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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17 00:14:19

닌토쿠 덴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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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제16대 천황
닌토쿠 천황
仁德天皇
파일:仁徳天皇.jpg
<colbgcolor=#bd0029><colcolor=#dca600> 출생 290년
사망 399년 2월 7일 (향년 108-109세)
능묘 모즈노미미하라노나카릉 (百舌鳥耳原南陵)
재위기간 제16대 천황
313년 2월 14일 ~ 399년 2월 7일 (85년 35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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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bd0029><colcolor=#dca600> 오호사자키(大鷦鷯)
한풍
시호
닌토쿠 천황(仁德天皇, 인덕 천황)
화풍
시호
오오사자키노미코토(大鷦鷯尊, 大雀命)[1]
오오사자키노스메라미코토(大鷦鷯天皇)[2]
나니와 덴노(難波天皇)[3]
부모 부친 오진 천황(応神天皇)
모친 나카쓰히메노미코토(仲姫命)
배우자 가쓰라기노 이와노히메(葛城磐之媛)
야타 황녀(矢田皇女)
자녀 리추 천황(履中天皇)
스미노에노나카쓰 황자(住吉仲皇子)
한제이 천황(反正天皇)
인교 천황(允恭天皇)
오오쿠사카 황자(大草香皇子)
구사카노하타비노히메 황녀(草香幡梭姫皇女)
황거 나니와노타카츠노미야(難波高津宮) }}}}}}}}}

1. 개요2. 행적3. 실존성4. 다이센 고분5. 왜5왕과의 관계6. 실제 기년7. 기타8. 가족관계

[clearfix]

1. 개요

일본의 제16대 천황.

당시의 황태자였던 이복동생 우지노와키이라쓰코 황자와 서로 천황의 자리를 양보했지만 나중에 황태자가 자살한 까닭에 천황의 지위에 올랐다. 오사카의 다카쓰궁을 도읍으로 삼았으며, 오사카 일대에 하천과 제방 공사, 둔창의 설치 등 많은 토목공사를 실시하는가 하면 백성들의 어려움을 살펴 세금 면제를 하도록 해 성군으로 추앙받았다. 일본 최대 규모의 전방후원분다이센릉 고분(大仙陵古墳)이 바로 그의 능일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2. 행적

닌토쿠 천황은 '인덕'(仁德)이라는 이름 그대로 어질고 덕이 있는 천황으로 전승되고 있다. 예를 들면, 저녁 무렵 밥을 지을 때가 되어서도 마을에서 연기가 피어오르지 않는 것을 지켜본 닌토쿠 천황은 백성의 곤궁함을 알고 3년간 세금을 면제하는 조치를 취해 백성들로부터 성제 · 성군이라고 칭송되었다. 또한 나니와(오사카)의 인공하천 공사, 간규 지역의 대규모 도랑 공사, 만다 지역의 제방 건설과 둔창의 설치, 요코미 제방의 축조 등 오사카 평야의 대대적인 개발과 농업 발전에 관련된 많은 전승을 남기고 있다.

한편으로, 닌토쿠 덴노에게는 성군의 이미지 이외에도 또 다른 모습이 전해지고 있다. 오토리 황녀에 대한 구혼이 이와노히메노미코토 황후의 방해로 이루어지지 않고, 황후의 심한 질투로 인해 고민하는 등의 인간적인 모습의 이야기가 바로 그것이다. 아울러 닌토쿠 덴노와 관련된 성군 전설은 허구에 지나지 않고, 실제로는 거대한 고분을 조영한 전제군주였다고 하는 견해도 있다. 이 밖에 닌토쿠 천황을 왜5왕 가운데 (讚) 왕 또는 (珍) 왕으로 추정하는 설이 있으며, 닌토쿠 왕조의 개조(開祖)로 보는 설, 오진 덴노와 닌토쿠 덴노를 동일 인물로 보는 설 등 다양한 견해가 있다.

3. 실존성

재위 기간이 비현실적으로 길어 실존성을 의심할 수도 있으나 그의 시호는 제26대 게이타이 천황의 시호와 마찬가지로 고유의 시호이며, 전해지는 여러 내용들로 보아 실존인물임이 거의 확실시되고 있다. 게다가 후임인 리추 천황부터 갑자기 재위기간이 현실적으로 짧아지기에 닌토쿠 천황도 실존인물일 가능성은 충분하다. 보통 실존인물로는 보이는데 수명이 비정상적으로 길게 기록된 고대 군주의 경우에는, 후대에 왕실 족보 정리 과정에서 정통성 강화를 위해 혈통이 다르다던지 여러 군주들의 기록을 제거하고 한 군주에게 기록을 몰아줘서 수명이 매우 길게 왜곡된걸로 추정하는게 일반적이다.

오사카 지역과 관련된 여러 전설이 내려오고 있으며, 그의 능이 오사카에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것을 볼 때 오사카 일대 출신으로 추측된다.

4. 다이센 고분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NintokuTomb.jpg

오사카부 사카이시에 있는 일본에서 가장 큰 고분인 다이센 고분(大仙古墳/大仙陵古墳)은 닌토쿠 천황의 무덤으로 여겨진다.[4] 닌토쿠 천황의 부인인 이와노히메 황후의 무덤은 나라시의 사키초(佐紀町)에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두 고분의 특징은 열쇠구멍 모양을 했고, 물로 채운 해자로 둘러싸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무덤을 전방후원분이라고 한다.

천황의 무덤은 황실과 관련된 업무를 관할하는 궁내청에서 관리한다. 궁내청에 따르면 천황의 무덤은 단순히 역사적인 유물이 묻힌 장소가 아니라 신성한 종교적 장소이다. 궁내청은 각각의 무덤들을 조상들의 영혼을 위한 성역으로 해석한다.

2020년 12월 기준 다이센료 고분의 모습. 고분 내부로는 입장할 수 없기 때문에, 공원길과 비슷한 분위기이다. 다이센 고분은 유네스코 세계유산모즈·후루이치 고분군의 일부이기도 하다.

5. 왜5왕과의 관계

오진 덴노~부레쓰 덴노까지 이어지는 야마토 제2왕조는 너무 부풀려서 문제인 제1왕조와 제2왕조의 닌토쿠 덴노를 제외하면 반대로 지나치게 재위기간이 짧거나 늘어지는 양상을 보인다.

보면 알겠지만 척 봐도 부자연스러운 느낌이 난다. 북이스라엘 왕조나 웅진백제 시절처럼 왕들이 늘 살해당한 것도 아니고 5-4-41-2-23-4-2-10이 사망을 통한 정상적인 상속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심지어 고사기에는 리추의 사망을 일본서기보다 27년 뒤로 잡아서 세이네이~부레쓰까지의 재위기간이 사라져 있으며, 이들은 실제로 실존 여부에 논란이 있고 특히 세이네이와 부레쓰가 실존 논란이 크며, 타시라카 황녀[6] 때문에 실존 가능성이 있는 닌켄은 실존했더라도 야마토 대왕이 아니라 당대 야마토에 소재한 많은 호족(왕)들 중 하나에 지나지 않았을 것으로 보고 있다.

송서로 확인되는 왜5왕의 즉위기간은 이렇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리추-한제이-인교가 형제(닌토쿠 아들)고 안코-유랴쿠가 형제인데(인교 아들)인데 송서의 왜5왕은 찬-진 형제, 제-흥&무 아들임이 확인되기 때문에 즉위 년도에 차이가 있어도 왜5왕은 대체로 리추~유랴쿠로 여겨진다. 일본서기와 고사기의 심각한 기년 왜곡을 감안하면 송서에 나오는 재위기간이 사실일 가능성이 더 높은데, 고대 중국 기록이 한반도 왕의 가족관계에 오류 낸 적은 많아도 기년은 정확한 편이기 때문이다.[7]

5세기 대왕들의 재위기간을 상고하기 어려운 것은 일본서기와 고사기 기록이 워낙 난잡하게 되어 있어 조정하기 힘들고, 세이네이, 겐조, 닌켄이 대왕이 못 되었을 뿐 왕으로서 동시대에 왜5왕과 함께 실존한 것이 맞을 가능성도 적지 않기 때문이다. 신라가 박씨-석씨-김씨 왕조를 별개로 존재한 것마냥 200년의 기년 인상을 저질러 왜곡했지만 가족관계를 자세히 남겨둔 덕분에 세대를 상고해서 박씨-석씨, 석씨-김씨 왕조가 신라 초기 6부 체제 속에서 동시대에 병존했다는 것이 밝혀졌듯 세이네이, 겐조, 닌켄 또한 초기 신라의 석씨 왕조마냥 제2왕조 주류인 왜5왕과 별개로 동시대에 병존할 수 있기 때문이다.

5세기 야마토 대왕위는 당대 신라 왕이 6부에 속한 수많은 간(干)의 대표였듯 당대 키나이(畿內) 일대를 중심으로 소재하던 호족(왕)들의 대표였다. 또 박씨-석씨-김씨 왕조도 단일화된 게 아니라 3세기 초~6세기 초까지 한 씨족 안에서도 여러 분파로 나뉘어 여러 간들이 동시에 병립하는 양상을 보인다. 따라서 야마토 제2왕조 또한 내부적으로 여러 분파로 나뉘어 동시에 왕들로 존재하는 것이 가능하다.

신찬성씨록 항목에도 나오는 사항인데, 고대 일본의 씨족 개념은 실제 혈연관계보다 정치적 의도를 강하게 반영하고 있다. 이들은 시조로부터 비롯된 직무의 세습을 바탕으로 결합했으며, 중국식 성리학의 영향을 받은 고려 이후 한국의 족보와 같은 부계 족보 관념은 일본 고대 사회에서 통하지 않았다. 씨족 수장의 지위가 반드시 아버지에서 아들로 전해지지 않았으며, 방계 친족 혹은 사위까지 포함하는 넓은 범위에서 이루어진 경우도 있었다. 일본 고대 성씨의 중요한 기능은 직위와 직능의 기원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이런 고대 일본의 씨족 개념은 초기 신라, 가야 사회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현상으로 야마토의 명칭법이 고구려, 백제보다 신라, 가야의 명칭법에 훨씬 가까운 것에서도 드러난다.

신라에서는 혁거세 거서간의 부계 후손인 박씨 왕조뿐만 아니라 모계 후손인 석씨 왕조와 김씨 왕조도 스스로를 혁거세의 후손으로 인지하며 혁거세의 제사를 지냈다. 그리고 김씨 왕조는 석씨 왕조의 모계 후손으로서 탈해 이사금의 제사도 지냈다. 고대 일본의 씨족 관념과 인칭법은 백제보다는 신라, 가야와 더 유사한데, 신라 3왕성(王姓)의 이런 특성을 감안하면 제1왕조(스진 덴노~스이닌 덴노)[9], 제2왕조(오진 덴노~유랴쿠 덴노), 제3왕조(게이타이 덴노~현대)까지의 만세일계가 사서에 나온 대로 부계 후손이라 보장할 수 없고 양자, 사위, 외손, 봉사손 등이 후세에 만세일계로 묶는 과정에서 아들로 조작되었을 수도 있다는 뜻이다.[10]

6. 실제 기년

일본서기에 따르면 닌토쿠는 290년생으로 313년부터 399년까지 즉위해 세는나이로 110살까지 살았다고 한다. 누가 봐도 조작한 티가 난다. 닌토쿠 덴노의 실제 활동 기간은 고고학적으로 4세기 후반에서 5세기 초반으로 추정된다.

카츠라기노 소츠히코 항목에 따르면 닌토쿠 기의 한반도 관련 이주갑인상은 대체로 1갑자(60년) 인상한 것으로 여겨지지만, 문제는 한반도 관련 기사를 보면 특정한 사건만 늘어놓거나 '천황'이라는 호칭만 나와 그 '천황'이 닌토쿠 본인이 맞는지, 아니면 다른 대왕인지, 심하면 동시대 야마토에서 병존한 많은 왕'들' 중 하나인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이 점은 오진 덴노 또한 마찬가지다. 오진 덴노는 생년의 간지가 기록되지 않은 대신 경인년에 즉위했다고 명시하는데, 4세기 경인년은 330년과 390년이기 때문에 330년과 모종의 관련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일본서기에서는 주아이 9년(9권) 또는 진구 원년(10권)에 호무타가 태어나 주아이가 사망한 다음 해 진구 황후가 황태후가 되고 섭정을 해 '진구 원년'이 되었다고 하는데, 이를 호무타의 생년이라 해석하면 호무타는 329~330년생이 된다.

오진 덴노는 대체로 4세기 중후반에 활동한 인물로 여겨지는데, 367년 '호무타와케노 스메라미코토'라는 이름으로 백제와 신라 사신들을 접견하고 신라 사신과 대화하는 행적과[11] 고사기에서 근초고왕 재위기(346년 9월~375년 11월)에 백제 박사 왕인을 데려와 태자 우지노 와키이라츠코의 스승으로 삼는 등 360년대~370년대 활동이 확실시된다.[12] 또 오진 40년(309) 어린 우지노 와키이라츠코를 태자로 삼았다고 하는데, 330년에서 39년을 더하면 369년이 되어 374년 아직기가 태자 우지노 와키이라츠코의 스승이 되고, 375년 왕인이 태자 우지노 와키이라츠코의 스승이 되는 것이 가능하다. 따라서 오진은 실제로 329~330년에 태어나 4세기 중후반에 주로 활동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 뒤에 나오는 이주갑인상이 사건만 늘어놓거나 '천황'으로만 나와 전부 오진의 행적이라 장담할 수 없다는 문제가 있지만, 417년 고구려 왕이 고압적인 내용의 서신을 보내자 태자 우지노 와키이라츠코가 분노해 서신을 불태웠는데[13] 이 사건에서 '천황'은 일체 등장하지 않으며 우지노 와키이라츠코만 언급기 때문에, 실제로는 일본서기의 기록과 달리 오진 사후 대왕위가 나니와의 대호족이었던 닌토쿠에게 넘어갔을 뿐, 호족(왕)의 일원으로서는 417년까지 살아있었을 수도 있다.[14] 이 경우 오진 재위기에 나오는 기사 상당수가 우지노 와키이라츠코와 합쳐졌다는 추측이 가능하다.

닌토쿠로 돌아가면, 닌토쿠는 즉위년의 간지가 기록되어 있지 않은 대신 계유년에 태어났다고 기록되어 있다. 4세기 계유년은 313년과 373년이나, 닌토쿠 덴노는 3세기 후반부터 활동한 것으로 여겨지며 369년에 우지노 와키이라츠코가 태자로 삼기 며칠 전 닌토쿠 덴노가 "큰아들은 성인이지만 작은아들(우지노 와키이라츠코)은 아직 성인이 아니다"라고 말한 것이 부자연스럽다. 따라서 373년은 닌토쿠가 즉위한 해일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오진 덴노가 그렇듯이 닌토쿠 덴노 또한 자신의 후대의 기록과 합쳐졌을 수도 있다. 닌토쿠의 한반도 관련 기사는 주로 1갑자(60년) 인하되어 있는데, 58년(370) 10월 고구려가 사신을 보냈다는 기록이 마지막이다. 해당 사건을 1갑자 인하하면 430년이 되는데, 장수왕처럼 53년 재위했다기보다는 닌토쿠의 후계자의 기록과 섞인 것이 아닌가 의심스럽다.

닌토쿠 덴노는 실제로는 오진 덴노의 아들이 아니라 나니와(難波) 일대를 근거지로 둔 대호족 출신이며, 리추, 한제이, 인교 덴노도 실제로는 아들이 아니라 다른 곳에서 기원한 대호족 출신으로, 만세일계 편찬 과정에서 부자로 삽입된 것으로 추정된다.[15][16]

닌토쿠 2년(314) 3월 8일 기사에 따르면 닌토쿠의 자식은 카츠라기노 소츠히코의 딸인 황후 이하노 히메노 미코토(磐之媛命)의 아들 한제이, 스미노에노 나카 황자(住吉仲皇子)[17], 한제이, 인교와, 오진 덴노기 기사에서 오진이 히무카(日向) 제일의 미녀라는 말을 듣고 후궁으로 삼았다가 닌토쿠에게 준 히무카노 카미나가히메(日向髮長媛)의 아들인 오호쿠사카 황자(大草香皇子)와 하타비 황녀(幡梭皇女)가 있었다.

스미노에노 나카 황자는 닌토쿠 사후 리추 덴노를 죽이려다 리추의 동생 한제이에게 살해당했으며, 오호쿠사카 황자는 안코 원년 2월 1일 하타비 황녀를 남동생 유랴쿠에게 짝지어주려고 혼사를 요청했고 오호쿠사카 황자는 요즘 자신은 중병이 있어 하타비 황녀를 두고 죽는 게 걱정이었는데 잘됐다며 받아들였다. 그런데 중매를 맡은 네노 오미(根使主)가 오호쿠사카 황자의 보물을 탐내 안코에게 거절했다 거짓말했고, 이에 안코 덴노는 오호쿠사카 황자를 죽이고 처 나카시히메(中蔕姬)를 NTR했으며 하타비 황녀를 동생 유랴쿠에게 주었다. 당시 나니하노 키시(難波吉師) 히카카(日香蚊) 부자는 모두 오호쿠사카 황자를 섬기고 있었는데, 오호쿠사카 황자가 억울하게 죽자 아버지는 왕의 목을 안고, 두 아들은 각각 왕의 발을 잡고서 슬퍼하며 스스로 목을 베어 자살하였다. 이 사건은 갑오년(454년)에 일어났다.

안코는 나카시히메를 총애하여 2년 1월 7일 황후로 삼았는데, 나카시히메는 오호쿠사카 황자와의 사이에서 마요와 왕(眉輪王)이 있었지만 어머니 덕분에 살아남았다. 그러나 안코 3년 8월 9일, 안코는 마요와 왕에게 살해당했고, 유랴쿠는 마요와 왕은 물론이고 친형들인 야츠리노 시로히코 황자(八釣白彦皇子), 사카아히노 쿠로히코 황자(坂合黑彦皇子), 리추 덴노의 아들들인 이치노베노 오시하 황자(市邊押磐皇子), 미마 황자(御馬)를 죽이고 즉위하였다. 그리고 다음 해 즉위하여 3월 3일, 쿠사카노 하타비 황녀를 황후로 삼았다.

송서 왜왕 무(武)가 478년에 송(宋)에 보낸 국서에 따르면, 477년 아버지(인교)와 형(안코)이 갑작스레 죽어 둘의 장례를 치르고 있다고 언급한다. 따라서 오호쿠사카 황자가 죽고 23년 뒤에 마요와 왕이 안코를 죽였음을 유추할 수 있다. 그런데 왜5왕 기록에 따르면 인교는 안코에게 생전 양위했으며, 안코가 즉위한 해는 462년이라 이 사건은 인교 재위기에 일어난 일로 보인다.[18]

스미노에는 오사카시 스미노에구를 말하며, 오호쿠사카 황자가 억울하게 죽자 오호쿠사카 황자의 가신이었던 나니하노 키시 히카카 부자가 동반자살했다는 일화를 보아 이들은 나니와 일대가 근거지임을 유추 가능하며,[19] 나카 황자는 5세기 초반에 죽은 걸로 추정되며, 오호쿠사카 황자는 454년에 죽었기 때문에 닌토쿠 사후 5세기 초중반의 재위기간 상당수는 실제로는 오호쿠사카 황자의 재위기간과 합쳐진 것으로 보인다. 쿠사카노 하타비 왕녀는 452년에 유랴쿠 덴노와 혼인한 것과 오호쿠사카 황자가 혼사를 주관하는 것으로 보아 오호쿠사카 황자의 여동생보다는 딸일 가능성이 높아 보이며, 나카시히메가 오오쿠사카 황자의 부인이 맞다면 나이 들어 들인 후처였을 가능성이 높다.

7. 기타

금관가야와 고대 야마토 왕권의 관계를 추적한 최인호의 소설 《제4의 제국》에서도 인덕(닌토쿠)릉이 등장한다. 최인호에 따르면 해당 무덤은 메이지 시대인 1872년 9월 7일에 불어닥친 폭풍우로 봉분 토사가 붕괴되어 묻혀 있었던 석관이며 부장된 유물들이 바깥으로 노출되었으며, 그때 궁내청 소속의 화가가 사카이 현령의 명령을 받아 당시 노출된 석관과 출토된 유물들을 그린 그림이 남아 있다.

나온 유물 중에는 갑주나 무기는 물론 페르시아산 유리잔도 있었다고 한다. 나온 유물들은 조사 뒤에 다시 원래 봉분 안에 넣었는데, 그 와중에 환두대도, 삼환령, 칠자경 등 유물 4점이 유출되어 1906~07년 사이에 오카쿠라라는 일본인 손으로 들어갔고, 지금은 미국 보스턴 박물관에 소장되었다고 한다. 해당 유물들의 사진이 사카이 박물관에 걸렸는데 '전(傳) 인덕릉 출토품'이라는 표제가 붙었다고 한다.

위 설명은 마치 최인호의 소설에 쓰였으니 근거 없는 창작인 양 설명했지만, 실제로 2007년 KBS <제4의 제국 가야>라는 프로그램에서 최인호가 보스턴 박물관에 직접 방문하여 환두대도, 삼환령, 칠자경, 청동거울을 확인하여 영상기록으로도 남겼다.

그리고 위에서 1872년 폭풍우가 불어닥쳐 유물들이 노출되었고 오카쿠라라는 일본인의 손에 들어가 미국으로 오게 되었다고 설명한 내용은 최인호가 창작한 것이 아니라 보스턴 박물관의 Joe Earle이라는 미국인이 직접 설명한 부분이다.

"우리가 확실하게 알 수 있는 것은 이것들이 모두 일본에서 왔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확실하게 알 수 있는 것은 그뿐입니다. 1872년에 인덕천황의 무덤에 산사태가 발생했는데 그 때까지만 해도 아무도 이 지역을 건드린 사람이 없었습니다. 즉 1,400년 동안 무덤은 거의 어떤 이의 손도 타지 않았다가 갑자기 1872년 보호를 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다 산사태가 발생했고 이틈을 타서 몇 개의 유물들이 무덤에서 나오게 된 것입니다. 대부분의 것들은 다시 무덤 안으로 돌려놓았습니다. 그러나 이 다섯 개의 유물들은 밖으로 유출되었고, 오카쿠라의 손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오카쿠라는 돈을 주고 일본, 중국 특별 기금을 이용해 1906년 후반 1907년 초반에 이 유물들을 구입하게 되었습니다."(전문)


'인덕의 조야릉에서 나온 것으로 보이는 석관의 개석(蓋石)이 사카이 만도코로(政所) 정원의 답석으로 쓰이고 있었다.'
는 에도 시대의 아라이 하쿠세키의 전집 기록을 제시하며, 이전에 무덤은 한 번 도굴당했던 적이 있으며 범인은 도요토미 히데요시라고 추정했다.[20]

8. 가족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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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고사기》.[2]일본서기》.[3] 《만엽집》.[4] 닌토쿠 천황의 고분이 아니라 비슷한 시기의 토착 세력의 고분이라는 추측도 있다.[5] 부레쓰가 유랴쿠와 동일인물설이 강하게 제기되기 때문에 부레쓰가 유랴쿠와 동일인물일 경우 유랴쿠의 재위기간은 32년이 된다.[6] 게이타이 덴노의 왕후로 닌켄의 딸이자 유랴쿠의 외손녀라 전해진다.[7] 물론 중국 기록이라고 오류가 없는 건 아니라 가끔 오류가 나기도 하는데, 고대 한국사 이상으로 정확한 모습도 많고 특히 왜 기록으로 가면 게이타이 이전은 그냥 답이 없는 수준이다. 이주갑인상이라는 기준이 있기는 하지만 이것도 한반도 관련 기록과 대조되는 경우지 1갑자만 인하하거나 5세기 국내 기록으로 가면 기준도 없이 아무렇게나 구겨져 들어간 경우가 허다하다.[8] 413년 조공한 정체불명의 왜왕도 찬일 경우 25년 이상이 된다.[9] 게이코, 세이무, 주아이는 실존 논란이 있으며, 특히 주아이가 실존 가능성이 낮다고 여겨진다. 다만 시대 배경을 고려하면 게이코, 세이무는 대왕이 아니었을 뿐 왕으로서 실재했을 가능성은 있다.[10] 비슷한 사례가 백제에 있는데, 초기 백제 왕조는 초고왕계와 고이왕계가 별개로 존재했고 근초고왕 대에 와서야 초고왕계로 일원화되었음에도 두 가계를 친부자, 친형제 등으로 하나로 묶어 왜곡했다. 아예 남은 아니고 고구려 시조 추모왕소서노의 후손이 온조-초고왕계고, 부여 시조 해부루의 후손인 우태와 소서노의 후손이 비류-고이왕계라 초고왕계와 고이왕계는 먼 친족이지만,(고구려 시조 추모왕이 부여 시조 동명왕의 후손이다. 즉, 이들은 부여 해씨 왕조로부터 부계 조상을 공유하는 친족이다) 초기 백제 사서에 나오는 초고왕계, 고이왕계를 묶어 친부자나 친형제로 나오는 건 왜곡이 맞다.[11] '태자'라는 이름으로 나오기는 하지만 진구 13년 세는나이 13~14세가 된 호무타가 츠누가에 참배하고 돌아와 연회한 뒤 바로 다음에 나오는 게 진구 46년 왜 사신 백제 접촉, 진구 47년 호무타와케노 스메라미코토가 진구 황태후와 함께 백제와 신라 사신을 접견함으로 넘어간다. 따라서 당시 호무타가 성년이었음을 유추할 수 있다.[12] 285년 2월에 왕인을 데려왔다 하는데, 이주갑인상하면 405년 2월이 되지만 여기서 30년 인상하면 375년 2월이 되어 근초고왕 재위기가 된다.[13] 왜가 백제의 용병으로 고구려와 충돌하기 시작한 건 빨리 잡아도 394년 이후부터라 387년일 가능성은 낮고 417년일 가능성이 높다.[14] 이 경우 우지노 와키이라츠코가 태자가 된 369년에 어렸다 하더라도 417년 당시에는 48년이라는 세월이 흘렀기 때문에 제법 나이가 많았을 가능성이 높다.[15] 리추 덴노의 근거지는 현 나라현 사쿠라이시 일대인 이와레(磐余), 한제이는 카와치(河內) 타지히(丹比), 인교는 미에현 아사츠마(朝津) 또는 돗토리현 아사즈마(淺津)이다. 다만 한제이 사후 호족들이 대왕으로 추대했다 사서에서 명시된 인교와 달리 리추-한제이 형제는 송서 왜5왕에서 형제라 명시하여 근거지가 달라도 친형제가 맞을 가능성은 있다.[16] 오진과 아예 남이라기보다는 오진의 두 부인(타카키노 이리비메, 이토히메)의 자매(나카츠히메)의 아들로 처조카였던 것으로 추정된다.[17] 스미노에(住吉)는 오사카시 스미노에구를 말한다.[18] 장남 키나시노 카루 황자가 동복동생인 카루노 오오이라츠메 황녀와 근친상간하니까 계승권 박탈했으면서 이게 뭐냐 싶긴 하지만, 키나시(木梨)가 현 효고현 가토시 일대이며, 사서에서 키나시노 카루 황자가 인교 사후 안코 덴노와 대왕 자리를 두고 싸우다 패배해 이요(에히메현)로 유배 가 카루노 오오이라츠메 황녀와 동반자살했다 전해지지만 정작 송서에서는 인교가 안코에에게 생전 양위했다 기록된 것으로 보아 실제로는 친아들이 아닌 걸로 보인다.[19] 오호쿠사카 황자는 오진 덴노기의 기록대로 친아들이 맞을 가능성이 높고, 스미노에도 나니와 일대에 속하기 때문에 나카 황자는 스미노에의 호족일 수도 있고 친아들이 맞을 수도 있다.[20] 소설에서는 1684년 사카이에서 발간된 가장 오래된 지리지라는 《계감》(堺鑑)의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이따금 이 능에 들러서 대규모의 사냥을 했으며, 또한 많은 사람들과 다회(茶會)를 베풀었다."라는 기록을 그 증거로 제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