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ki style="margin:0 -10px -5px" {{{#fff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1d1d1d,#e2e2e2 | 고대 | 슬라브 / 루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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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노브고로드 Господинъ Великiй Новгородъ Gospodin Velikij Novgorod | |||||
국기 | |||||
1136년 ~ 1478년 | |||||
성립 이전 | 멸망 이후 | ||||
키예프 루스 | 모스크바 대공국 | ||||
<colbgcolor=#870100> 위치 | 동유럽 | ||||
수도 | 노브고로드 | ||||
정치체제 | 귀족공화제 | ||||
국가원수 | 크냐즈 | ||||
주요 공작 | 알렉산드르 넵스키 | ||||
언어 | 노브고로드 동슬라브어 | ||||
민족 | 일멘 슬라브, 루스인, 코미인 | ||||
왕조 | 류리크 왕조 | ||||
국교 | 러시아 정교회 |
언어별 명칭 | ||
고대 교회 슬라브어 | Новгородскаѧ земьлѧ (Novgorodskaję zemlę) | |
러시아어 | Новгоро́дская респу́блика (Novgorodskaya respublik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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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멘호에 있던 상업도시 노브고로드를 수도로 한 중세 루스의 귀족공화국으로 북 러시아의 모피를 무역하면서 1136년부터 모스크바 대공국에 흡수된 1478년까지 존속했다. 몽골 제국의 파괴로부터 무사했던 몇 안되는 키예프 대공국 도시 중 하나다.2. 체제
본디 크냐즈가 지배하는 '노브고로드 공국'이었으나, 네바강 하구와 연결된 발트해 덕분에 상업이 발달해 러시아의 민회라 할 수 있는 베체와 시민들의 입김이 강한 편이었다. 1136년에는 결국 시민들이 공작을 추방하고 시민의 이름으로 노브고로드 대주교를 선출할 권리를 얻어내는 등 공화정화가 이루어져, 그 중세시대에 시민이 공작, 시장, 대주교를 투표로 선출했다.[1] 노브고로드 공작은 사실상 이름만 공작이지 봉토같은 걸 따로 소유할 수 없고, 시에서 나오는 급여로 생활했으며, 국가수반의 지위와 군사령관의 지위를 지니는 정도였다.3. 역사
노브고로드는 키예프 루스 시절에도 수도격인 키예프의 중앙집권화에 대항하는 가장 강력한 반대파 집결지였다.[2]페이푸스 호에서 우랄에 이르는 북부 러시아 전역에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한 때는 모스크바 대공국과 패권을 다투었다.
988년 키예프의 대공 블라디미르 1세가 정교회로 개종한 후, 그리스도교는 새로운 국가통합수단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1132년경 키예프 대공가의 분열로 블라디미르-수즈달, 갈리치아-볼히니아, 노브고로드 등 여러 도시국가가 독립하면서 키예프 공국은 크게 쇠퇴하기도 하였다. 독립 당대의 인구수는 3만명 이상이었다고 한다.
1238~40년의 타타르-몽골 제국의 침공 때에는 한겨울부터 지금의 러시아에 침략한 몽골제국이 이곳저곳을 박살내는 사이 노브고로드에 가기 전에 다행히도 늦겨울이 되어 얼었던 강이 녹아 진창인 지역이 크게 생기는 바람에 기병 중심의 몽골군 침략을 겨우 면했지만[3], 몽골의 종주권을 암묵적으로나 대외적으로나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4] 러시아 남부의 공국들이 완전히 멸망한 것과 달리 이렇게 독립은 유지하지만 노브고로드는 독일과 스웨덴의 침입을 지속적으로 받았는데, 노브고로드 공(公)인 알렉산드르 넵스키가 1240년에는 네바 강에서 스웨덴인들을 저지하고 1242년에는 페이푸스 호에서 튜튼기사단을 물리치면서 국력을 키웠다.
노브고로드 시는 도시 한 가운데를 볼호프강이 흐르는 교통의 요지인 특성상 무역이 매우 발달했다고 한다. 키예프 루스 시절부터 흑해를 통해 수입된 동로마 제국 혹은 오리엔트의 교역품들이 노브고로드를 거쳐서 발트해와 스칸디나비아 일대로 팔려나갔다. 도시는 교환된 물자를 다시 수운을 이용하여 흑해 방향으로 수출하였다.[5] 중세의 다른 도시들과 마찬가지로 노브고로드는 주민 대다수가 방벽 안에서 거주하기를 원했기 때문에, 시내 인구가 지나치게 밀집해있었다. 하지만 도시에는 화재 방비 시설[6] 및 목재로 정교하게 포장된 도로, 목재로 만든 송수관 체계같은 인프라가 잘 구축되어 있었기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근 사람들이 노브고로드에 입성하기를 바랬다 한다.
노브고로드인들은 주로 유틀란트 및 발트해 연안에서 시민들의 생필품으로 사용할 금속제품과 훈제 청어, 포도주, 맥주를 주로 수입했다. 영국과 플랑드르 인근에도 이들의 상업망이 뻗어있었다. 중요한 무역상대였던 유틀란드 섬에는 노브고로드 상인들을 위한 정교회 성당이 두 개가 있었다 한다. 하지만 13세기 후반 한자 동맹이 결성되고 노브고로드의 소형 선박들이 보다 적재량이 많은 한자 동맹의 선박들에게 경쟁에서 밀려나면서 노브고로드인들은 어쩔 수 없이 한자 동맹 독일 상인들에게도 특권을 허용해야 했다.
노브고로드 시민들은 귀족들 뿐만 아니라 상인들이나 소작농까지 글을 일고 쓸 수 있을 정도로 문해율이 높았지만 양피지는 그 당시에 값이 비쌌기 때문에 주로 자작나무 껍데기를 종이삼아 사용했다고 한다. 자작나무 껍데기에 기록된 문서[7]들이 소련 시절에 대거 발굴되기도. 독자적인 영웅 서사시 문학도 발달했는데, 상업 도시였던 특성상 서사시의 주인공이 사업가인 경우가 많았다 한다[8].
또한 베체(Veche)라고 하는 귀족과 대상인의 합의제가 최고의 권력을 가지고 공(公) ·관리를 임명하고 재판권도 가졌다. 세분화된 행정 구역과 합의제도 때문에 노브고로드의 정식 문서들은 때때로 8개의 인장으로 공증되어야 했다고. 노브고로드의 베체는 대체로 가장 큰 시장터에서 열렸다. 시민 누구든지 베체의 종을 울리면 베체가 즉시 소집될 수 있었다. 이러한 노브고로드의 정치 체제를 두고 노브고로드 공국을 노브고로트 봉건공화제 ·노브고로트 후국(侯國)이라고도 한다.
노브고로드 인의 전초기지이자 위성도시 역할을 했던 프스코프 시 역시 베체를 비롯해서 노브고로드와 비슷한 시스템을 갖추었었다고 한다. 노브고로드 시는 형으로 프스코프 시는 아우로 불렸다고 한다.
11세기에서 15세기까지 노브고로드 공화국은 계속해서 동쪽과 북동쪽으로 영토를 확장했는데, 확장한 영토의 북쪽에서 얻은 질좋은 모피와 소금 등으로 안그래도 부유했던 지역이 경제적으로 훨씬 더 부유해졌다고 한다.
또한, 노보고로드 공화국은 높은 경제력을 바탕으로 문화도 발달했었는데, 12세기~15세기 가장 잘 알려진 동유럽 예술품들은 대부분이 이 지역에서 생산된 것이다. 특히 예술품 중에서도 전통적인 슬라브 양식과 로마 제국의 양식, 로마네스크 양식과 고딕 양식이 결합된 이콘이 유명했는데, 13세기 말쯤 되면 딱히 돈이 많지 않아도 웬만한 시민들은 집에 이콘이 하나쯤은 있었다.
전성기에 노브고로드 공국은 주변의 발트-핀 민족들과 페름 민족들에게 조공을 받았다. 그 중에서 페름의 코미인들은 노브고로드 공국의 모피 무역에 적극 참여했으며, 이 때 배운 노하우를 바탕으로 이후 러시아 제국 시대에 부유한 소수 민족 집단으로 이름을 날리며 번영을 누렸다.
4. 쇠퇴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브고로드가 모스크바에 밀린 이유는 척박한 북부 러시아 중에서도 농업생산성이 안 좋은 편이라[9] 고질적인 식량부족을 겪었고, 중세 공화정 특성상 내부 정치 암투가 심했다는 것이다.여기서 말기에 들어서 베체가 귀족층에게 장악되고 이 지역의 경제적 부와 영토를 노린 주변국들의 침략이 빈번해진데다가 이에따라 농민 봉기도 늘어나면서 완전히 흔들리기 시작한다. 1364년과 1370년에는 기근이, 1352년과 1390년과 1414년에는 전염병이 있었고 1359년과 1384년, 1388년에는 농민봉기가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모스크바가 1332년과 1386년에 드미트리 돈스코이를 앞세워 맹렬하게 공격해왔으나 모두 견디어낸 노브고로드는 1456년 바실리 2세에게 패배하고 말았다. 1471년에는 노브고로드에 회색 다람쥐 모피를 공급하는 부족들이 모스크바 공국에 정복되면서 노브고로드 공화국의 무역 기반이 타격을 입고, 결국 1478년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한 모스크바 대공국의 이반 3세에 의하여 합병되었다.
[1] 물론, 노브고로드 공화국만 이랬던 건 아니고, 당대에 베네치아 공화국이나 제노바 공화국, 피사 공화국 등, 국가원수와 시장을 시민들의 투표로 선출하는 나라는 꽤 있었다. 다만, 예시로 든 나라들은 과거 로마 제국의 영토였던 지역이라서 로마 공화국 시기의 전통이 어느 정도 살아있던 나라들이고, 노브고로드는 그런 전통이 없던 러시아에서 세워진 공화국이라서 특이하게 여겨지는 것이다.[2] 때문에 키예프 루스에서 부터 이반 4세까지 역사를 보면 거의 정기적으로 털린다.[3] 몽골은 대신 러시아 서쪽의 동유럽 국가들을 침공했다. 노브고로드처럼 봄이 된다해서 초대형 진흙밭이 생기지는 않는 지역들이었기 때문.[4] 다만, 노브고로드에 대한 몽골의 지배는 간접지배로만 행한 다른 러시아의 공국들보다도 약했고, 1260년 이후로는 그냥 세금만 받는것으로 합의했다.[5] 모피와 밀랍, 꿀을 주로 수출했다.[6] 참고로 중세의 모스크바 시는 화재 방비 시설이 미비해서 화재로 인한 피해가 매일같이 발생했다고 한다.[7] 특히 소년의 낙서가 가장 유명하다. 벨리키 노브고로드 항목 참조.[8] 실제로 11~15세기에 작성된 중세 러시아 문헌들을 모은 책을 보면, 15세기에 러시아 본토에서 머나먼 지역인 인도에까지 다녀온 러시아 상인의 이야기도 실려 있다#[9] 바로 그렇기 때문에 상공업이 발달한 것이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