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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16 22:43:43

노량: 죽음의 바다/역사 재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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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봉 전 정보등장인물줄거리평가흥행역사 재현성

1. 개요2. 전투 이전
2.1. 고증2.2. 고증오류
3. 전투 전반
3.1. 고증오류
4. 전투 후반
4.1. 고증오류
5. 총평

1. 개요

영화 〈노량: 죽음의 바다〉의 역사 재현성을 정리한 문서.
이 문서에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문서가 설명하는 작품이나 인물 등에 대한 줄거리, 결말, 반전 요소 등을 직·간접적으로 포함하고 있습니다.


2. 전투 이전

2.1. 고증

2.2. 고증오류

3. 전투 전반

3.1. 고증오류

4. 전투 후반

4.1. 고증오류

5. 총평

그간의 통념을 뒤집거나 미디어에서 묘사된 적이 없는 고증을 시도하는 등 전반적으로 꽤 고심을 한 흔적이 엿보인다. 하지만 캐릭터성과 극적인 전개를 위해 의도적으로 고증을 어기거나, 실제 인물들의 캐릭터를 서로 바꾸는 등 상당한 각색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실제 역사와는 구분해서 보는 시각이 필요하다. 그리고 각색 과정에서 다소 무리수라 할 수 있는 창작이 불필요하게 들어가서[27] 전체적인 완성도를 떨어뜨렸다는 점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임용한 박사가 본 영화의 고증 감별을 하기도 했다.


[1] 이전의 영화 <성웅 이순신>에서는 고니시 유키나가가 노량해전 당시 왜군 최고 수장으로 묘사되었고,<불멸의 이순신>과 <징비록>에서는 노량 해전 당시엔 조선에 있지도 않았던 와키자카 야스하루가 최고 수장으로 등장하는 등 지속적인 고증 오류가 있었다.[2] 애초에 진린광둥어를 쓰는 광둥성 출신이라 오늘날 베이징 기준의 표준 중국어를 쓰는 걸로 나왔으면 고증 오류였다. 다만 관직 생활을 했으므로 광둥어만 사용하지는 않았을 것이고, 당대 관화를 따로 배웠을 가능성이 높다.[3] 기사에는 편의상 ‘고대 중국어’라고 서술되었지만 당연히 근세 중국어이다.[4] 전국시대 시절, 요시히로의 능력으로 규슈 정벌이 거의 성공하기 직전이었는데, 마지막 상대였던 오토모 가문의 오토모 소린이 히데요시에게 원군을 청했고, 결국 히데요시의 원군 때문에 시마즈 요시히로는 체급 차이에 의한 중과부적으로 정벌했었던 대부분의 영토를 토해내고, 규슈 남부만 영지로 인정받아야 했던 아픈 기억이 있었다. 거기다가 히데요시가 요시히로를 시마즈 가문의 가주로 인정해줬지만, 강제로 박아놓은것이라 형인 시마즈 요시히사에 대한 가신들의 충성이 남아 있어 그로 인해 생긴 갈등, 거기다가 요시히로의 아들인 타다츠네도 요시히사의 딸과 결혼했기 때문에 타다츠네도 가주 쟁탈전에 참전할 수 있었던 것 등, 집안 내 갈등도 있었다. 임진왜란도 이런 어수선한 집안 사정 때문에 늦게 참전했고, 그나마도 상대적으로 급에 안 맞는 병력(15,000명 정도)만을 끌고 갔다.[5] 히데요시의 생애에 나오는 서술대로, 임진왜란 때문에 영지의 존망(예: 소 요시토시가 다스리는 쓰시마 섬. 전쟁에서 패배해도, 혹여나 승리해도 큰일이 나는 환장할 위치였다.)이 걸린 문제가 벌어지는 것은 물론, 규슈의 시마즈 요시히로를 포함한 서일본 지역의 경우, 최전선에서 소모당할게 뻔하니 전쟁을 하고 싶지 않았다. 심지어 히데요시의 심복들인 칠본창조차 이미 입지전적인 출세를 해서 만족스러운데 또 전쟁을 하다가 죽어버리면 다 끝일 정도라, 기본적으로 다들 기껏 평화가 왔는데 또 전쟁이라니 하면서 싫어했다. 시마즈 요시히로도 히데요시가 시키니까 어쩔 수 없이 했지, 적극적으로 침략할 생각은 없었을 가능성이 높다. 침략자로서의 행보가 없었던 건 아니었지만, 이왕에 했으니까 적어도 본전은 챙겨야겠지라고 생각하면 쉽다.[6] 실제 아리마 하루노부는 류조지 가문에게 패배해 복속당했다가, 시마즈 요시히사와 손을 잡고 류조지 가문에게 복수한 뒤에 시마즈 가문 밑으로 들어갔다. 그래놓고 불과 3년 뒤인 1587년에 히데요시가 규슈를 정벌했을 때는 히데요시에게 바로 항복했다. 시마즈 요시히로의 시점에선 기껏 류조지 가문에 대한 복수를 도와주고 거둬줬더니, 히데요시가 쳐들어오자마자 재빠르게 항복한 아리마가 꼴보기 싫었을 것이다.[7] 영화에도 나오지만 싸울 수 있는 상태도 아니었다. 이순신에 의해 고립당해서 식량난에 처했고, 장도 해전에선 무려 40여 척의 전선을 잃었다.[8] 여담이지만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에선 고니시가 퇴각하다가 길목마다 배치된 조선 수군에게 매복당하고, 먼 발치에서 이순신에게 이를 갈며 복수를 다짐하는 걸로 나오는데 그 역시 사실이 아니다.[9] 보통 오방색을 기준으로 제작되었다.[10] 이로부터 3일 후 절이도 해전이 있었다.[11] 피휘 문제로 실생활에서 잘 쓰이지 않는 한자로 개명하는 것이 거의 관습처럼 굳어져서 그렇다. 태종 이방원 정도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이렇게 했다. 태조 이성계 역시 왕조를 개창하고 나서 "단(旦)"으로 바꿨다.[12] 당신을 임금 취급 하지 않겠다는 뜻으로 들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13] 소신기전중신기전 발사 장면이 한 차례씩 등장한다.[14] 당시 판옥선에는 전후좌우 모두 포를 설치해 운용했다. 포에 바퀴가 달린 것도 포의 위치를 바꾸기 위해서라기 보다 조선 수군이 다양한 포를 운용했기 때문에 포의 종류를 바꾸기 위한 용도로 보는 것이 학계의 중론이다.[15] 조선 측 기록으로는 침몰된 조선 함선에 대한 언급이 없고, 시마즈 측에서 4척을 침몰시켰다고 하지만 거북선이라는 언급은 없다.[16] 등자룡은 실제로 노량 해전에서 죽기를 각오하고 용맹하게 싸웠다. 참고로 영화에서는 시마즈의 대장선에 월선하여 월도를 휘두르다가 전사하지만, 실제론 자신이 타고 있었던 판옥선에서 월선한 왜군과 싸우다가 전사했다. 명나라 수군이 함포 조준을 실수하여 등자룡의 판옥선에 불을 냈는데, 이 기회를 놓치지 않은 시마즈군이 집중 공격을 퍼부어 결국 침몰하게 되었다.[17] 실제로 장군은 전쟁 기간 동안, 해상 뿐만 아니라 육지에도 첩보원을 두었고, 피난 온 백성들의 보고도 빠짐 없이 수집하여 교차 검증할 만큼 치밀하게 정보를 수집했다.[18] 전투의 격렬함이나, 어떻게든 탈출하려는 일본 함대와 어떻게든 1명이라도 더 붙잡아 죽이려는 조명연합군의 모습에서 영화보다 실화가 더 치열했다.[19] 오응태도 참전하지 않았는데 충청수사가 굳이 참전했다는 묘사보다는 차라리 이순신이 충청수사로 하여금 고니시를 견제해서 고니시가 협공을 시도 못한 것처럼 각색하는 편이 더 나을 뻔 했다.[20] 작중 첫 번째는 북채에, 두 번째는 이순신 본인의 몸에 맞는 걸로 묘사된다.[21] 첫 번째 총탄 공격 직후 망가진 북채가 나오는 장면과 주위의 송희립 등 다른 휘하 장병들이 이순신의 몸을 치료하거나 지혈하는 장면이 없기 때문에 첫 번째 총탄이 북채에 맞은 것임을 알 수 있다.[22] 이렇게 적들을 살려보내서는 올바로 이 전쟁을 끝낼 수 없다. 반드시 열도 끝까지라도 쫓아가서 기어이 완전한 항복을 받아내어야 한다[23] 《선조실록》에 이덕형권율이 교차로 보고했고, 전쟁의 무공을 조사하기 위해 설치한 임시조직인 군공청에서도 이처럼 기록했다. 그런데 인조가 반정으로 집권한 후 《선조수정실록》을 작성하며, 이순신의 조카 이완이 지휘했다고 변경했다. 그러나 이완이 북을 쳤다는 기록은 전쟁 당시 어떤 기록에도 나오지 않는다. 이는 손문욱이 광해군파였기 때문에 인조반정 후 그의 군공을 줄이려 한 것으로 해석된다.[24] 과장되게 묘사했지만 실제로 진린은 거의 생포될 뻔한 상황을 겪었다.[25] 조명연합수군의 피해는 500~800명 가량이었던 반면, 왜군은 최소 10,000명을 크게 상회하는 피해(기록마다 다르지만 전력의 2/3 이상을 잃은 것이 교차검증된다.)를 입은 것으로 추정된다.[26] 이순신은 철저한 준비와 전략을 통해 아군의 희생을 최소화하는 지휘관이었기 때문에 직접 지휘한 전투에서 사상자 수가 말도 안 되는 수준으로 적었다. 거의 궤멸 직전까지 갔던 조선 수군을 겨우 수습해 압도적으로 불리한 상황에서 치른 명량해전의 전사자는 10명이었으며, 한산도 대첩의 전사자는 2명에 그쳤다. 조선 수군 사상 최대 피해를 입은 건 바로 원균이 지휘한 칠천량 해전으로, 이쪽은 전사자가 7~8,000명대로 추정되며, 수많은 함선을 잃으면서 명량해전 이전까지 조선 측이 남해안의 재해권을 상실하는 결과를 가져왔다.[27] 거북선의 등장과 격침 장면이 대표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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