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종건의 역임 직책 | ||||||||||||||||||||||||||||||||||||||||||
|
전북 현대 모터스 스카우트 | ||
<colbgcolor=#034f36> 이름 | 노종건 Roh Jong-Kun | |
출생 | 1981년 2월 24일 ([age(1981-02-24)]세) 경상남도 밀양군 무안면[1] | |
국적 | 대한민국 | |
신체 조건 | 175cm, 70kg | |
포지션 | 수비형 미드필더 | |
소속 | <colbgcolor=#034f36> 선수 | 인천 유나이티드 FC (2004~2010) 서울 노원 유나이티드 FC (2011) 양주시민축구단 (2012) |
프런트 | 성남 FC (2017~2019 / 스카우트) 전남 드래곤즈 (2019 / 스카우트) 전북 현대 모터스 (2021~2022 /스카우트) | |
별명 | 노지우개 |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의 전 축구선수로, 현역 시절 포지션은 수비형 미드필더였다.
2. 클럽 경력
2.1. 유소년 시절
경상남도 밀양 출신으로 이후 서울로 이사와서 축구를 배우기 시작했다. 용두초등학교, 경희중학교, 경희고등학교를 거쳐 인천대학교에 진학했으며 인천대의 전국체전 우승을 이끈 주축 멤버로 활약했다.2.2. 인천 유나이티드
인천대학교를 졸업한 직후 갓 창단된 인천 유나이티드의 신인으로 지명되었다. 인천 지역 선수들을 주로 노리던 기조가 있었는데, 노종건 역시 인천대학교를 나왔기 때문에 그 범주에 들어가는 선수였다.첫 시즌 초반에는 신인이었기에 기회를 잡지 못했지만, 후기 리그로 접어든 이후 선발로 나서면서 스쿼드 멤버로 도약했다. 투지 넘치는 플레이와 활동량의 소유자로 눈도장을 찍었고, 장외룡 감독 역시 그를 믿어줬다. 2004 시즌 출전 기록은 리그 7경기, FA컵 1경기까지 총 8경기 출전.
2005년에는 이전 시즌보다 더욱 많은 출전 기회를 얻었다. 당시 성적이 좋았던 인천에서 노종건은 홀딩 미드필더 역할로 중용받았고, 나온 경기에서도 인상적인 모습을 보여줬다. 5월 광주 원정에서 프로 데뷔골도 터뜨렸고, 경기력도 크게 발전했다. 챔피언 결정전 2차전에서는 무려 이천수의 마크맨으로 나서서 훌륭한 경기를 펼치기도 했다. 시즌 중반부터는 확고한 주전 멤버로 분류되었고, 인천 팬들 사이에서의 인지도도 크게 오른 때이다. 2005 시즌 출전 기록은 리그 22경기 1득점, 리그컵 8경기, FA컵 2경기 등 총 32경기 1득점.
2006년에도 인천의 주축 미드필더로 활약을 이어나갔다. 팀의 성적은 전 해보다 나빴지만, 선수 개인으로는 계속해서 발전하면서 예전보다 공을 다루는 능력도 좋아졌다는 평을 받았다. 시즌 종료 후 결혼에도 성공하면서 의미가 깊은 한 해를 보냈다. 2006 시즌 기록은 리그 18경기, 리그컵 10경기, FA컵 2경기까지 총 30경기 출전.
2007년에는 등번호를 4번으로 옮겼지만, 시즌 초 컨디션 난조로 인해 출전 기회를 받지 못했다. 시즌 중반으로 접어들면서 서서히 출전 시간이 늘어났고, 전반적으로 매우 공격적이었던 당시 인천에서 수비를 돕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패스 등 전개도 전보다 상당히 발전하며 인천에서 빼놓을 수 없는 선수라는 평을 들었다. 2007 시즌 기록은 리그 15경기, 리그컵 8경기, FA컵 2경기 1득점으로 총 25경기 1득점.
2008년에는 시즌 시작 전에 포항 스틸러스 이적설이 나오는 등 거취가 주목받았지만 결국 잔류했다. 이후 초반부터 인천의 주전급 멤버로 활약했다. 시즌 중반 주장이었던 임중용이 스트레스로 인해 실신하는 상황이 벌어지자, 남은 시즌을 이끌 새로운 주장으로 선임되어 팀을 이끌었다. 2008 시즌 기록은 리그 20경기 2도움, 리그컵 3경기 등 총 23경기 2도움.
그러나 2009년에는 다소 입지가 흔들렸다. 주장 완장을
결국 2010년에는 완전히 전력 외로 밀려났다. 신인 이재권의 입단과 정혁의 본격적 성장이 겹치며 주전 경쟁도 어려웠고, 부상이 겹쳐서 몸 상태 역시 좋은 편은 아니었다. 1년 내내 리그 2경기 출전에 그친 노종건은 시즌 종료 후 재계약이 불발되면서
부상만 없었다면 충분히 인천의 원클럽맨으로 남을 수 있던 선수이기에 아쉬움을 표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만큼 노종건은 오랜 기간 인천을 위해 헌신한 선수이고, 김이섭, 전재호, 임중용만큼은 아니지만 인천의 레전드를 논할 때 자주 언급되는 선수이기도 하다.
인천을 떠난 후 SNS에서 인천의 상황에 대한 안타까움을 표시하기도 했다. 좋은 선수를 데려오겠다고 기존 선수를 다 내쳤지만 성적은 오히려 나빠졌고, 팬-선수까지 모두가 잘 지내던 분위기가 불과 2년만에 무너졌다는 비판도 있었다. 인천에서 방출되던 당시 알려지지 않았던 갈등도 있던 듯.
2.3. 선수 생활 말기
군 문제가 아직 해결되지 않았던 노종건은 공익근무요원으로 생활하면서 서울 유나이티드에 입단해 활동했으나, 부상을 당하면서 팀을 떠났다. 이후 2012년 양주시민축구단에 입단한 것을 마지막으로 선수 생활을 정리했다.3. 플레이 스타일
전형적인 홀딩 미드필더로 평가받았다. '노지우개'라는 별명이 있을 정도로 상대 선수를 마킹하는 데 주력한 선수.수비 기여도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선수였다. 당대 K리그 최고의 크랙인 이천수, 박주영, 히칼도 등을 전담마크했고, 그때마다 대부분 큰 성과를 거두는 등 전술적인 중요도가 굉장히 좋은 선수였다. 활동량도 높고 체력도 좋아서 경기장 구석구석을 누비는 모습을 자주 보여줬다. 상대와 마주치면 거친 몸싸움도 불사했기에, 체격 조건은 작은 편이었지만 중원에서의 존재감이 상당히 좋았다.
반면 기술 및 공격적인 면에서는 다소 부족했다. 특히 프로 데뷔 초창기에는 전진패스가 단점으로 꼽혔고, 다른 중원 파트너들을 위해 뒤를 청소해주는 느낌의 선수로 기용되었다. 그래도 장외룡 감독의 지도를 받으면서 점차 여유를 찾았고, 시야가 트이면서 전개 능력이 발전했다. 물론 장점이라고 부를 정도는 아니었지만 의외의 장면을 연출한다거나, 공격적으로 기여하는 모습이 늘어났다. 드리블이나 침투 등도 해가 지날수록 적극적으로 수행했다.
4. 지도자 경력
은퇴 이후 처음에는 노종건축구교실을 열어 유소년 축구계에서 활동했고, 2017년부터 성남 FC의 스카우터로 활동했다. 이후 2019년에는 전남 드래곤즈의 스카우터가 됐다.5. 여담
- 성경모와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를 같이 나와서 정말 친한 사이였다.
- 평소 조용히 혼자 일과를 보내기를 좋아하는 성격이면서, 동시에 지는 것을 정말 싫어하는 편이다. 무언가 지고 방에 들어오면 표정만 봐도 모두가 알 정도였다고.
[1] 現 경상남도 밀양시 무안면[2] 팀의 준우승을 함께 한 멤버로 한때 준수한 기량을 보여준 골키퍼였지만, 부상 이후 폼이 하락했다. 이후 승부조작에 연루되면서 2011년을 마지막으로 축구계를 떠났다.[3] 타 팀으로 떠나지 않고 은퇴를 결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