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CB8596,#191912><colcolor=#000,#fff> 스웨덴-노르웨이 오스카르 2세의 왕비 나사우의 조피아 공녀 Prinzessin Sophia von Nassau | ||
이름 | 독일어 | 조피아 빌헬미네 마리아네 헨리에테 (Sophia Wilhelmine Marianne Henriette) |
스웨덴어 | 소피아 빌헬미나 마리아나 헨리에타 (Sofia Vilhelmina Mariana Henrietta) | |
출생 | 1836년 7월 9일 | |
헤센 대공국 비스바덴 비브리히 성 | ||
사망 | 1913년 12월 30일 (향년 77세) | |
스웨덴 스톡홀름 스톡홀름 왕궁 | ||
배우자 | 오스카르 2세 (1857년 결혼 / 1907년 사망) | |
자녀 | 구스타프 5세, 오스카르, 칼, 유셴 | |
아버지 | 나사우 공작 빌헬름 | |
어머니 | 뷔르템베르크의 파울리네 공주 | |
형제 | 헬레네[1], 니콜라우스 | |
서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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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스웨덴 국왕인 오스카르 2세의 왕비.구스타프 5세와 베스테르예틀란드 공작 칼 왕자의 어머니이며, 구스타프 6세 아돌프, 노르웨이의 메르타 왕세자비, 벨기에의 아스트리드 왕비의 할머니다.
룩셈부르크 대공 아돌프의 이복여동생이자 기욤 4세의 고모임과 동시에 네덜란드의 에마 왕비와 올버니 공작부인 헬레나의 이모이다. 마리아델라이드 여대공과 샤를로트 여대공의 고모할머니(대고모)이다.
2. 작위
스웨덴과 노르웨이의 왕비 문장 | 동군연합 해체 후 스웨덴의 왕비 문장 | 모노그램 |
- 나사우의 공녀 조피아 전하 Her Serene Highness Princess Sophia of Nassau (1836년 7월 9일 – 1857년 6월 6일)
- 스웨덴과 노르웨이의 왕자비, 외스테르예틀란드 공작부인 전하 Her Royal Highness Princess of Sweden and Norway, Duchess of Östergötland (1857년 6월 8일 -1859년 7월 8일)
- 스웨덴과 노르웨이의 왕세자비, 외스테르예틀란드 공작부인 전하 Her Royal Highness The Crown Princess Consort of Sweden and Norway, Duchess of Östergötland(1859년 7월 8일 – 1872년 9월 18일)
- 스웨덴과 노르웨이의 왕비 폐하 Her Majesty The Queen of Sweden and Norway (1872년 9월 18일 – 1905년 10월 26일)
- 스웨덴의 왕비 폐하 Her Majesty The Queen of Sweden (1905년 10월 26일 – 1907년 12월 8일)
- 스웨덴의 왕대비 폐하 Her Majesty The Queen Dowager of Sweden (1907년 12월 8일 – 1913년 12월 30일)
3. 생애
3.1. 어린 시절
1836년 7월 9일 헤센 대공국 비르비히 성에서 나사우 공작 빌헬름과 그의 두 번째 아내인 뷔르템베르크의 파울리네 공주의 1남 2녀 중 막내딸로 태어났다.조피아의 가문인 나사우-바일부르크 가문은 유럽의 여러 왕실과 통혼하면서, 각 나라의 왕족들과 서로 친척관계로 연결되어 있었다.[2]
어렸을 때 아버지인 나사우 공작 빌헬름이 사망했기 때문에, 주로 이복오빠인 나사우 공작 아돌프의 보호 아래에서 자랐다. 또한 이복언니였던 올덴부르크의 페터 공비 테레즈와도 함께 지냈다고 한다.
3.2. 결혼
이후 조피아는 스웨덴의 국왕 오스카르 1세의 아들 외스테르예틀란드 공작 오스카르 왕자와 혼인하게 되었다. 다만 조피아가 결혼할 당시인 1857년에 오스카르 왕자의 형인 스웨덴의 칼 왕세자가 혼담을 거절했던 사건[3] 때문에, 그의 형제인 오스카르 왕자마저 혼담이 오간 공주가 마음에 안 든다는 이유로 거절할까봐 걱정했다고 한다. 이 때문에 당시에는 정략결혼이 보편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특별히 왕자가 신부감과 만나서 대화를 해 본 후 결혼하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이후 오스카르 왕자와 조피아는 1857년 6월 8일에 조피아의 고향인 비스바덴에서 결혼식을 올린 뒤 스웨덴의 왕궁이 있는 스톡홀름으로 향했다.3.3. 왕자비와 왕세자비
오스카르 왕자와 결혼하면서 스웨덴의 왕자비가 된 조피아는 소피아로 불리게 되었고, 많은 사람들로부터 왕위계승자 부부처럼 환영을 받았다고 한다. 오스카르와 소피아가 결혼할 당시 칼 왕세자와 로비사 왕세자비 사이에서 적법한 후계자가 없었기 때문.[4]1857년에 오스카르 1세가 승하하고 칼 15세가 즉위하자, 오스카르-소피아 부부는 정식으로 스웨덴의 왕세자/왕세자비가 되었다. 이듬해인 1858년에 장남인 구스타프 왕자를 출산했으며, 뒤이어 세 명의 아들을 낳으면서 스웨덴 왕실에서 소피아의 입지는 높아졌다.
하지만 소피아 왕세자비는 당시 칼 15세의 궁정을 무척이나 싫어했다. 빅토리아 시대의 도덕률을 매우 좋아하던 소피아 입장에서, 연애 스캔들을 일으켰던 칼 15세의 궁정을 좋게 볼 리가 없었기 때문.
3.4. 왕비
1872년에 칼 15세가 승하하고 남편 오스카르 2세가 스웨덴과 노르웨이 국왕이 되자 소피아도 자동적으로 왕비가 되었다. 소피아 왕비는 당시 스웨덴 여성 왕족들처럼 자선사업에 많은 신경에 썼다.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에게 깊은 감명을 받았던 소피아 왕비는 간호사 양성에 무척이나 열정적인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5]또한 소피아 왕비는 남편 오스카르 2세에게 친독 성향을 가지게 하도록 노력했으며, 노르웨이와 스웨덴이 분리될 때 전쟁을 피하도록 설득했다. 소피아는 노르웨이를 매우 좋아해서 노르웨이와 스웨덴의 분리독립에 평화롭게 독립하도록 힘을 써줬는데 당시 1905년에 일어난 노르웨이의 분리독립으로 인해, 소피아의 작위도 스웨덴과 노르웨이 왕비에서 스웨덴의 왕비로 바뀌었다. 이후 독립된 노르웨이의 첫 왕비는 에드워드 7세의 막내딸인 웨일스의 모드가 되었다.
소피아 스스로도 정치적 개입에 대해 매우 거부감을 느꼈다.[6]
빅토리아 시대의 전형이라는 수식어가 붙었던 소피아 왕비는 스스로도 이런 칭호에 만족했다고 한다.
3.5. 왕대비
1907년에 남편 오스카르 2세가 승하하고 장남 구스타프 왕세자가 구스타프 5세로 즉위하면서 소피아는 스웨덴의 왕대비가 되었다. 소피아는 국정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었지만 정치적 상황을 잘 알고 있었다. 스웨덴-노르웨이 동군연합이 1905년에 해체한 이후, 소피아는 노르웨이를 방문하지 않았지만 1909년에 차를 타고 독일에 방문하였다. 말년을 자선활동과 소피아헤멧을 하면서 지냈는데, 공식석상에서의 마지막 임무는 소피아헤멧의 간호사 시험을 축하하는 행사였다. 그 중에는 소피아의 차남 오스카르 베르나도테 왕자와 차남의 딸인 마리아 베르나도테가 있었다고 한다. 이후 1913년 12월 30일에 스톡홀름 궁전에서 향년 77세의 나이로 승하하였다.4. 가족관계
4.1. 자녀
자녀 | 이름 | 출생 | 사망 | 배우자/자녀 |
1남 | 구스타프 5세 (Gustaf V) | 1858년 6월 16일 | 1950년 10월 29일 | 바덴의 빅토리아 슬하 3남[7] |
2남 | 오스카르 베르나도테 왕자 (Prince Oscar Bernadotte) | 1859년 11월 15일 | 1953년 10월 4일 | 에바 뭉크 2남 3녀 |
3남 | 베스테르예틀란드 공작 칼 왕자 (Prince Carl, Duke of Västergötland | 1861년 2월 27일 | 1951년 10월 24일 | 덴마크의 잉에보르 슬하 1남 3녀[8] |
4남 | 네르케 공작 유셴 왕자 (Prince Eugen, Duke of Närke) | 1865년 8월 1일 | 1947년 8월 17일 |
5. 여담
- 영국에게 매우 친화적이었고 당시 빅토리아 여왕이 통치하던 시기에 유명했던 도덕주의도 좋아했다. 그 계기로 자신의 장남인 구스타프 5세와 빅토리아 여왕의 막내딸인 베아트리스 공주가 결혼하길 바랐다고 한다.
[1] 네덜란드의 에마 왕비와 올버니 공작부인 헬레나의 어머니[2] 사실 나사우-바일부르크 가문의 가계는 엄청 복잡하다. 원래 나사우 가문은 11세기부터 유럽의 유서 깊은 왕가 중 하나였고 세월이 흘러 가문이 두 개로 나뉘어지는데, 장자 계열인 발람계는 나사우의 영지를 상속받았고 차자 계열은 오토계는 네덜란드와 나사우의 다른 영지를 물려받았다. 이렇게 나눠진 두개의 나사우 가문은 각각 룩셈부르크 대공가와, 네덜란드 왕가가 되어 현재까지 후손이 이어지고 있다.[3]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의 조카딸과 혼담을 나누고 있었는데, 칼 왕세자가 갑작스럽게 아무 이유없이 혼담을 파기했다. 그때 당시 스웨덴의 베르나도테 왕조는 신생 왕조인데다 벼락부자라는 이미지가 강해서 반드시 통치 가문과 통혼해야 했고, 타국 왕실간의 혼담을 파기하는 건 베로나도테 왕조의 입지를 매우 불안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때문에 스웨덴 왕실은 다른 유럽 왕실들은 귀천상혼 법칙을 폐지하는 가운데, 불과 50여년 전인 1973년 때까지 귀천상혼 법칙을 계속 유지했다.[4] 칼 왕세자와 로비사 왕세자비 부부 슬하엔 원래 자녀가 2명 있었는데, 장남 칼 오스카르가 일찍 죽어 장녀 로비사 공주만 유일하게 남아있었다. 당시 스웨덴은 노르웨이와의 동군연합인 상태였었는데 스웨덴의 경우 여왕 즉위가 가능했지만, 노르웨이의 경우 살리카법으로 인해 여왕의 즉위가 불가능했다. 칼 15세가 사망한지 33년 후에 노르웨이의 분리 독립으로 인해, 소피아 왕비의 시조카인 로비사 공주의 차남인 칼 왕자가 노르웨이 국왕이 되었다.[5] 일부 의사들은 간호사에 대한 소피아 왕비의 열성적인 반응을 보고 불쾌감을 표시했다고 한다.[6] 큰며느리였던 빅토리아 왕비가 정치에 관여하는 것에 대해 매우 못마땅했다고 한다.[7] 구스타프 6세 아돌프, 쇠데르만란드 공작 빌헬름 왕자 등[8] 노르웨이의 메르타 왕세자비, 벨기에의 아스트리드 왕비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