. 그 후 소련은 모스크바를 포함한 주요 도시들에 핵을 투하해 멸망시켜 시베리아를 빼앗고 2차 대전이 끝난 후 미국에서 하와이와 파나마 운하를 매입한다. 독자들은 줄여서 발련이라고 부른다.
- 호국형제단
고아가 된 아이들을 모아 구성된 단체. 수장은 이범석이며, 공식적으로는 국가보안국 소속. 여기 속한 아이들은 성장하여 한국의 비밀작전에 동원된다. 실제 고아들도 있지만 부모가 반정부 운동을 하다 사망하여 온 아이들도 있다. 구성원 모두 조지원의 성씨를 물려 받아 조씨이며 말만 양자 취급이 아니라 조지원이 입적도 해주었다. 직급은 군 조직의 용어가 아니라 대형, 차형 등 가족과 형제와 관련된 용어를 사용한다. 조지원이 은퇴하며 조가은과 대한민국의 안전장치 역할을 부탁했다.[3]
작중에서 형제단 출신 조남선이 집행장관으로 승진했다.
- 한국독립당
조지원이 창당한 삼균주의를 기반으로 한 정당. 정치 이념이 현대의 기준으로 보면 죄다 섞여 있어서 딱 하나로 고르기 힘들지만 민족주의·전체주의 성향이 강한 편이다. 창당 이래 단 한번도 정권을 내어주지 않았고 경제 위기 등의 이유로 몇 번 개헌선을 놓친 일은 있으나[4], 조지원이 스스로 물러날 때까지 무려 50년 동안 대한민국의 집권 여당 자리를 놓치지 않았다.
- 청년당
안창호가 창당한 야당. 조지원에 의해 조가은이 입당하면서 사실상 관제 야당 신세가 되었다.
- 국가판무관부
원 역사에서 나치 독일이 점령지 관리를 위해서 국가판무관부를 설치한 것처럼 한국이 점령한 지역에 설치했다. 설치가 확인된 판무관부는 다음과 같다. 현실 나치의 판무관부처럼 한국의 각 판무관부 또한 목적의 차이가 있다. - 영구적 지배를 위한 국가판무관부
- 관동 국가판무관부: 일본합중국 무장국 동경시에 설치[5]
- 구주 국가판무관부
- 시베리아 국가판무관부
- 영구적 보호를 위한 국가판무관부
- 북해 국가판무관부: 홋카이도에 설치
- 유구 국가판무관부: 오키나와에 설치
- 독립국의 안정화를 위한 국가판무관부[6]
- 대만 국가판무관부: 타이완 섬에 설치
- 파마늉아 국가판무관부: 호주에 설치
- 아오테아로아 국가판무관부: 구 뉴질랜드 오클랜드에 설치
- 말라야 국가판무관부: 쿠알라룸푸르에 설치
- 남아프리카 국가판무관부
- 위임통치를 위한 국가판무관부
- 베이징 국가판무관부
- 상하이 국가판무관부
- 난징 국가판무관부
- 홍콩 국가판무관부
이들 중 구주, 시베리아, 북해, 유구를 제외한 국가판무관부는 조지원의 사임과 동시에 고등판무위원회 체제로 전환될 예정.
- 고등판무위원회
조지원 사임 이후에 출범될 새로운 점령지 지배체제.
국가판무관부가 하는 일을 그대로 물려받지만, 한 명의 국가판무관이 아닌 여러 명의 고등판무위원을 두어 집단지배체제를 구성한다는 차이점이 있다. 또한 단순한 억압과 지배에서 그치지 않고, 혹시 나중에라도 생길지 모르는 재기의 가능성을 철저히 말살하고, 항구적인 지배체제를 구축하는 것이 그 목적이다. 과거 식민지배에 대한 보복을 하는 것도 포함. 이 때문에 해당 지역의 고등판무위원은 과거 그 지역의 국가에게 식민지배를 당했던 국가 출신의 관료로 채워질 예정이다.[7]
- 인류연방
조지원이 기존의 국제 질서와 국제법을 부정하며 새롭게 설치한 국제기구이다. 참여할 것으로 보이는 국가들 면면을 보면 지구상의 살아남은 인구 절반 이상이 포함될 것이다. 발해연방(대한민국, 대청국(만주)), 중화민국 북경정부(북중국), 중화민국 우창정부(남중국), 티베트 교국(티베트), 몽골 민주 연방(몽골), 에조 공화국(구 일본 제국 홋카이도), 일본합중국(구 일본 제국), 유구국(구 일본 제국 오키나와), 대만민국(타이완 섬), 인도네시아 공화국(인도네시아), 말라야 연방(말라야 반도), 베트남 민주공화국(베트남), 쁘라텟 타이 연방(타이), 버마 연방공화국(미얀마), 바라트 민주공화국(인도), 스리랑카 자유국(스리랑카 섬), 네팔 왕국(네팔), 티모르국(티모르 섬), 사라왁 술탄국(보르네오 섬), 아라비아 공화국(아라비아), 싱가포르 공화국(싱가포르), 뉴기니 국민국(뉴기니 섬), 파마늉아 삼균주의 연방 공화국(호주 지역), 아오테아로아 국민군단국가(뉴질랜드 지역), 자유도시동맹(중국의 구 외국 조차지들의 연합), 필리핀 자치령(필리핀)이 참여할 것으로 보인다. 의장국은 사실상 발해연방 대한민국이며 본부도 서울에 있다. 마지막 경쟁자인 소련도 모스크바 핵폭격이라는 통수를 날려 멸망시키고 인류의 유일한 법률로 군림한다.
그 후, 한국 외 가맹국들이 조지원 사후에도 자국의 안위를 보장받기 위해 사실상의 합병요청서를 한국에 제출하면서 단일국가화될 조짐이 보이기 시작한다. - 서울의정서
원폭으로 공격하기 전에 집행장관 조남선의 "서울의정서 3조 3항에 근거하여 인권적용을 효력 정지하겠다"는 패기 넘치는 멘트로 언급된다. 뒤이어 3조 4항에 따라서 "처형"을 집행하겠다고 답신을 받는다. 발해연방이 주도한 새로운 국제법 역할을 하는 듯하며 다른 조항이나 관련 내용은 나오지 않았다.
4. 주요 사건
- 보국전쟁 - 러일전쟁[8]
조지원이 빙의한 이지용 외부대신이 한일의정서 체결에 반발하며 회담장에서 자폭하면서 시작된다. 사건이 일어난 후 잔존 대한제국군과 일본군이 상황을 알아보기도 전에 전투를 개시하고(제 2차 한성 전투), 대한제국군은 중과부적으로 패하고 한성이 혼란에 빠진 상황에서 전사한 정위 조지원에게 주인공 조지원이 2차로 빙의한 후 일본군 헌병대와 피난 가던 한성 시민들이 대치하던 중 저격을 통해 혼란을 키우면서 본격적인 전쟁으로 판이 커진다(제 3차 한성 전투). 일본은 이지용의 의거 때 선봉이었던 12사단장, 주한 일본대사가 사망하면서 정보가 차단되어서 빠른 대응을 하지 못했고, 상황이 더 악화되는 것을 우려한 이토 히로부미의 개입으로 대한제국이 전술적으로는 참패했지만 전략적으로는 승리했으며, 이후 조지원이 이끄는 한성 정부가 수립되어서 일본군을 보조하면서 러일전쟁을 수행하게 된다.
일본군의 북진이 지연되면서 당연히 원 역사에서도 일본이 가능한 최상의 조건에서 간신히 승리했던 러일전쟁이 한국과 싸우느라 초반부터 힘을 뺐으니 가망이 없어졌고, 오히려 러시아군이 남하하면서 주 전장이 한반도 북부가 된데다가 조지원의 공작이 겹쳐서 양국은 병림픽을 벌이면서 한반도에서 의미 없는 소모전을 벌이게 된다. 결국 피의 일요일 사건이 원 역사보다 더 크게 터지면서[9] 무조건 평화를 조건으로 종전이 이뤄지면서, 아무것도 얻지 못한 러시아와 일본의 전략적 패배, 그리고 북부가 초토화됐지만 생존에 성공한 대한제국의 전략적 승리로 마무리된다.
- 한청전쟁
작중에서 등장하는 2번에 걸친 가상의 전쟁이다. 주 전장은 만주였으며, 교전국은 대한민국과 명목상으로 청나라였지만 실질적으로는 군벌 세력인 펑궈장의 직예군, 장쭤린의 만주군과 싸웠다. 세계 패권을 겨루는 국가간 전쟁도 아니고 멀리 떨어진 극동에서 일어났기에 개전시의 관심을 떨어졌으나 2번 모두 기존 전쟁의 패러다임을 바꿔버렸다. 민국 8년(1913년)에 벌어진 첫 전쟁에서 객관적으로 열세로 평가 받은 대한민국군은 화학 병기를 전면적으로 사용하여 밀집한 군대를 와해 시키고 방독면을 착용한 보병이 공포에 빠진 청군을 무너뜨렸다. 이후 대한민국은 배상금과 함께 천산산맥~용강산맥~부이령에 이르는 영토를 할양받았고, 작중 세계관에서는 독가스가 비대칭 무기가 아니라 재래식 무기가 된다.
민국 20년(1925년)에 벌어진 두 번째 전쟁에서는 대한민국은 전차를 사용한 전격전으로 교전 시작 64시간 만에 청의 항복을 받아 냈다. 그나마도 본격적인 교전은 56시간이고 8시간은 항복을 요구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었다. 이 전쟁으로 조지원 정권의 지지는 반석에 올랐고 만주는 '발해연방'이라는 국가 연합으로 사실상 대한민국의 일부가 되었으며, 세계대전에도 영향을 주었다.
- 제1차 세계 대전
미하일의 국혼을 계기로 러시아가 미하일파와 니콜라이파로 분열되고 내전이 일어나서, 동맹들이 각자의 이유로 개입하면서 시작되었다. 러시아가 분열되어서 힘을 전혀 못 쓰는 바람에 파리가 함락되는 등 서부 전선이 무너지면서 독일·오스트리아 진영이 승리하여 유럽의 패권을 차지했다.
- 시카고 독감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원 역사와 거의 동일한 시점에서 발생했다. 처음 퍼질 당시만 해도 열강들은 평범한 독감으로 치부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지만 미래를 알고 있던 조지원에 의해 한국만이 마스크 확보, 청결 운동, 전국적인 방역 작업, 결정적으로 페니실린 연구를 통해 질병 극복에 힘썼다. 처음에는 한국의 모습을 비웃던 열강들은 막상 질병이 본격적으로 확산되자 쪽도 못 쓰고 털렸고, 결국 한국에서 발견한 페니실린을 대량 생산하여 극복하려고 했지만, 페니실린은 세균에는 효과적이지만 바이러스에는 별 효과가 없었기에 실제로는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더군다나 한국의 행보로 인해 열강들은 보도 검열도 하지 못해 전 세계적으로 시카고 독감이라는 명칭이 굳어졌고, 미국에서 시작되었다는 이유로 전 세계적으로 반미주의, 더 나아가 유대인 배후자본설에 따라 반유대주의가 확산되었으며, 각국은 세계 대전의 여파로 방역 작업에 힘을 쓰지 못한 탓에 질병을 제대로 잡지도 못하고 경제 공황과 국민 여론의 분열을 겪었다. 그나마 영국이 대륙봉쇄령을 철회하고 독일과 화해한 것이 얼마 안 되는 순기능. 몇 년 후 집단 면역이 형성되며 사그라들었다.
- 관동대지진
사회 현상의 변수에 따라 발생하는 다른 사건과 달리 자연현상인 지진이라 원 역사와 거의 동일한 시점에서 발생했다. 조선이 병합되지 않아서 관동지역에 조선인이 많이 살지 않았고 관동대학살로 이어지는 일은 없었지만, 조지원이 생화학 테러를 저지르는 바람에 더 큰 피해를 입었고, 여기에 미국이 경제 보복을 시행한데다가, 내각과 해군파벌이 사태를 수습하기는커녕 정권을 두고 다퉜으며, 그 와중에 일본 독립당의 부상으로 인해 일본의 정국이 극도로 혼란해졌다. 결국 내전이 발생하고 히로히토 황태자가 이들에 맞섰으나... 독립당이 옹립한 야스히토가 배신 때리고 일본을 장악하자 독립당이 자신들을 따르는 함대를 이끌고 쓰시마 섬으로 망명해서 제2의 에조 공화국을 세우면서 막을 내렸다. 결과적으로 황도파에 속하는 독자적인 무력을 가진 천황이 등장해서 철권 독재를 휘두르게 되었다.
- 몽강전쟁
대한민국이 외몽골을 삼균주의 진영에 합류시킨 후 내몽골이 독립 선언을 하면서 중화민국 간에 벌어진 전쟁. 중화민국은 자신들의 열세를 인정하고 지연전을 계획했지만, 더 강력한 전차와 공군을 앞세운 대한민국 국군의 공격에 처참하게 박살 나고 결국 몽골의 독립을 인정하게 된다. 이후 중화민국과 일본은 서로 밀착하게 되고, 극동의 정세에 큰 변화를 가져온다.
- 대공황
원 역사와 달리 두 번에 걸쳐 발생했다. 1차 대공황은 제1차 세계 대전 승전국인 독일과 미참전국인 미국의 무역전쟁이 과열되며 발생했고, 이후 대대적인 투자로 인해 한시적으로 대호황이 찾아왔다가 갑작스럽게 2차 대공황이 터졌다. 경제 호황기를 누리다가 갑작스럽게 공황 상태에 빠지는 2차 대공황이 원 역사의 대공황과 유사하다. 다만 그 규모와 충격은 원 역사의 그것보다 훨씬 강한 듯. 여기에 당시 양대 패권국인 미국과 독일이 각각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크게 혼란에 빠져서 조기수습에 실패하면서 경제, 사회 시스템의 붕괴속도가 더 빨랐다.
특히 미국은 현직 대통령 암살로 촉발된 정치적 혼란 때문에 조기에 수습하는 데 실패해서, 전국에서 시위와 폭동이 터져나오며 대공황 → 대폭동의 악순환으로 이어졌고, 다른 패권국인 독일도 순식간에 경제가 마비된 와중에 점령지를 중심으로 시작된 공산당의 폭동과 무장테러가 금세 본토까지 번졌다.[10] 일본은 좌익 인사 수만 명을 학살하면서 정권을 안정화시켰고, 한국조차도 장기 집권으로 인한 민주화 요구가 커지는 등 고난을 겪어야 했다.
결과적으로 그동안 약소했던 소련[11]과 공산 진영의 영향력이 급격히 강해졌으며, 삼균주의 진영 한국도 만주를 완전히 병합하고 동남아시아 쪽으로 세력을 크게 키우며 오롯이 제3진영으로 발돋움하는 데 성공했다.
- 한만합방
중화민국과 청나라(만주)의 재통합을 묻는 "예"가 2024만 표, "아니오"가 2319만 표가 나와 국민 투표가 부결되고 대한민국이 민국 33년에 발해연방의 연방평의회를 상설기구화하여 합방을 성사시켰다. 투표 결과는 예상 밖이었지만 찬성되었더라도 이미 합방을 염두에 두고 경찰권을 장악해서 반대파들을 탄압하고 식민교육을 진행했던 조지원은 만주를 풀어줄 생각이 처음부터 없었다.
- 제2차 세계 대전
민국력 33년(서력 1938년) 6월 25일에 조지원이 서울에서 열병식을 진행하며 서방세계를 향해서 사실상의 선전포고를 하여 기존의 세계 열강에 대한 절멸전을 목표로 제2차 세계 대전이 시작되었다. 2차 대전은 서방진영과 공산진영이 유럽 대륙에서 전면전을 벌이는 동안 한국은 서방진영의 군대와 직접적인 교전을 많이 하진 않았다. 오히려 영국, 프랑스, 독일 등의 영향력이 약해진 틈을 타서 아시아, 아프리카 식민지를 해방하는데 주력했고, 이는 서방진영의 경제에 큰 피해를 주어 전쟁 수행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한국은 두 진영이 서로 싸우는 동안 유럽에서 승리하고 있던 소련을 핵무기로 뒤통수쳐서 멸망시키며 최후의 승자가 되었다.
- 한일전쟁
민국력 33년(1938년) 9월 23일에 대한민국이 일본을 기습하여 벌어진 전쟁으로 제2차 세계 대전의 일부. 원 역사에서 6.25 전쟁 때 남한이 당했던 대로, 추분을 맞아 일본군이 휴가를 떠난 빈틈을 타서 전면적인 기습을 하였다. 국군은 규슈를 점령하고 대만의 시민 봉기를 지원해서 대만을 해방시킨 것 외에는, 혼슈에는 생화학병기와 방사능 물질을 퍼부어서 일본인을 학살하고 서방 열강들이 일제히 선전포고를 하고 나서야 혼슈를 점령했다.[12] 이로 인해 전쟁 수행이 불가능한 것을 인정하고 일본 내각과 황실은 해군과 탈출하여 미국으로 망명했고, 그마저도 국군에 마지막 함대가 몰살당하고 간신히 몸을 피한 천황 일가도 작살내면서 전쟁이 끝난다. 이후 일본인은 추정 4~5000만이 죽었다고 하며 일본 제국은 그대로 멸망한 후 일본 합중국으로 대체되었으며, 판무관부의 통치를 받는 동안에도 지속적으로 탄압을 받은 끝에 원주민들이 절멸하여 거의 빈 땅이 되어버리고 이후 국제경제특구가 되어서 외국인(거의 한국인)의 이민을 적극적으로 받게 되었다.
[1] 조르주 소렐이나 프랑스에서 등장한 파시즘의 조상격인 사상들. 프랑스 파시즘 문서 참고.[2] 1과는 방첩, 2과는 해외공작, 3과는 군 내 부정부패 단속...이라고 알려져 있는데, 사실 3과는 신무기를 개발하고 인체실험을 하는 연구부대이며, 4과는 존재 자체도 잘 알려지지 않았는데 주로 암살을 도맡는다.[3] 동시에 표지훈에게 형제단이 타락하거나 당대의 정부를 무시하고 폭주할 경우 보위부가 숙청할 것을 따로 지시했다.[4] 이 선거 결과에 야당에 표를 던진 젊은 층도 깜짝 놀랐고 조지원을 왕처럼 숭배하는 계층의 한국인들은 '대통령 각하께서 실망하시면 어쩌나' 하고 당혹해했다.[5] 구 일본 제국 도쿄시.[6] 완전히 안정화가 끝나면 해체되는걸로 추정[7] 예를 들면 영국의 고등판무위원회는 아일랜드 출신, 인도 출신, 줄루족 출신, 호주 원주민 출신 등이, 벨기에는 콩고 출신이, 프랑스에는 알제리 출신 등이 맡게 된다. 아마 네덜란드에는 인도네시아 출신 등으로 채워질 것이다.[8] 사실상 하나로 연결되는 전쟁이라 연결해서 서술.[9] 발틱 함대가 출진하지 않아서 쓰시마 해전이 일어나지 않았고 대신 시위대에 함포 사격을 퍼부었다.[10] 그나마 미국은 군부가 계엄령을 선포하고 닥치는 대로 잡아죽이면서 뒤늦게나마 혼란을 가라앉히긴 했지만, 독일은 후일 제2차 세계 대전에서 패전하고 정부가 망명할 때까지 내내 테러의 위협에서 벗어나지 못했다.[11] 국제 자본시장에서 격리되어 있었기 때문에 피해가 덜했다.[12] 이 궁극의 일본을 공격한다는 과한 것 같지만 작중 대한민국 입장에선 합리적인 선택의 결과였다. 일본이 2차 대전 패전 후 세계 2위 경제대국이 되는 것은 조지원만 알고 있지만, 작중에서만 봐도 일본은 조지원의 존재로 부침을 좀 겪긴 했지만 여전히 열강의 말석에 있는 선진국인데다가, 전쟁 발발 시점에서는 중화민국을 사실상 식민지로 삼았으니 그 저력이 더 크게 발휘될 것이라는 예측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아시아의 패권을 놓고 대한민국과 지속적으로 충돌하면서 더 이상의 관계 개선도 어려워진 상황이니 서구 열강 전체를 상대로 아시아 해방전쟁을 벌여야 하는 입장에서 배후를 찌를 수 있는 일본을 정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초반 기습으로 규슈를 점령해서 혼슈 전역을 타격권에 넣고, 해군을 뇌사 상태에 빠트리고 대만을 해방시켜서 일본 본토와 지나파견군의 연계를 끊은 시점에서 배후 안정이라는 군사적 목적은 다 달성했지만, 어차피 저지른 이상 한일관계가 나아지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일본을 확실히 절멸시키겠다는 판단을 내린 것으로 보인다. 혼슈를 생화학무기로 도배하고 일본인들을 학살한 이유도 행여나 열강의 연합군이 일본이 상륙하게 될 경우 배후지로 사용되지 못하게 하려는 군사적 고려도 있는 것으로 보인다. 덤으로, 일본에 대한 완벽한 승전으로 국뽕을 극대화시켜서 세계 열강과의 전쟁이 남의 전쟁이라며 생길 수 있는 염전 여론을 최소화하겠다는 정치적 고려도 있었을 것이다. 즉, 윤리적 문제만 치차하면 조지원의 결정은 지극히 합리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