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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13 11:17:02

네스토르 카를로스 키르치네르

파일:아르헨티나 대통령기.svg
아르헨티나 공화국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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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년 아르헨티나의 방송국 텔레페가 아르헨티나인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를 바탕으로 '가장 위대한 아르헨티나인 100명'을 선정했다.
TOP 10
<rowcolor=#ffffff> 1위 2위 3위 4위 5위
호세 데 산 마르틴 레네 파발로로 후안 마누엘 판지오 알베르토 올메도 체 게바라
<rowcolor=#ffffff> 6위 7위 8위 9위 10위
디에고 마라도나 에바 페론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마누엘 벨그라노 로베르토 폰타나로사
11위~100위
<rowcolor=#ffffff> 11위 12위 13위 14위 15위
아돌포 비오이 카사레 아돌포 페레스 에스키벨 알폰시나 스토르니 알프레도 알콘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
<rowcolor=#ffffff> 16위 17위 18위 19위 20위
알프레도 팔라시오스 알리시아 모로 드 후스토 앙헬 비센테 페냘로사 안토니오 베르니 아르투로 프론디시
<rowcolor=#ffffff> 21위 22위 23위 24위 25위
아르투로 움베르토 일리아 아스토르 피아졸라 아타우알파 유판키 바르톨로메 미트레 베니토 킨켈라 마르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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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나르디노 리바다비아 베르나르도 우사이 칼푸쿠라 카를로스 빌라르도 카를로스 가르델
<rowcolor=#ffffff> 31위 32위 33위 34위 35위
카를로스 메넴 카를로스 몬존 카를로스 무기카 카를로스 레우테만 찰리 가르시아
<rowcolor=#ffffff> 36위 37위 38위 39위 40위
세사르 루이스 메노티 세사르 밀스테인 다니엘 파사레야 도밍고 파우스티노 사르미엔토 엔리케 앙젤렐리
<rowcolor=#ffffff> 41위 42위 43위 44위 45위
엔리케 산토스 디세폴로 에르네스토 사바토 에스테반 에체베리아 에스텔라 데 카를로토 파쿤도 키로가
<rowcolor=#ffffff> 46위 47위 48위 49위 50위
플로렌티노 아메히노 프란시스코 모레노 가브리엘 바티스투타 가브리엘라 사바티니 기예르모 빌라스
<rowcolor=#ffffff> 51위 52위 53위 54위 55위
구스타보 산타올랄라 헤베 데 보나피니 이폴리토 이리고옌 우고 포르타 호르헤 뉴베리
<rowcolor=#ffffff> 56위 57위 58위 59위 60위
호세 에르난데스 호세 마리아 가티카 후안 바우티스타 알베르디 후안 호세 카스텔리 후안 마누엘 데 로사스
<rowcolor=#ffffff> 61위 62위 63위 64위 65위
후안 페론 후아나 아수르두이 훌리오 아르헨티노 로카 훌리오 보카 훌리오 코르타사르
<rowcolor=#ffffff> 66위 67위 68위 69위 70위
후스토 호세 데 우르키사 레안드로 알렘 레온 히에코 리산드로 데 라 토레 롤라 모라
<rowcolor=#ffffff> 71위 72위 73위 74위 75위
루시아나 아이마르 루이스 페데리코 를루아르 루이스 산드리니 마누 지노빌리 마누엘 도레고
<rowcolor=#ffffff> 76위 77위 78위 79위 80위
마리아노 모레노 마리아노 모레스 마리오 켐페스 마리기타 산체스 마르틴 미겔 데 구에메스
<rowcolor=#ffffff> 81위 82위 83위 84위 85위
마리아 엘레나 월시 메르세데스 소사 니콜리노 로체 니니 마르샬 노르마 알레안드로
<rowcolor=#ffffff> 86위 87위 88위 89위 90위
네스토르 카를로스 키르치네르 오스카 보나베나 끼노 라몬 카리요 라울 알폰신
<rowcolor=#ffffff> 91위 92위 93위 94위 95위
리카르도 발빈 로베르토 알트 로베르토 비센조 로돌포 월시 로케 사엔스 페냐
<rowcolor=#ffffff> 96위 97위 98위 99위 100위
살바도르 마사 산드로 데 아메리카 타토 보레스 티타 메레요 술 솔라르
출처
같이 보기: 위대한 인물 시리즈
}}}}}}}}} ||
<colbgcolor=#75aadb><colcolor=#fff> 아르헨티나 공화국 제48대 대통령
네스토르 카를로스 키르치네르
Néstor Carlos Kirchner
파일:네스토르키르치네르.jpg
출생 1950년 2월 25일
아르헨티나 산타크루스 주 리오가예고스
사망 2010년 10월 27일 (향년 60세)
아르헨티나 산타크루스 주 엘 칼라파테
학력 국립 라플라타 대학교
재임기간 제48대 대통령
2003년 5월 25일 ~ 2007년 12월 10일
서명
파일:네스토르 카를로스 키르치네르 서명.svg
직업 변호사, 정치인
신체 188cm
국적
[[아르헨티나|]][[틀:국기|]][[틀:국기|]]
최종 당적 [[정의당(아르헨티나)|
정의당
]]
가족 배우자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 데 키르치네르 (1975년 결혼)
슬하 1남 1녀
경력 리오가예고스 시장
산타크루스 주지사
제48대 아르헨티나 대통령 (2003 - 2007)
아르헨티나 대통령 부군 (2007 - 2010)
정의당 대표
남미국가연합 사무총장

1. 개요2. 대통령 임기 이전3. 대통령 취임 후4. 여담5. 같이 보기6. 선거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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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르헨티나정치인, 변호사. 2003년부터 2007년까지 아르헨티나 대통령을 지낸 인물로, 90년대 외환위기 이후 휘청이던 아르헨티나 경제를 빠르게 살려내 후안 페론 이후의 아르헨티나 대통령 가운데서 가장 임기를 순탄하게 마치면서 성공한 대통령으로 평가된다.[1]

덕분에 그의 아내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 데 키르치네르도 후임으로 대통령직을 수행하게 된다. 다만 아내의 정권을 돕던 중 2010년 심장마비로 만 60세에 요절한다.

2. 대통령 임기 이전

1950년 산타크루스 주 리오가예고스[2]에서 스위스 독일계인 아버지와 크로아티아계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1970년대 초반에 국립 라플라타대 법대로 진학했고 거기서 자신의 반려자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 데 키르치네르와 만났다. 1976년 국립 라플라타대 법대를 졸업하고 크리스티나와 결혼하고 고향 리오가예고스로 돌아가 변호사로 일하였다. 아르헨티나가 민주화되자 페론당에 입당하면서 정계에 진출하였다. 이후 고향인 리오가예고스의 시장직을 거쳐 1991년부터 2003년까지 산타크루스주 주지사직을 역임했는데 매우 좋은 평을 들었다.

하지만 이 시절에는 이후 대통령 시절 그가 유지했던 페론주의의 수호자, 신자유주의의 적대자 이미지랑은 거리가 있었다고 한다. 사실 당시는 페론당 소속으로 대통령직을 지내고 있던 카를로스 메넴이 대대적인 신자유주의 정책을 펴면서 국영기업을 대대적으로 팔아넘겼던 시절이다보니 페론당의 정책 기조도 이 기조에 따라갔기 때문으로 보인다. 석유로 얻는 세수를 잘 활용해서 주민들에게 복지혜택과 일자리를 제공해서 주민들의 생활수준을 대대적으로 향상시켰던 것은 사실. 그래서인지 2천년대 이후 페론당의 주류 노선이 된 키르치네르주의를 페론주의의 단점을 수정하고 보완한 21세기형 신페론주의라고 평가하기도 한다.

2003년 대선에 출마했을 당시의 아르헨티나는 1997년부터 이어진 1998년 아르헨티나 금융위기로부터 시작해서 2001년에 기여히 디폴트를 선언할 정도로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큰 혼란에 빠져 있었다. 같은 시기 에콰도르나 볼리비아 등도 혼란에 빠져있던 것은 마찬가지였지만 아르헨티나가 남미에서도 비교적 부유한 지역이었기 때문에 충격이 크게 다가왔었다. 어찌어찌 대통령이 된다 해도 해결해야되는 일들이 산적한데다가 네스토르 자신의 인지도도 그리 크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부인인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도 대선출마를 말릴 정도였다.[3] 하지만 대통령 선거에서 예상외의 돌풍을 일으키며 결선투표까지 진출하였다. 당시 아르헨티나 대통령 1차 선거는 이변의 연속이었는데, 2001년 선거 당시 반부패 운동을 벌였던 유력 후보 카리요가 1차에서 낙선하고, 1위와 2위, 3위 후보가 죄다 페론당 출신에, 1위는 당시 아르헨티나 경제를 파탄시킨 장본인으로 평가되는 카를로스 메넴이 차지하였다. 그야말로 이변 중의 이변.

그의 맞수는 한때 그와 한솥밥을 먹던 페론당 당수이자 대통령이었던 카를로스 메넴이었다. 당초 카를로스 메넴은 대선에 출마하면 승산이 있을 것이라고 보고 출마를 결정했다. 하지만 경제 파탄을 초래한 장본인이라는 이미지 때문에 두알데 등 카를로스 메넴을 반대하는 정치인들과 지지자들이 대거 네스토르 지지 선언을 하였고, 때문에 선거 운동 기간 내내 여론조사만 했다하면 네스토르 키르치네르가 내내 압승을 거두는 결과가 나왔다. 결선투표에서 참패할게 뻔한 상태였기 때문에 메넴은 결선투표를 앞두고 전격적으로 사퇴하였고 자동적으로 네스토르가 대통령이 되었다. 그렇지만 네스토르 키르치네르 입장에서는 선거에서 7:3 정도로 이겨서 정통성을 잡을 기회가 있었는데 선거가 치러지지 않아 22%의 사상최저득표율, 2위로 당선된 대통령이라는 꼬리표가 붙게 되었기에 영 언짢은 기분이었다고.

3. 대통령 취임 후

그가 대통령에 취임했을 당시만 해도 국제 금융계는 자신들이 내놓은 처방과는 영 딴판으로 가는 그의 선거 공약 때문에 비관적인 전망을 쏟아내기 일쑤였지만, 이런 비관적인 전망을 비웃듯 키르치네르 정권은 재임 첫 해부터 고성장을 기록했으며, 그의 재임기 4년간 기록한 경제성장률은 8%대로 현대 아르헨티나 역사상 가장 높은 수치를 기록했다.[4][5] 실제 키르치네르의 집권기간 아르헨티나 1인당 GDP는 2배 이상 상승했으며[6] 후임인 그의 아내 집권기간까지 포함하면 2015년 약 13789달러로 12년 만에 무려 4배 이상 폭증한다. 2002년 기준 세계 평균의 절반을 밑돌았고, 2003년 겨우 세계 평균의 절반을 넘겼던 게 불과 7년 뒤인 2010년에는 세계 평균을 넘긴 것이다.

물론 전임인 두알데(2002~2003)가 페소화 절하 조치를 취한 반사이익도 어느정도 챙겼고, 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반의 아르헨티나 경제 상태가 너무 폭망이었기 때문에 기저효과가 어느 정도 반영된 영향도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엉망진창인 경제를 불과 3년 만에 말끔히 원상복구시킨 것만으로도 괄목할 만한 업적임은 분명하다. 그 공로로 2005년 중간선거에서도 승리를 위한 전선이 대승을 거두며 국민들에게 성과를 인정받았다. 다만 임기 후반기 들어 고성장에 따른 부작용으로 10% 아래로 떨어졌던 인플레율이 점차 증가해 이후 인플레율을 무리하게 낮추려고 하다보니 여러 무리수를 두었다는 평도 들었다.[7]

어쨌든 나름대로 수완은 잘 발휘해 외채조정을 제법 성공적으로 진행한데다가[8] 때마침 중국이 엄청난 경제성장을 보이고 아르헨티나 화폐가치가 급속히 절상된 덕택에 수출액이 크게 불어나면서 아르헨티나의 경제는 IMF와 국제금융계의 예상을 깨고 다시 급속한 경제성장을 누렸다. 하지만 여전히 국제금융계에선 평가절하되는 경향이 있었는데 이는 여러가지 이해관계가 얽혀있고[9], 같은 키르치네리스모 지도자인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 알베르토 페르난데스의 경제 성과가 영 좋지 못해 정작 자신 임기때는 높은 경제성장률을 기록했음에도 호평이 나오기 애매한 부분이 있어보인다. 다만 그와 별개로 임기 후반기부터 일부 기업인들에게 상당한 특혜를 준데다가 측근들을 제대로 관리를 못해서 과거의 구태를 일부 재현한 거 자체는 사실이다.

과거사 청산에 있어서도 상당한 공을 들였는데, 1990년대에 중단되었던 독재정권의 청산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였으며 이때를 전후하여 과거 군사독재기에 악명을 떨쳤던 인물에 대한 사법적인 처벌이 시작되고 진상규명도 대대적으로 이루어지기 시작했는데 이것도 경제 회복과 더불어 확실한 업적이다. 여하튼 2007년 대선에서 재선에 도전하지 않고 부인인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에게 대권을 넘겨주었고[10] 네스트로 키르티네르는 이후로도 2011년 대선을 염두에 두고 대통령 남편 자격으로 아내의 부족한 부분을 직접 채워주며 정계에 영향을 끼치고 남미국가연합의 사무총장을 지내는 등의 활동을 펼치다가, 2011년 대선을 1년도 채 남겨두지 않고 2010년에 급작스레 산타크루스 주의 엘 칼라파테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한다.

여하간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가 2011년에 재선하면서 빈자리를 채워놓았기는 했지만 2012년 이후로는 여러 실정으로 점차 지지율을 깎아먹다보니 비판자들에게서 "역시 남편이 살아있어야 했어"라는 말이 종종 나오거나 "남편은 그래도 잘했는데 너는 왜 그따구냐?"(...) 라는 투의 조롱도 종종 들었다는 웃지 못할 후문이 있다. 특히 당시 우루과이 대통령이었던 호세 무히카도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를 네스토르 키르치네르와 비교하면서 애꾸눈은 그래도 일은 잘했는데 마귀할멈은 왜 일을 그따구로 하냐라는 식의 조롱을 해서 화제가 되었을 정도. 여하튼 네스토르 시절의 경제성장률은 8%로 높기는 했지만 크리스티나 임기 8년 가운데 5년간 경제성장률을 까먹어서[11] 부부 대통령 시기를 합산한다면 5% 중엽의 수준이 되었다. 그것조차도 전후 정권과 비교하면 매우 준수하다는게 함정이지만.

4. 여담

브라질의 룰라나 베네수엘라의 우고 차베스와 친하게 지냈다. 비슷한 시절에 비슷한 이유로 집권했고 일단 지향하는 목표도 비슷했다는 공통점이 있기는 했다. 서로를 축구선수에 빗대기도 했다고. 그렇지만 네스트로 키르치네르는 룰라나 우고 차베스에 비해서 색깔이 그리 뚜렷하지 못했기 때문에(물론 IMF에게 적극적으로 반대하기는 했지만 그것만으로 색깔이 뚜렷하기는 힘들기는 했다.) 룰라와 우고 차베스에 비하면 국제적으로 주목은 덜 받은 편이었다. 그런데 말년은 가장 깔끔하다. 대통령직을 4년 남짓 지낸데다가 2011년 대선에 출마하지 못한채 일찍 죽어 해외에서 회자되는 빈도가 적은 것도 있을듯.[12] 사실 색깔로 봐도 확연한 사회주의를 내세운 차베스나 온건주의를 내세운 룰라에 비해서 중간에 어중간하게 끼인 위치에 있고[13] 페론주의 성향의 정치인이라는 점도 있기에 사실 좌파내에서도 대놓고 환영받긴 애매한 점도 있다는 것 역시 한 몫 한다. 셋 다 후임은 그다지 좋지 못한 평을 받는다는 공통점도 있기는 하다. 그래도 이쪽 역시 크리스티나가 가장 양호한 케이스긴 하다.

한편, 자신의 실질적 전임자인 임시 대통령(2002~2003) 두알데와는 1990년대부터 2003년도까지만 해도 상당히 절친한 사이였고, 2003년 대선에서도 두알데가 네스토르 키르치네르의 지지를 선언할 정도로 나름대로 가까운 관계였지만, 이후 네스토르 키르치네르가 이미지 쇄신 차원에서 두알데계 인물을 다른 성향의 인물로 갈아치운데다가 2005년 총선을 앞두고 공천권 갈등까지 벌어지면서 완전히 결별하게 되었다.[14] 그래서 두알데가 네스토르와 크리스티나 시절의 비리를 까발린다거나 하는 일도 종종 벌어지고[15] 크리스티나도 맞대응해서 두알데의 역린을 건드리면서 까기도 하는데 둘 다 떳떳히 활동하는걸 보면 아주 큰 타격은 아닌듯하다.

어렸을 때 백일해를 앓고 난 뒤로 사시가 되었다. 위에서 호세 무히카가 애꾸눈이라고 조롱한 것은 이를 빗댄 것.

5. 같이 보기

6. 선거 이력

연도 선거 종류 선거구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당선 여부 비고
1991 아르헨티나 산타크루스 주지사 선거[A] 산타크루스 [[정의당(아르헨티나)|
정의당
]]
20,438 (32.92%) 당선 (1위) 초선
1995 아르헨티나 산타크루스 주지사 선거[A] 46,584 (66.37%) 재선
1999 아르헨티나 산타크루스 주지사 선거[B] 47,067 (54.59%) 3선
2003 아르헨티나 대통령 선거[C] 아르헨티나 승리를 위한 전선 무투표 당선 초선
2009 아르헨티나 하원의원 선거 부에노스아이레스 - (-%) 당선 (1번)[20]


[1] 농담같지만 결코 농담이 아니다. 20세기 중후반 아르헨 정치 권력자들을 보면, 후안 페론의 후임인 이사벨 페론은 무능한 통치로 쫓겨났고, 이후 비델라 등 군사독재 시절 대통령들은 경제도 파탄내고 포클랜드 전쟁도 말아먹으며 욕만 바가지로 먹었고, 민주화 이후의 첫 대통령인 라울 알폰신카를로스 메넴를 위시한 후임 대통령들 역시 경제위기 때문에 욕을 먹으면서 임기를 마쳤다. 부인이자 그가 죽은 뒤에도 재선을 성공한 대통령인 크리스티나 대통령조차도 그다지 성공적으로 호평속에 임기를 마쳤다고 보긴 힘들다.[2] 파타고니아티에라델푸에고 사이에 있는 동네이다. 그 일대에선 제일 큰 도시지만 인구수는 10만명대로 상당히 적다. 그도 그럴 법한 게 애초에 이 지역 자체가 남위 50도 인근으로 상당히 춥다.[3] 그래도 남편이 대선에 출마한 이후로 열심히 선거운동을 도와서 기여히 남편을 대통령으로까지 만들었고 후에 자신도 대통령이 되었다.[4] 물론 라올 알폰신이나 카를로스 메넴도 임기 초기에는 높은 성장률을 기록했지만 재임 후반기에 죄다 까먹었다(...).[5] 당시 키르치네르보다 인지도는 훨씬 높았던 우고 차베스는 임기 초기에 일시적인 유가 하락과 2002년부터 2003년 상반기까지의 대규모 파업 등의 영향으로 경제 상태가 위낙에 오락가락했기 때문에 2003년부터 2012년까지의 경제성장률만 친다면 5%대로 준수한 수준이지만 1999년부터 2003년까지의 경제성장률까지 합하면 2.7%고, 또다른 네임드 브라질 대통령 룰라도 마찬가지로 집권 1기 때는 타 남미 국가에 비해서 성장률이 그다지 높지는 않았고 집권 2기까지 합해도 3.4%의 경제성장률을 보였다. 그래도 헤알화 강세 덕택에 수입물가가 급감한데다가 그러면서도 원자재값의 상승으로 수출은 크게 늘었기 때문에 소득이 늘어나는 효과를 톡특히 봤다.[6] 3333달러(2003)->7211달러(2007).[7] 덕분에 2007년 대선기간을 전후해서 인플레율 조작 의혹도 시작되었다는 것이 중론이다. 빈곤율 조작 의혹도 있는데, 사실 조작 전의 빈곤율도 경제위기가 정점에 달했던 2002년에 비하면 획기적으로 낮아진 수치이기 때문에 그런지 타 남미 국가에서 보면 왜 했는지 모를 수준이긴 하다.[8] 다만 후임이자 아내인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 시절에 이 외채상환을 두고 미국 헤지펀드와 갈등이 벌어졌는데 법정에서 패소하면서 모라토리엄을 선언했고 덕택에 한동안 처량한 신세가 되기도 했다. 불행 중 다행으로 2000년대 초반급의 경제 폭망 사태는 벌어지지는 않았지만 그 대신 아르헨티나의 기업 자금들이 투자처를 찾아 주식시장으로 몰려들면서 자산에 거품이 형성되었다는 지적도 있다.[9] 일단 '채무재조정'이라 부르지만 사실상 배째라 하고 나와서 아르헨티나 채권을 1/4값으로 되돌려주는 것으로서 채권자들의 돈을 강탈하는 것과 마찬가지이고, 같은 정치노선을 걸은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 알베르토 페르난데스도 채권자들, 투자자들 돈을 아무렇지도 않게 강탈하는 모습을 보이니 국제금융계의 여론이 좋을 수가 없다.[10] 당시만 해도 4년씩 나누어서 대통령직을 맡게 되면 레임덕에서도 상대적으로 자유롭게 되면서도 상당한 장기 집권을 할 수 있다는 판단을 했기 때문에 부인에게 대권을 넘겨준 것으로 보인다. 다만 네스토르가 예상보다 이른 60세에 요절하고, 혼자 남은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가 2기 집권부턴 경기 침체를 겪으며 2015년엔 정권까지 내줘 실현되진 못했다. 다만 이때 집권한 우파정권도 경제상황을 회복하긴 커녕 오히려 추락시켜놔 2019년 정권을 되찾고 부통령으로 돌아오긴 한다.[11] 정확히 말하자면 2008년에는 6.8%의 경제성장률을 기록했고 2010년과 2011년에는 각각 9.8%, 6.5%의 성장률을 기록했지만 그 이후로는 저 성장세에 빠진다. 진짜 남편이 죽어서 그런가 물론 2009년 0.9%의 경제성장률을 기록한건 세계금융위기 시절이니 오히려 마이너스 안된 것만도 선방한 것이기는 하지만, 2012년부터 2015년까지는 미국 헤지펀드와 소송에 걸려서 손해본건 맞다.[12] 사실 우고 차베스가 5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떴으니 차베스가 좀 더 젊은 나이로 세상을 뜨기는 했지만 차베스는 44세에 대통령이 되었고 그 이후로도 14년을 장기집권했던데다가 남미은행 설립 등 국제적으로 중요한 일들은 많이 주도해놓았기에 네스트로 키르치네르보다 존재감이 강할수밖에 없다.[13] 물론 네스트로 키르치네르는 정통 사회주의자라기보다는 룰라쪽 노선에 좀 더 가까웠기는 했지만 행보를 보았을때 간보기를 하는 경향이 강하기는 했다. 사실 이는 정통적으로 브라질과 아르헨티나가 경쟁관계에 있는 국가로써 국민적인 감정이 그리 좋지 않기 때문에 무턱대고 연합을 하는 노선을 추진하기에는 다소 껄그러운 면도 없지 않기 때문이다.[14] 사실 두알데 입장에서는 네스토르에게 도움을 줬겄만 자신을 배신(?)하고 경제회복의 성과도 네스토르가 죄다 챙겨먹은 것도 모자라서 구태 청산 명목으로 자신을 배제하기까지 했으니 고까울수밖에 없기는 하다. 국민들한테 밉보이니 어쩔수가 없었다?[15] 마크리 와서도 네스토르와 페르난데스가 비리에 연루되었다는 얘기를 종종 꺼내곤 한다.[A] 부지사 후보는 에두아르도 아놀드.[A] [B] 부통령 후보는 세르히오 아세베도.[C] 부통령 후보는 다니엘 시올리.[20] 2010.10.27. 임기 중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