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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한국가스공사 페가수스/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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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 1997-98 1998-99 1999-00 2000-01
6위
6강
6위
6강
3위
6강
10위 5위
6강
2001-02 2002-03 2003-04 2004-05 2005-06
4위
6강
7위 4위
6강
4강
10위 10위
2006-07 2007-08 2008-09 2009-10 2010-11
9위 7위 6위
6강
9위 2위
4강
2011-12 2012-13 2013-14 2014-15 2015-16
6위
6강
3위
6강
4강
4위
6강
6위
6강
4강
10위
2016-17 2017-18 2018-19 2019-20 2020-21
6위
6위
2위
5위 5위
2021-22 2022-23 2023-24 2024-25 2025-26
6위
9위 7위
: 우승: 준우승 | : 플레이오프 진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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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한국가스공사 페가수스 역대 정규 시즌
창단 ~ 2008-09 시즌 2009-10 시즌 ~ 2015-16 시즌

1. 대우증권 실업 농구단(1994~1996)2. 인천 대우 제우스(1997~1999)3. 인천 신세기 빅스(1999~2001)4. 인천 SK 빅스(2001~2003)5. 인천 전자랜드 블랙슬래머(2003~2009)6. 인천 전자랜드 엘리펀츠(2009~2021)7. 대구 한국가스공사 페가수스(2021~ )

1. 대우증권 실업 농구단(1994~1996)

1994년 5월 23일 대우증권이 국내 스포츠 활성화와 기업 이미지 제고 차원에서 연세대명지대를 연고지명 학교로 하는 남자 실업 농구팀을 창단한다고 공식 발표했다. 이보다 2개월여 앞선 1994년 3월 고려대를 연고지명 학교로 둔 동양제과 농구단도 함께 창단되면서 자연스럽게 실업리그 막내 라이벌 관계가 형성됐다.

다만 대한농구협회에 창단 신청서만 냈을 뿐 선수도 감독도 뭐도 없는 상황이라 껍데기뿐인 창단이었으며[1], 1996년에 출범할 실업농구리그 참가 전까지 팀을 꾸리기로 하고 본격적인 창단 작업에 나섰다. 연세대 농구부에서 일했던 최종규 전 총감독과 유재학 전 코치를 대우 농구단 코칭스태프로 선임하고, 우지원, 김훈 등 연세대 출신 선수들을 기반으로 선수를 모았다.

창단 초기 남자 실업농구 무대인 코리안리그에 참가하며 어느 정도 팀으로서의 성과를 내려고 할 즈음 한국프로농구의 출범이 본격화되면서 실업 농구단의 프로 전환을 추진한다.

2. 인천 대우 제우스(1997~1999)

파일:인천 대우 제우스 엠블럼.svg
파일:external/sports.chosun.com/a4t74105_2.jpg

원년인 1997 정규시즌 유니폼. 올랜도 매직을 연상시키는 디자인으로 역시 인기가 많았다.

1997년 실업 농구가 프로화되면서 대우증권 농구단은 연고지를 인천광역시로 삼고[2] 구단명을 인천 대우증권 제우스 프로농구단으로 바꿨다. 팀은 1998년 독립법인 (주)대우제우스로 출범하면서 구단명을 인천 대우 제우스 프로농구단으로 바꿨다.

첫 번째 시즌인 1997년 원년 시즌에는 인천도원체육관에서 경기를 치렀지만 자타가 공인하던 '오빠부대'라는 팀의 인기도에 비해 체육관이 심하게 좁고 낡은 점이 단점으로 지적됐다. 당시 사정이 있는데, 인천도원체육관을 떠나고 싶어도 시내에 인천도원체육관을 대신할 만한 실내 경기장이 단 하나도 없었다.[3] 그러던 중 1997년 10월 인천 바로 옆인 부천시부천실내체육관이 문을 열면서 1997-98 시즌부터는 부천실내체육관으로 홈경기를 옮겨서 치렀다. 부천 홈경기는 팀이 전자랜드로 바뀐 뒤에 인천삼산월드체육관이 개장후 이전할 2006년 11월까지 열렸다.

이 시절 대우 농구단의 성적은 인천 연고 농구단의 역사가 늘 그렇듯 6강까지가 딱 어울리는 팀이었다. 반면에 인기만큼은 전국구 인기구단이었다. 오빠부대 연세대의 멤버를 주축으로 만들어진데다가 수도권을 연고지로 두다보니 그 인기가 실로 어마어마했다.

3. 인천 신세기 빅스(1999~2001)

파일:인천 신세기 빅스.jpg
파일:external/new3.ptb.co.kr/c_20070515_3429_5224.jpg 파일:external/sports.chosun.com/a4t74105_3.jpg
1999-2000 시즌 2000-01 시즌

당시 신세기 빅스의 원정 유니폼

1999년 구단 운영주체가 (주)대우제우스에서 대우자동차로 넘어갔으나 얼마 안 가서 모기업인 대우그룹이 재정 악화로 인한 부도 위기에 몰리면서 결국 농구단이 매각 대상에 오르게 된다.[4] 농구단의 새 주인은 017 번호로 유명했던 제2 이동통신 회사 신세기통신이었고 팀명은 인천 신세기 빅스로 바뀌었다.

프로 초창기에 대우 제우스는 홈 경기장을 인천축구전용경기장 인근에 있는 인천도원체육관을 사용했는데, 이 체육관이 너무 낡고 협소해 홈 경기장을 새로 지은 부천시 중동의 부천실내체육관으로 이전하여 홈 경기를 치렀다. 인천광역시가 연고지임에도 옆동네 부천시에서 홈 경기를 치르다 보니, 이 팀의 연고지가 경기도 부천시인 것으로 오인하는 경우도 있었다. 당시 부천실내체육관에서 광고를 어떻게 했냐면, 부천·인천 시민과 함께하는 SK 빅스로 광고하기도 했다. 분명히 인천광역시 연고팀이건만 단지 체육관이 없어서 생긴 촌극이었다.[5]

이 당시 성적은 널뛰기가 심했다. 대우 제우스시절 6위로 PO에 두번 진출했다가 유재학 감독이 부임했던 첫 시즌에는 3위까지 올라갔다. 그러나, 역사상 최초로 6위팀에 패배하는 굴욕을 당했고, 1999-2000 시즌에는 15승 30패로 최하위[6][7]를 했다. 그런데 득실마진은 45경기 -94으로 평균 -2.089점이라는 점.[8] 바로 다음 2000-01 시즌에 6강에 올라가고····. 시즌 뿐 아니라 경기마다 널뛰기가 심했다.

여담으로 한국프로농구 출범 이후 정식 유니폼 기준 상하의 색깔이 다른 유니폼을 처음 사용한 구단이다. 홈은 흰색 상의에 주황색 하의, 원정은 1999-2000 시즌까지 검은색 상의에 주황색 하의였다. 2000-01 시즌부터 원정은 전면 주황색이 되었으나, 홈은 SK 빅스 시절까지도 흰색 상의, 주황색 하의를 유지했다.

4. 인천 SK 빅스(2001~2003)

파일:인천 SK 빅스 엠블럼.svg
파일:external/www.donga.com/1024_63.jpg

신세기통신SK텔레콤으로 합병된 이후에는 인천 SK 빅스로 구단명을 바꿨다. 그런데 SK그룹은 이미 나이츠 농구단을 두고 있었기 때문에 KBL의 "한 기업이 2개 이상의 농구단을 운영해서는 안 된다"는 규정을 위반하게 되어[9] 문제가 되었다. 다만 이 경우는 모기업이 합병하는 바람에 불가항력적으로 한 기업에서 2개의 프로농구단[10][11]을 운영하게 된 것이었으므로 두 구단 중 하나가 다른 기업에 매각될 때까지 임시로 두 팀을 유지하도록 했다.

SK그룹 입장에서도 굳이 2개의 프로농구 팀을 운영할 이유가 없고 운영도 부담스러웠기 때문에 둘 중 새로 SK그룹에 속하게 된 빅스를 팔고 기존의 나이츠만 계속 운영하기로 하였다. 이 과정에서 당시 빅스는 성적은 중간이었지만 부천-인천 지역에서 인기 구단이었고, 인천에는 같은 SK그룹에서 운영하는 야구팀인 SK 와이번스가 있었던 것에 반해 나이츠는 관중 동원력은 높았지만 청주에서 서울로 연고이전 후 성적이 별로였기 때문에 나이츠를 매물로 내놓아야 한다는 목소리나 움직임도 있었다.[12][13]

하지만 SK그룹 입장에서는 당연하게도 모기업의 합병으로 인해 타의로 떠안은 중간에 입양된 것처럼 들어온 빅스가 아닌 기존에 운영하고 있었던 나이츠가 SK의 정통성을 지닌 팀이었고, 나이츠의 서울 연고지라는 메리트를 포기할 수 없었기에 결국 SK 나이츠를 안고 가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빅스 인수 의향이 있는 기업을 금방 못 찾았는지 2002-03 시즌까지는 2개의 프로농구팀을 그대로 운영하고 2003년에야 전자랜드에 매각하게 되었다.

5. 인천 전자랜드 블랙슬래머(2003~2009)

파일:인천 전자랜드 블랙슬래머 엠블럼.svg
파일:external/search.pstatic.net/?src=http%3A%2F%2Fimgnews.naver.com%2Fimage%2F351%2F2017%2F03%2F31%2F101551012_170331_006k_2.jpg
2003-04 시즌 ~ 2005-06 시즌까지 활약한 앨버트 화이트.
전자랜드 블랙슬래머 시절 응원가
'패기와 정열의 블랙슬래머'
[ 가사 펼치기 · 접기 ]
패기와 정열의 블랙슬래머
불타는 코트의 무적 전사들
넘치는 힘 뜨거운 정열로 이긴다
블랙슬래머 그대 우리의 영원한 태양
전자랜드 영원한 우리의 희망이여
블랙슬래머 정열과 용기의 이름이여
전자랜드 이루자 우리의 신화창조
블랙슬래머 승리의 파워전사여

해체 위기까지 몰렸던 빅스는 2003년 8월 6일 인수대금 30억 원의 조건으로 대한민국 굴지의 전자제품 전문 유통업체이자, 고려제강의 방계 회사인 전자랜드에 인수되었다. 2003년 10월 1일 63빌딩에서 인천 전자랜드 블랙슬래머 농구단이 창단식을 가지고 공식 출범했다. 마스코트는 코끼리다.[14] 전자랜드가 된 이후에도 3년 2개월 동안 부천실내체육관에 머무르다가 2006-07 시즌부터 홈 경기장을 새롭게 완공한 인천삼산월드체육관으로 이전했다.[15][16] 그런데 여기는 부천시 경계라는 것

2003-04 시즌에는 최명도, 조동현, 문경은을 필두로 한 3점 돌풍에, 최고의 만능용병 앨버트 화이트와, 센터 제이슨 윌리엄스를 주전으로 돌풍을 일으키며 팀 역사상 첫 4강 플레이오프 진출을 했으나 시즌 동안 유일하게 압도 당했던 TG삼보에게 패퇴했다.

유재학 감독이 떠나고 맞이한 2004-05, 2005-06 시즌은 두시즌 연속으로 최하위를 기록했다. 2004-05 시즌은 홈에서 14승을 기록하고도 원정에서 겨우 3승을 기록했으며[17] 특히 2005-06 시즌은 직전 시즌 최하위를 기록한 박수교를 단장으로 승격시키고 KBL 최초로 외국인 감독 제이 험프리스를 선임했으나, 3승 17패의 초라한 성적을 남기고 퇴진하는 등 시즌 내내 막장으로 흘러가고 압도적인 꼴찌를 하다가 결국 마지막 경기 승리로 8승 46패라는 참혹한 성적을 거두며 한 시즌 최다패 기록을 세웠다.[18] 평균득점이 81.5점인데 비해 평균실점이 무려 91.1점으로 평균득실차 -9.6이라는 참으로 어마어마한 수비력을 보여주었다. 당시 용병은 앨버트 화이트와 리 벤슨이 있었으나, 화이트는 부상과 불성실한 태도로 시즌 중 퇴출되었다. 리 벤슨은 득점력에선 독보적인 모습을 보였지만 팀 내에 잘 융화되지 못했고 동료들과 불화가 발생하기도 했으며, 화이트의 대체 선수였던 테픈 해밀턴과의 신장 합계가 제한치보다 초과되는 악재가 발생해 대구 오리온스의 안드레 브라운과 1대1 트레이드로 이적한다. 그리고 리 벤슨은 2006-07 시즌 개막 직전 야반도주하며 대구의 침몰을 알린다.

2006-07 시즌은 초반 반짝 3위에 오르는 등 돌풍을 일으켰지만 선수들의 뒷심 부족과 상급 용병이였던 키마니 프렌드가 시즌 아웃 되면서 무너지고 원주 동부 프로미와 동률을 기록하였으나 상대전적에 밀려 9위를 기록했다. 우승팀 모비스와 준우승팀 ktf에 동률을 기록했으나 최하위 전주 KCC와 8위 원주 동부에 상대전적에서 각각 2승, 1승밖에 못하는 바람에 참고로 탈락팀 합계 6승 12패, 중위권팀(4~6위) 9승 9패, 선두권(1~3위) 8승 10패로 강팀에는 강한 모습을 보여줬으나 약팀에는 버로우를 탔다. 그럼에도 최다연승이 4였고 최다연패도 4이었을 정도로 연패길이는 짧았지만 연승 횟수가 연패 횟수보다 적은 덕에... 시즌 도중 부천실내체육관에서 새로 준공된 인천삼산월드체육관으로 이전했다. 참고로 2006년 11월 26일에 열린 부천체육관 고별전은 LG와의 경기로 최명도의 은퇴식이 있었으며, 동점 버저비터 3점슛으로 연장에 돌입해서 연장에서 역전승을 하는 극적인 스토리로 마무리했다.[19] 부천에서의 정규리그 성적은 총 107승 100패. 2006년 12월 3일부터 인천삼산월드체육관을 쓰기 시작했다.

2007-08 시즌까지 4시즌 연속으로 플레이오프 무대에 전자랜드의 이름이 없었다. (10-10-9-7) 2007-08 시즌은 중위권 싸움이 치열해서 SK, LG와 함께 29승 25패를 했으나, 결국 SK와 LG에 3팀간 상대 전적에서 밀리면서 PO 진출에 실패했다. 승률 5할을 넘기고도 플레이오프에 가지 못한 보기 힘든 케이스다. 해당 시즌 3월 04일 SK와의 원정경기를 접전끝에 내준 것이 결정적이었다. 그 이후 상승세를 타게 되나 SK도 같이 상승세를 타며 막판 5연승을 하는 바람에 전자랜드는 3월 22일 SK가 KCC를 제압하면서 7위를 확정했다.

2008-09 시즌에는 초반에는 5할을 기록하다 중반에 6연패를 하여 같이 DTD를 기록한 오리온스 바로 위의 8위까지도 추락하는 등 분위기가 매우 좋지 않았다가 서장훈을 영입하는 대신 강병현을 내 주는 맞트레이드를 단행, 이후 5라운드에서 8연승 포함 전적 8승 1패를 기록하는 등 팀은 상승세를 탔고[20] 또 29승 25패를 기록, 창원 LG 세이커스안양 KT&G 카이츠와의 포스트시즌 경쟁 끝에 세 팀 모두 상대전적 합계까지 동률이 됐지만, 다득점에서 세 팀중 2위를 기록하며 최종 성적 6위로 LG와 함께 포스트시즌 막차에 합류했다. 3월 11일 KT&G와의 6차전에서 92-68로 대승한 것과 정규시즌 우승팀 모비스에 4승 2패로 앞선 것이 컸다. 그러나 포스트시즌 6강에서 전주 KCC 이지스에 총전적 2승 3패로[21] 4강 진출에 실패했다.

그리고 2009-10 시즌부터 블랙슬래머에서 엘리펀츠로 팀명이 바뀐다. 왜냐하면 사실 팀명 블랙 슬래머가 엉터리 영어였기 때문이다. 슬램덩크의 Slam에 ~하는 사람이라는 뜻의 '-er'을 붙여 Slamer이라고 이름을 붙였는데, 이렇게 쓰면 원래는 '슬레이머'라고 읽는 게 정상이다. 그리고 '슬래머'라는 발음을 가진 'Slammer'는 감방, 교도소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검은색 교도소 또한, 블랙(black)은 강인한 이미지를 표현하고 슬래머(slamer)는 '슬램 덩크(slam dunk)를 하는 사람'이나 '장거리 지상 공격 미사일', '그랜드 슬램(grand slam)'을 뜻한다.

6. 인천 전자랜드 엘리펀츠(2009~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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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대구 한국가스공사 페가수스(2021~ )

7.1. 2021-22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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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 2022-23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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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 2023-24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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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 2024-25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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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애초 1996년에 리그를 출범한다고 실업농구연맹이 발표했으니 감독이나 선수나 천천히 모아도 되었다.[2] 프로농구의 경우 프로야구와 달리 연고지 설정 과정에서 기업의 역사나 연고지가 대부분 고려되지 않았다. 그나마 모기업과 연고지의 밀접도가 높은 사례라면 수원에 연고를 뒀던 수원 삼성 썬더스 정도 뿐. 그러나 이 당시 인천은 대우그룹과 어느 정도 연고가 있던 곳이라고 볼 수 있다. 대우그룹 핵심 계열사인 대우자동차의 본거지가 인천 부평이었고 또 다른 대형 계열사 대우중공업 역시 인천에 사업장이 있었다. 그러나 프로 출범 전 전국체전이나 코리안리그에 출전할 때는 부산 대표로 나간 적이 있다.[3] 사실 인천시내에는 선인체육관이라는 매머드급 체육관이 있긴 했다. 그러나 체육관 내 농구코트가 2개씩이나 있는 등 전체적인 크기가 너무 커서 프로농구 경기를 열기에는 부적합하다는 단점이 작용해 경기장으로 선택되지 못했다. 선인체육관도화지구 개발을 위해 2013년 8월 폭파, 해체됐다.[4] 비슷한 시기 대우그룹 소유의 축구단이던 부산 대우 로얄즈 축구단도 현대산업개발에 팔려 부산 아이콘스라는 이름으로 바뀌게 된다.[5] 단 부천체육관은 인천광역시 부평구의 경계에서 그리 멀지 않다. 10분만 걸으면 바로 인천광역시이며 현재 사용 중인 삼산월드체육관부천실내체육관은 자동차로 10분 밖에 걸리지 않는다.[6] 역전패가 무려 16번이었다! 당시 모 시사 프로그램에서도 뒷심부족의 예로 이 팀을 거론할 정도로 ...[7] 역전패가 절반정도만 되었다면 성적은 달라졌을 것이다.[8] 이는 꼴찌팀 득실마진 중 가장 적은 수치이다. 2위는 16-17시즌 전주 KCC로(54경기 -116) 당시 신세기보다 0.059점 많았다.[9] 야구, 배구에도 같은 규정이 존재. 한 팀 지분이 있는 기업이 팀을 새로 창단하려면, 갖고 있던 지분을 매각해야 한다.[10] KBL 홈페이지에서 1999년 11월 ~ 2003년 3월 사이의 경기 결과를 보려고 하면, 둘 다 똑같이 SK로 나온다. 1999-2000 시즌부터의 기록이 이렇게 된 건 신세기의 기록이 SK 빅스로 인계되기 때문. SK가 두 팀과 경기하는 것은 물론, SK vs SK까지도 볼 수 있다!! 본격 나 vs 나 나를 한영변환하면 SK[11] 이때도 홈구장이 부천이었기 때문에 이 시기에 경기일정을 찾아보면 어떤 날에는 인천 SK와 서울 SK가 부천에서 경기를 하는 것도 볼 수 있다. 예시 경인선 대통합[12] 다만 와이번스는 SK에서 야구에 관심을 보여서 창단한 것이 아닌 쌍방울 레이더스의 해체로 인해 프로야구가 7개 구단으로 줄어들 위기에 처하자 정부에서 문화관광부를 통해 5대 그룹 중에서 유일하게 프로야구단이 없던 SK에 도와달라고 한 것을 받아들여 창단했던 팀이고, 결국 2020 시즌 종료 후 신세계그룹에 매각되어 SSG 랜더스가 되었다. 무엇보다 당시의 와이번스는 인천과는 접점이 희박한 옛 쌍방울 선수들이 중심이었던 데다 현대 유니콘스야반도주 여파로 인해 인천 팬들로부터 인기가 저조했던 점을 감안해야 한다.[13] 여담으로 빅스가 전자랜드에 매각된 지 18년이 지난 20~21시즌 종료 후 kt 소닉붐이 부산에서 kt wiz가 위치한 수원으로 연고지를 이전하면서 같은 그룹에서 운영하는 농구팀과 야구팀의 연고지가 동일한 사례가 다시 나오게 된다.[14] 전자랜드의 방계회사인 고려제강의 심볼 동물이 코끼리라고 한다.[15] 정확히 2006년 12월 3일 오리온스전부터 인천삼산월드체육관을 사용했다.[16] 여담으로 2000년대 초 코리아텐더라는 괴기한 이름을 지닌 농구단이 등장하면서 경기장 내 전광판에는 모기업 이름 대신 팀명으로 팀별 연고지 이름을 썼다. 문자 칸이 세 글자에 국한된 당시의 전광판 시스템 탓에 모기업 이름을 그대로 쓸 경우 코리아텐더는 '코리아'라는 이름을 쓸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졸지에 국가대표팀 취급 그런데 전자랜드만큼은 인천 팀이었음에도 부천체육관에서 경기를 했기에 '인천'이라는 이름을 홈경기 전광판에 새기지 못하고 '빅스', '슬래머'라는 명칭을 부천체육관 전광판에 새겨야 했다. 그러나 체육관 이전 이후에는 '인천'이라는 도시명을 새겼다.[17] 54경기 체제 이후 원정 역대 최저 승률(3승 24패)이다. 심지어 2005-06 시즌 원정 성적보다 나쁘다. 그 덕에 꼴찌 팀 중 홈 승률 5할 이상을 기록한 유일무이한 팀이 되었다.[18] 그리고 2017-18 시즌 부산 kt가 조동현의 삽질로 팀을 말아먹으며 기록을 경신할 가능성이 생겼지만 2승 차이로 실패했고 2021-22 시즌 서울 삼성도 2라운드 이후 5승 40패로 무너져 내렸으나 전자랜드의 2005-06 시즌 기록보다는 1승을 더 했다.[19] 그러나 그 경기가 2006-07 시즌 전자랜드가 LG를 이긴 마지막 경기였다. 창원에서 내리 3경기를 지고 6라운드에도 패배했다.[20] 5라운드 첫 KTF전부터 6라운드 KT&G전까지 12승 1패를 기록했다.[21] 1차전은 패배. 그래도 2,3차전을 승리하며 2승 1패했으나 4~5차전을 연패했다. 그리고 8년 후, 서울 삼성을 상대로 이것을 재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