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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영화 〈노량: 죽음의 바다〉의 역사 재현성을 정리한 문서.2. 전투 이전
2.1. 고증
- 영화에서 진린이 이순신에게 아들 이면을 죽인 왜병들이라며 그들을 끌어내고, 이순신이 꿈을 떠올리는 모습은, 《어우야담》에 실린 야사에서 이순신의 꿈에 이면이 나타나 나를 죽인 자들이 지금 아버지에게 잡혀있다고 호소하여 이순신이 전날 붙잡은 포로들을 심문하니 과연 이면을 죽인 자가 그 중 있어 이순신이 직접 참수했다는 야사에서 모티브를 얻은 것으로 보인다. 영화에서 이순신은 이 자들이 아니라며 복수를 포기하고, 참수는 진린이 대신하는 것으로 나온다.
- 진린 등 명나라 측 인물들의 대사가 현대 표준 중국어[2]가 아닌 명나라 당시의 근세 중국어로 나온다. 기사[3] 예고편 공개 당시 중국인들이 못 알아듣는다며 외국어 연기가 어색하다는 지적이 나왔는데, 시대가 수백 년이나 다른 근세 시절 중국어라 그런 것이었다. 물론 이럴 거면 한국어도 후기 중세~근대 국어로 해야 했을 텐데 그 부분은 상업영화 특성상 어쩔 수 없었던 듯하다.
2.2. 고증오류
- 다치바나 무네시게의 둥그런 모양의 장식 투구를 최광제 배우가 연기한 데라자와 히로타카가 쓰고 나오는 고증 오류가 있다. 구글에서 다치바나 무네시게를 검색만 해봐도 그 특유의 투구가 나온다.
- 시마즈 요시히로는 전국시대의 행적상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악연[4][5]이 있으면 있었지, 어디서 태합 전하의 유언을 천한 놈이 입에 담느냐고 할 사람은 아니었다. 하다못해 많은 다이묘들이 보는 자리도 아니고, 자기 가신들이 타고 있는 기함에서 굳이, 그것도 이미 죽은 히데요시를 태합 전하라고 높이 부르며, 충성심이 있을 이유가 없는 것이다. 다만 아리마 하루노부를 질책하여 기선 제압을 하고자 마음에도 없는 일종의 명분작을 하기 위해 히데요시를 들먹였다고 해석한다면 개연성은 충분하다. 혹은 과거에 아리마가 박쥐처럼 편을 갈아탄 것 때문에 싫어하는걸 핑곗김에 드러냈을지도 모른다.[6]
-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순신을 반드시 죽이기 위해 시마즈와 협공해야 한다고 말하면서 용맹하게 출정하는 것처럼 묘사되지만 실제 고니시는 참전할 의지가 없이 지켜만 보다가 시마즈가 대패하는 것을 보고 부산으로 도망갔다.[7][8] 고니시와 시마즈를 실제보다 용맹하게 각색한 경향이 있다.
- 모든 조선 수군 장수들이 똑같은 색의 갑옷을 입고 나오는데 당시는 직급이나 직종에 따라 다른 색을 착용했다.[9] 또한 당시 조선 갑옷은 대부분 긴 가운처럼 생긴 포형 갑옷이었고, 상•하의가 분리된 갑옷은 기병용으로 일부 사용되었는데 작중에서는 이순신을 비롯한 대부분의 조선 수군 장수들이 상의는 흑철색 찰갑이나 두정갑이고, 하의는 붉은색 두정갑인 상•하의 분리 갑옷을 입고 나온다.
- 고니시 유키나가의 사위인 소 요시토시도 순천에 고립된 장인 고니시를 구원하기 위해 참전했으나 영화에선 등장하지 않는다.
- 영화에선 1597년 이순신 장군이 진린과 회의 도중에 막내 아들 이면의 사망 소식을 듣는 장면이 나온다. 그러나 실제 진린과 대면하고, 조명 연합수군을 결성한 건 이듬해 1598년 7월 16일이었다.[10]
- 초반 선조와 윤두수가 독대하는 장면에서 윤두수의 사모뿔이 조선 초기의 가늘고 긴 사선 형태인데, 성종 때를 전후로 수평의 타원형 모양으로 바뀌었으므로 적절하지 않다.
- 선조와 윤두수가 독대하는 장면에서 자막으로 선조의 휘를 "균(鈞)"으로 표기했다. 즉위 이전인 하성군 시절의 이름이므로 선조 개인의 이름은 맞으나, 엄밀하게는 임금으로 즉위한 이후의 휘인 "연(昖)"이라는 이름을 사용해야 한다.[11] 임금의 휘 자체를 함부로 말해서도 안되지만, 하성군 시절의 이름으로 부른다면 임금을 능멸한 죄로[12] 참수를 당할 수도 있는 중대 범죄였다.
- 조선 수군이 쓰는 지도의 지명 표기가 한자와 한글로 병기되어 있는데, ㅅ계(치음) 뒤 y[ j ]계 이중 모음 표기를 살리는 듯 전반적으로 당시 표기를 살리려 한 듯하다. 그러나 '南海島'의 한글 표기가 '남해도'로 되어 있는데 당대 한자 표기에 따르면 'ㅐ'가 아니라 'ㆎ(아래애)'를 쓴 '남ᄒᆡ도'가 옳다.
3. 전투 전반
3.1. 고증오류
- <명량>에서도 지적된 사항이지만 본 영화에서도 조총은 왜군만 사용하고, 조선군과 명나라군은 사용하지 않는다. 실제 역사에서 조선은 임진왜란 개전 1년 만에 조총 복제에 성공했고, 본 영화 시점의 전쟁 말기에는 전군에 보급되어 수군들도 상당수가 조총을 사용했다. 명나라군도 실제 역사에서는 조총을 다수 운용했으나 영화에서는 삼안총통을 사용한다.
- 왜군이 조총 발사 명령을 내릴 때 "웃테(撃って)"라고 외친다. 하지만 당시에는 "하나세(離せ)"라고 표현했다. 활시위를 놓으라는(하나세) 의미였는데 조총이 도입된 이후로도 여전히 같은 단어를 사용했기 때문이다. 이후 시대를 거쳐 "웃테"로 변화했다.
- 시리즈 공통으로 지적된 사항인데, 조선군이 중~소형 총통류를 전혀 사용하지 않는다. 여러 개인화기로 만들어진 총통들이 있었지만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 판옥선 선수 함포 사격 및 임진왜란 작품들 중에서는 처음으로 판옥선에서 신기전을 발사하는 장면[13]이 나온다. 또 판옥선이 3줄로 서서 교대하며 싸우는 장면도 연출되었다. 다만 판옥선의 가장 큰 강점인 닻을 내리고, 제자리에서 360도 돌며 함포를 발사하는 장면은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빠졌다. 함포들이 판옥선 좌•우로 이동하며 발사하는 장면 역시 아쉬운 부분이다.[14]
- 거북선은 노량 해전 당시에는 운용되지 않았다. 거북선은 앞서 칠천량 해전에서 3척 모두 격침되었고, 당장 제식 전투함인 판옥선 건조하기에도 바빠 거북선을 건조할 여력이 없어 이순신은 거북선을 재건조하지 않았다. 기록에도 거북선을 건조했다거나 노량해전에 투입한 적은 전혀 없다.[15] 때문에 거북선 관련 정면은 모두 허구다. 그래서 영화상에 나온 거북선이 실제 거북선은 아니고, 판옥선에 뚜껑을 씌워 급조한 거북선이라는 설정이다.
- 전투 중반까지 등자룡을 제외한 나머지 명나라군은 미적거리는 것으로 묘사된다.[16] 실제로는 매복해 있었던 조선 함대가 선제공격을 한 후 시마즈 함대가 돌진해올 때 곧바로 죽도 부근에 매복하고 있었던 명나라군이 바로 이어서 참전했다. 또 이순신이 등자룡에게만 판옥선을 선물했는데 실제로는 진린에게도 판옥선을 줬으며, 두 사람 모두 장군선으로 운용했다.
- 영화에서 김성규가 연기한 항왜 준사가 백병전 중 생포 위기에 처한 진린을 구하는 것처럼 묘사된다. 실제로는 진린의 판옥선이 왜선들에 둘러싸이자 이순신 장군이 포격을 가해 왜선들을 격침시켜 구해냈다. 준사가 사망하는 것으로 나오지만 실제로는 《난중일기》에서 명랑해전 당시 활약했다는 기록 한 줄이 전부다.
- 데라자와 마사시게가 불타는 배 구조물에 깔린 다음 수장되는 장면이 나오는데, 실제로는 전투가 시작되자마자 도망쳐서 1633년까지 장수했다.
- 영화에선 명나라 장군 진잠과 심리가 전투 중 전사하는 것으로 묘사되지만 실제로는 노량해전에서 생존해 이후 조선에 주둔하다가 명나라로 돌아갔다.
- 포를 매달아 쏘는 것에 대해, <명량> 때의 삭제 영상부터 계속 논란이 있었다. <조선전역해전도>라는 그림에서 모티브를 얻은 것 같은데, 해당 그림은 고증 오류가 많아 학계에서는 취급하지 않는다.
- 준사만 맹선이나 방패선 또는 협선으로 보이는 소형선을 타고 활약하는데, 실제로는 판옥선 한 척마다 배정되어 하나의 조를 이루었다. 이 소형선들은 수색 정찰, 전투 투입, 보급 등 다용도 전선이었는데 한 척만 등장한 부분이 아쉽다. 그래도 이순신 장군의 승리에 큰 부분이었던 첩보전을 수행하는 건 잘 묘사했다.[17]
- 진린이 초중반에 너무 소극적으로 관망만 하다가 한참 뒤늦게 나서는데다가 부하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돌격하다가 시마즈에게 너무 손쉽게 제압된다. 실제로 명나라군은 이순신의 본대가 참전하는 초반부터 교전을 하고 있었다. 조선 복병 함대가 선제 사격을 퍼붓고, 왜군이 조선 선봉대의 수가 적음을 보고 돌격해 나갈 때, 이미 명나라군은 매복을 풀고 진격하고 있는 중이었다. 등자룡이 먼저 돌격해 들어간 점만이 실제 역사와 일치하나, 영화에서는 이 등자룡의 돌격 시점도 한참 뒤에 나온다. 그리고 진린이 시마즈의 총공세에 위기를 맞다가 이순신 함대에 구원받은 것이 역사적인 사실이기는 하나, 영화에서는 너무나 무력하게 당한 감이 있다. 명나라 배들도 화포의 조준이 부정확하거나, 후퇴하다가 자기들끼리 부딪히는 등 훈련 수준이 높아보이지 않았다. 왜군이 비웃을 정도. 물론 고니시의 말만 믿지 않고 전황을 살펴보다가 고니시의 말과 달리 양상이 너무 격렬하자, 적의 진의를 시험하기 위해 일부러 북을 울리고 나팔을 불며 시끄럽게 진격하며 마냥 생각없이 속고 있기만 하지는 않는 면모와, 협공할 때 뒤로 물러나지 않고 이순신의 왜군 허리를 끊는 공격에 맞추어 같이 돌격하는 용맹성도 보여주기는 했다. 그런데 적당히 거리를 두며 싸우려 했던 기존 예정과 달리 적에게 돌격을 명령했다면 그에 따른 방책도 있어야 했는데, 명나라군의 낮은 훈련 수준과 사선 및 호선의 열세, 왜군의 정교한 진법에 무대책으로 속수무책으로 당해버리면서 빛이 바랬다. 진린이 왜교성 전투 때 죽을 뻔하다가 이순신의 도움으로 살아난 이후, 가급적 왜군과의 전면전을 피하려 하고, 고니시에게 뇌물을 받거나 연락선을 보내주거나 하는 등의 모습을 보여주었기에, 진린의 망설이는 심정을 영화에서 직접적으로 보여주려고 명나라군의 전투 참여 시점을 늦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연출 때문에 조선 복병 함대와 함께 불랑기포와 호준포를 쏘며 공격한 등자룡과 명나라군의 초반 활약이 상당 부분 삭제되었다.
- 영화에서는 전황이 불리해지자 시마즈가 빈 바다 방향을 가리키며 저쪽으로 빠져나가 이순신을 유인하자고 해서 나아간다. 그러다 관음포 만에 갇힌 뒤에서야 뒤늦게 명나라군이 이순신의 부탁으로 관음포 입구를 막고, 이를 뚫어내려는 일본 함대의 허리를 이순신이 끊어내는 것으로 각색되었다. 이후에도 명나라군은 계속 두들겨 맞는 모습만 나온다. 결과적으로 명나라군의 활약이 상당히 축소되었다.[18] 실제 전투 양상은 매복한 조선 함대가 선제포격을 하고, 죽도 부근에서 매복하던 명나라군이 합류했다. 이를 따돌리고 고니시에게 가려던 일본 함대의 허리를, 관음포 쪽에서 매복하다가 옆에서 등장한 이순신의 본대가 끊어버려서 일본 함대에 대혼란이 일어났다. 궁지에 몰린 일본 함대가 명나라군 쪽으로 돌파를 시도했지만 조선 수군의 구원으로 실패하고, 바뀐 물살을 이용해 도망가다가 관음포 만이 남해섬 남쪽인 줄 착각해 들어갔다. 이 때문에 만 입구를 포위한 조명연합군과 탈출하려는 일본 함대 사이에 처절한 결전이 벌어졌다.
- <불멸의 이순신>에서도 반복된 오류인데, 충청수사로 재직했던 권준은 노량해전에 참전하지 않았을 확률이 높다. 심지어 노량해전 직전 충청수사는 오응태였다.[19]
- 조선군이 승자총통을 사용할 것이라는 예상과는 달리, 명나라군이 사용하는 삼안총이 나온다. 그래도 총통이 나온 것 만으로도 의미있는 부분이다.
- 시마즈 요시히로가 거북선을 보자 조선의 총통을 발포했으나 실제로는 선체가 약해서 함포 사격이 불가능하다. 여담으로 부산포 방어를 하라고 보낸 편지 중에는 조선의 함포를 많이 확보하고 그 사격법을 배우라고 보냈는데 그걸 함선에 배치하라는 말도 없었다.
4. 전투 후반
4.1. 고증오류
- 이순신이 탄 장군선에 왜군이 월선해 싸우는데, 완전한 허구다. 이순신이 앞장서서 싸웠고 위험에 처한 진린을 구하러 가기도 했었지만 장군선에서 백병전이 있었다는 기록은 없다.
- 이순신이 노량해전 중에만 두 차례나 총탄에[20] 맞는 걸로 묘사했는데[21] 《이충무공전서》나 《조선왕조실록》에는 해당 사실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순신을 그린 다른 작품들 중 <불멸의 이순신>과 <징비록>에서도 앞선 사천해전에서 한 발, 노량해전에서 한 발 맞은 것으로 묘사했다. 아마 이미 알려진 이순신의 최후에 약간의 반전을 주기 위한 장치로 보인다. 그 외 이순신의 최후에 대해서는 안방준의 《은봉전서》를 참고한 듯하다.
- 이순신이 끝까지 싸워야 함을 강조하며, 일본을 가리켜 '열도(列島)'라고 언급하는 부분[22]도 사실상 오류라고 할 수 있다. 당대 조선에서는 일본을 열도로 지칭하지 않았다. 《조선왕조실록》을 살펴봐도 열도라는 용어는 거의 나오지 않는다. 굳이 따지자면 《세종실록》과 《광해군일기》에 각각 1번씩 언급되고는 있는데, 《세종실록》에서는 학포 열도, 《광해군일기》에서는 풍해도를 설명하며 언급된 말에 불과하다. 즉, 조선시대 내내 일본을 열도로 지칭한 1차 사료는 거의 없다.
- 이순신의 전사 후 안보현이 연기한 첫째 아들 이회가 이어서 북을 치는데, 실제로는 손문욱이 대신 북을 치며 장군선을 지휘해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23]
- 영화 엔딩부에 왜군이 20,000명의 전사자를 냈고, 조명연합군도 많은 손실을 입었으며, 특히 명나라군이 상당한 피해를 입었던 것으로 묘사된다.[24] 이는 절반만 맞는데, 정확하게 말하자면 이순신이 이끌었던 조선 수군이 참전했던 해전에서 가장 많은 피해를 입었다는 것이며[25][26] 일본 수군이 최대 피해를 입은 건 실제와 부합한다.
- 이규형이 연기한 아리마 하루노부는 영화와 달리 임진왜란에서 죽지 않고 일본으로 돌아갔다. 이후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동군 측에 가담하여 서군 측의 고니시 유키나가의 영지를 공격했다. 또 영화에선 비참하게 죽은 아라마의 시체를 고니시가 애써 외면하면서 떠나지만 실제로는 1600년 11월 6일,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처형당한 고니시 유키나가보다 12년 뒤에 뇌물 사건으로 이에야스에게 처형당했다. 할복을 명령받았으나 기리시탄의 기록에는 이를 거부하고 참수형을 받았다고 나온다.
- 영화에서 명나라군이나 조선군의 피해가 다소 크게 묘사된 듯하다. 일본 측 기록을 따르더라도 명나라 수군의 피해는 2척, 조선 수군의 피해는 4척인데 과장일 확률도 높으며, 사실이라 하더라도 판옥선이 아닌 방패선이나 협선, 명나라의 호선에서 발생한 피해였을 확률이 높다. 심지어 조선이나 명나라 측 기록에는 조선의 함선 손실이 있었다는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5. 총평
그간의 통념을 뒤집거나 미디어에서 묘사된 적이 없는 고증을 시도하는 등 전반적으로 꽤 고심을 한 흔적이 엿보인다. 하지만 캐릭터성과 극적인 전개를 위해 의도적으로 고증을 어기거나, 실제 인물들의 캐릭터를 서로 바꾸는 등 상당한 각색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실제 역사와는 구분해서 보는 시각이 필요하다. 그리고 각색 과정에서 다소 무리수라 할 수 있는 창작이 불필요하게 들어가서[27] 전체적인 완성도를 떨어뜨렸다는 점은 아쉬움으로 남는다.임용한 박사가 본 영화의 고증 감별을 하기도 했다.
[1] 이전의 영화 <성웅 이순신>에서는 고니시 유키나가가 노량해전 당시 왜군 최고 수장으로 묘사되었고,<불멸의 이순신>과 <징비록>에서는 노량 해전 당시엔 조선에 있지도 않았던 와키자카 야스하루가 최고 수장으로 등장하는 등 지속적인 고증 오류가 있었다.[2] 애초에 진린은 광둥어를 쓰는 광둥성 출신이라 오늘날 베이징 기준의 표준 중국어를 쓰는 걸로 나왔으면 고증 오류였다. 다만 관직 생활을 했으므로 광둥어만 사용하지는 않았을 것이고, 당대 관화를 따로 배웠을 가능성이 높다.[3] 기사에는 편의상 ‘고대 중국어’라고 서술되었지만 당연히 근세 중국어이다.[4] 전국시대 시절, 요시히로의 능력으로 규슈 정벌이 거의 성공하기 직전이었는데, 마지막 상대였던 오토모 가문의 오토모 소린이 히데요시에게 원군을 청했고, 결국 히데요시의 원군 때문에 시마즈 요시히로는 체급 차이에 의한 중과부적으로 정벌했었던 대부분의 영토를 토해내고, 규슈 남부만 영지로 인정받아야 했던 아픈 기억이 있었다. 거기다가 히데요시가 요시히로를 시마즈 가문의 가주로 인정해줬지만, 강제로 박아놓은것이라 형인 시마즈 요시히사에 대한 가신들의 충성이 남아 있어 그로 인해 생긴 갈등, 거기다가 요시히로의 아들인 타다츠네도 요시히사의 딸과 결혼했기 때문에 타다츠네도 가주 쟁탈전에 참전할 수 있었던 것 등, 집안 내 갈등도 있었다. 임진왜란도 이런 어수선한 집안 사정 때문에 늦게 참전했고, 그나마도 상대적으로 급에 안 맞는 병력(15,000명 정도)만을 끌고 갔다.[5] 히데요시의 생애에 나오는 서술대로, 임진왜란 때문에 영지의 존망(예: 소 요시토시가 다스리는 쓰시마 섬. 전쟁에서 패배해도, 혹여나 승리해도 큰일이 나는 환장할 위치였다.)이 걸린 문제가 벌어지는 것은 물론, 규슈의 시마즈 요시히로를 포함한 서일본 지역의 경우, 최전선에서 소모당할게 뻔하니 전쟁을 하고 싶지 않았다. 심지어 히데요시의 심복들인 칠본창조차 이미 입지전적인 출세를 해서 만족스러운데 또 전쟁을 하다가 죽어버리면 다 끝일 정도라, 기본적으로 다들 기껏 평화가 왔는데 또 전쟁이라니 하면서 싫어했다. 시마즈 요시히로도 히데요시가 시키니까 어쩔 수 없이 했지, 적극적으로 침략할 생각은 없었을 가능성이 높다. 침략자로서의 행보가 없었던 건 아니었지만, 이왕에 했으니까 적어도 본전은 챙겨야겠지라고 생각하면 쉽다.[6] 실제 아리마 하루노부는 류조지 가문에게 패배해 복속당했다가, 시마즈 요시히사와 손을 잡고 류조지 가문에게 복수한 뒤에 시마즈 가문 밑으로 들어갔다. 그래놓고 불과 3년 뒤인 1587년에 히데요시가 규슈를 정벌했을 때는 히데요시에게 바로 항복했다. 시마즈 요시히로의 시점에선 기껏 류조지 가문에 대한 복수를 도와주고 거둬줬더니, 히데요시가 쳐들어오자마자 재빠르게 항복한 아리마가 꼴보기 싫었을 것이다.[7] 영화에도 나오지만 싸울 수 있는 상태도 아니었다. 이순신에 의해 고립당해서 식량난에 처했고, 장도 해전에선 무려 40여 척의 전선을 잃었다.[8] 여담이지만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에선 고니시가 퇴각하다가 길목마다 배치된 조선 수군에게 매복당하고, 먼 발치에서 이순신에게 이를 갈며 복수를 다짐하는 걸로 나오는데 그 역시 사실이 아니다.[9] 보통 오방색을 기준으로 제작되었다.[10] 이로부터 3일 후 절이도 해전이 있었다.[11] 피휘 문제로 실생활에서 잘 쓰이지 않는 한자로 개명하는 것이 거의 관습처럼 굳어져서 그렇다. 태종 이방원 정도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이렇게 했다. 태조 이성계 역시 왕조를 개창하고 나서 "단(旦)"으로 바꿨다.[12] 당신을 임금 취급 하지 않겠다는 뜻으로 들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13] 소신기전과 중신기전 발사 장면이 한 차례씩 등장한다.[14] 당시 판옥선에는 전후좌우 모두 포를 설치해 운용했다. 포에 바퀴가 달린 것도 포의 위치를 바꾸기 위해서라기 보다 조선 수군이 다양한 포를 운용했기 때문에 포의 종류를 바꾸기 위한 용도로 보는 것이 학계의 중론이다.[15] 조선 측 기록으로는 침몰된 조선 함선에 대한 언급이 없고, 시마즈 측에서 4척을 침몰시켰다고 하지만 거북선이라는 언급은 없다.[16] 등자룡은 실제로 노량 해전에서 죽기를 각오하고 용맹하게 싸웠다. 참고로 영화에서는 시마즈의 대장선에 월선하여 월도를 휘두르다가 전사하지만, 실제론 자신이 타고 있었던 판옥선에서 월선한 왜군과 싸우다가 전사했다. 명나라 수군이 함포 조준을 실수하여 등자룡의 판옥선에 불을 냈는데, 이 기회를 놓치지 않은 시마즈군이 집중 공격을 퍼부어 결국 침몰하게 되었다.[17] 실제로 장군은 전쟁 기간 동안, 해상 뿐만 아니라 육지에도 첩보원을 두었고, 피난 온 백성들의 보고도 빠짐 없이 수집하여 교차 검증할 만큼 치밀하게 정보를 수집했다.[18] 전투의 격렬함이나, 어떻게든 탈출하려는 일본 함대와 어떻게든 1명이라도 더 붙잡아 죽이려는 조명연합군의 모습에서 영화보다 실화가 더 치열했다.[19] 오응태도 참전하지 않았는데 충청수사가 굳이 참전했다는 묘사보다는 차라리 이순신이 충청수사로 하여금 고니시를 견제해서 고니시가 협공을 시도 못한 것처럼 각색하는 편이 더 나을 뻔 했다.[20] 작중 첫 번째는 북채에, 두 번째는 이순신 본인의 몸에 맞는 걸로 묘사된다.[21] 첫 번째 총탄 공격 직후 망가진 북채가 나오는 장면과 주위의 송희립 등 다른 휘하 장병들이 이순신의 몸을 치료하거나 지혈하는 장면이 없기 때문에 첫 번째 총탄이 북채에 맞은 것임을 알 수 있다.[22] 이렇게 적들을 살려보내서는 올바로 이 전쟁을 끝낼 수 없다. 반드시 열도 끝까지라도 쫓아가서 기어이 완전한 항복을 받아내어야 한다[23] 《선조실록》에 이덕형과 권율이 교차로 보고했고, 전쟁의 무공을 조사하기 위해 설치한 임시조직인 군공청에서도 이처럼 기록했다. 그런데 인조가 반정으로 집권한 후 《선조수정실록》을 작성하며, 이순신의 조카 이완이 지휘했다고 변경했다. 그러나 이완이 북을 쳤다는 기록은 전쟁 당시 어떤 기록에도 나오지 않는다. 이는 손문욱이 광해군파였기 때문에 인조반정 후 그의 군공을 줄이려 한 것으로 해석된다.[24] 과장되게 묘사했지만 실제로 진린은 거의 생포될 뻔한 상황을 겪었다.[25] 조명연합수군의 피해는 500~800명 가량이었던 반면, 왜군은 최소 10,000명을 크게 상회하는 피해(기록마다 다르지만 전력의 2/3 이상을 잃은 것이 교차검증된다.)를 입은 것으로 추정된다.[26] 이순신은 철저한 준비와 전략을 통해 아군의 희생을 최소화하는 지휘관이었기 때문에 직접 지휘한 전투에서 사상자 수가 말도 안 되는 수준으로 적었다. 거의 궤멸 직전까지 갔던 조선 수군을 겨우 수습해 압도적으로 불리한 상황에서 치른 명량해전의 전사자는 10명이었으며, 한산도 대첩의 전사자는 2명에 그쳤다. 조선 수군 사상 최대 피해를 입은 건 바로 원균이 지휘한 칠천량 해전으로, 이쪽은 전사자가 7~8,000명대로 추정되며, 수많은 함선을 잃으면서 명량해전 이전까지 조선 측이 남해안의 재해권을 상실하는 결과를 가져왔다.[27] 거북선의 등장과 격침 장면이 대표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