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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바라의 베렝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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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D9D8><colcolor=#000> 잉글랜드 왕국 리처드 1세의 왕비
나바라의 베렝겔라
Berengela Nafarroakoa
파일:Berengaria of Navarre.jpg
19세기 상상화
이름 바스크어 나바라의 베렝겔라
(Berengela Nafarroakoa)
영어 나바라의 베렝가리아
(Berengaria of Navarre)
출생 1165년 - 1170년
사망 1230년 12월 23일
배우자 리처드 1세 (1191년 결혼 / 1199년 사망)
아버지 안초 6세
어머니 카스티야의 산차
형제 안초 7세, 블란카
1. 개요2. 생애3. 후사4. 여담

[clearfix]

1. 개요

나바라 왕국안초 6세와 카스티야의 산차 사이에서 태어난 공주로, 그 유명한 잉글랜드 국왕 리처드 1세왕비 이다.

2. 생애

리처드 1세와의 혼인은 아키텐 남부를 보호하기 위해 국경을 맞대고 있는 나바라와의 동맹을 도모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문화적인 동질성도 고려되었다. 1186년에 리처드가 나바라 왕국과 아라곤 왕국의 분쟁을 중재하는 자리에서 베렝겔라와 처음으로 만났을 것으로 여겨진다.[1]

1186년에 리처드가 아라곤 왕 알폰소 2세와 나바라 왕 안초 6세의 분쟁을 중재한 뒤 안초 6세가 딸 베렝겔라 나파로아코아에게 몬레알의 일부 영지를 주었는데 몇몇 학자들은 이를 근거로 1185년부터 리처드가 신붓감으로 베렝겔라를 점찍고 비밀리에 약혼 절차를 밟았다고 주장했다.[2] 또한 엘레오노르 다키텐헨리 2세에 대한 반란을 촉발했다는 이유로 유폐되어 있었을 때, 그녀의 석방을 부탁한 것이 안초 6세 부부였다.

1190년 2월, 리처드 1세는 나바라 왕국 국경 근처까지 영지를 순회했다. 길링엄의 추측에 의하면, 이 시기 리처드는 나바라 왕 안초 6세의 딸 베렝겔라와의 결혼을 준비, 지참금은 가스코뉴, 나바라 왕국, 카스티야 왕국과의 외교로 합의하고[3] 베렝겔라가 3차 십자군 원정에 동행하도록 안초 6세를 설득했다.

리처드가 출정을 한 다음 엘레오노르가 나바라를 방문해 그가 있는 곳으로 베렝겔라를 데려 오기로 하고 이 모든 일은 아래의 후술할 약혼녀의 동생인 필리프 2세가 알지 못하도록 철저히 비밀에 부쳐졌다. E.A.R 브라운은 엘레오노르가 헨리 2세와 불륜을 저지른 아델을 싫어하여 베렝겔라를 밀어붙이고 모후를 극진히 사랑한 리처드가 이 결혼을 수긍했다고 본 부분이 있었다.[4]

그녀가 리처드의 아내가 되기 전에 이미 리처드는 루이 7세의 넷째 공주인 아델과 약혼 관계였으나 이는 취소되었다.[5] 이러한 결혼의 변동은 정치적으로는 리처드 1세가 필리프 2세에게 결별을 선언하고 나바라 왕국 손을 잡은 것이었다.

베렝겔라는 결혼을 위해 시어머니가 될 아키텐의 엘레오노르와 함께 시칠리아의 메시나에 도착했으나, 리처드 1세가 즉위하자마자 즉시 제3차 십자군 원정에 나서는 바람에 결혼식을 올리지 못했다. 베렝겔라는 리처드 1세의 누이이자 서거한 시칠리아 선왕의 왕비였던 조안과 십자군 원정에 합류했다. 성지로 가던 도중 폭풍우를 만나 베렝겔라와 조안이 탄 배가 키프로스에서 황제를 자칭하고 있던 이사키오스 콤니노스에게 납치당했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리처드는 키프로스를 점령하고 1191년 5월 12일 베렝겔라와 결혼식을 올렸다. (당시 남편 리처드 1세의 나이는 34세, 그녀는 21세에서 26세) 이후 3일간의 성대한 연회가 이어졌다.

참고로, 당대 잉글랜드 연대기 작가가 기술한 베렝겔라가 3차 십자군에 동행한 이유는 리처드 1세의 적자 생산과 그의 구체적으로 알려지지 않은 지독한 죄의 처방이었다.
전쟁 준비 중에 그가 기쁨을 생각하여 아내를 데리고 참전하는 것은 지극히 나태한 것처럼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상황은 유용함뿐만 아니라 신중함에서도 젊은 왕을 일시적으로 억제했다. 왜냐하면 심지어 이 중대한 시점에도 그의 왕위를 이을 아들이 없었고, 그를 사악한 행위로 이끄는 기쁨을 추구하는 성향 탓이었다. 또한 그는 현명하게도 이 지독한 죄에 적격인 처방(결혼)을 따랐기 때문이었다.
《스티븐, 헨리 2세, 리처드 1세의 연대기 2권》

반면, 앙브루아즈와 편력기의 저자는 리처드 1세가 3차 십자군 원정 기간 베렝겔라와 시간을 거의 보내지 않았음을 우호적으로 기록했다. 몇몇 역사가들은 이에 대해 당시 교회가 삼손데릴라의 일화로부터 읽어낸, 십자군 원정을 비롯한 '종교적 의무를 수행하는 동안의 성관계는 전사를 약하고 무력하게 만든다'는 널리 퍼진 교훈에서 기인했다고 해석했다.

그녀는 필리프 2세를 대면하기도 했다.
프랑스 왕과 아크레 앞에 있는 모든 이들이 리처드 왕이 온 것을 아주 기뻐했다. 그는 그곳에 있는 귀족들로부터 큰 열의과 대단한 존중을 받았다. 리처드 왕의 아내가 해안가로 올 때, 프랑스 왕은 그녀를 아주 예모 있게 맞이했다. 그는 그녀를 자신의 팔로 안아들고 그의 갤리선에 태운 후 육지로 데려다 주었다.[6] 그는 리처드 왕이 저지른 행동으로 말미암은 분노의 기색을 드러내지 않도록 조심했다. 리처드 왕이 나바라 왕의 딸 베렝겔라와 결혼하기 위해 그의 누이를 저버렸기 때문이었다.
《십자군의 역사에 관한 수록본》

리처드 1세는 오스트리아 공국에 유폐당했다가[7] 잉글랜드로 돌아온 후에도 베렝겔라와 함께 지내지 않았다. 교황 첼레스티노 2세는 리처드 1세에게 아내와 제대로 된 결혼생활을 유지할 것을 명했다. 그 후 리처드 1세는 매주 한번씩 베렝겔라와 함께 교회에 갔으나 유지된 기간은 알 수 없다.

일부 역사가들은 그녀가 진정으로 남편을 사랑했으며, 리처드 1세가 그녀에게 가진 감정은 낭만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정치적인 것에 가까웠다고 말한다.

다만 시간이 지나면서 혼인 관계가 안정화된 부분도 있는데 이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한 은자가 잉글랜드 왕을 찾아가 그에게 경고했다.

"소돔의 멸망을 기억하여 불법적인 성관계를 그만두시오. 그렇지 않으면 그에 마땅한 하느님의 벌을 받을 것이오!"

그러나 잉글랜드 왕은 은자의 말을 무시했다. 얼마 후 그가 목숨이 위급할 지경으로 병이 악화되자 은자의 경고를 기억했다. ... 잉글랜드 왕은 주교들 앞에서 죄를 고백하고도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았다. 그는 죄를 뉘우치고 오랫동안 찾지 않았던 자신의 아내에게 돌아갔다. 그리고 금지된 성관계를 포기하고 아내와 어울렸다. 그들의 육신은 하나로 결합하고 하느님께서 왕의 몸과 영혼에 건강을 내리셨다.
《호버든의 연대기》

이후 리처드 1세는 콘월과 데번에서 나오는 수익을 베렝겔라에게 주었다. 잉글랜드 연대기 작가는 부부가 함께 르망 근처를 방문하고 그곳의 영지를 사들여 집을 짓기 시작했다고 기술했다.[8]

시작은 전형적인 정략결혼이었지만 1199년 리처드 1세가 42세의 나이로 서거하자 베렝겔라는 진정으로 비탄에 빠졌다. 왕위에 오른 시동생 존 왕은 베렝겔라에게 선왕비(Queen dowager)로서 받아야 할 연금을 주려 하지 않았고, 여기에는 교황 인노첸시오 3세와 엘레오노르 왕대비도 개입했으나 일이 끝내 처리되지 않았는지 4천 파운드 이상의 빚을 지고 있었다. 이후 존의 아들 시조카 헨리 3세 대에 되어서야 연금을 지불하였다.

베렝겔라는 재혼하지 않았으며 자신의 영지 프랑스 르망에서 평탄한 여생을 보냈다. 그녀는 L'Épau 수녀원(Abbaye de l'Épau)의 후원자가 되었고, 말년에는 그 수녀원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사망했는데 나이는 대략 59-65세였다.

역사학자 앤 트린데드(Ann Trindade)는 그녀를 이렇게 평가했다.
"she is remembered as a benefactor of several…religious congregations and institutions and was regarded as a model of piety."
"그녀는 여러 종교 단체와 기관들의 은인으로 기억되고 경건함의 모범으로 여겨졌다"

3. 후사

후사가 없었던 이유로는 리처드 1세가 동성애자였다는 설과 베렝겔라가 불임이었다는 설이 있다. 하지만 리처드 1세가 슬하에 코냑의 필립이란 사생아가 있기 때문에 이 점이 리처드가 동성애자였다는 설의 근거로는 부합하지 않다는 논박이 있다. 혹은 리처드가 그녀에게서 상속인을 볼 의지가 없었다는 견해도 있다.

4. 여담

잉글랜드에 잘 가지 않았던 그녀의 남편 리처드 1세와 비슷하게, 그녀는 "the only English queen never to set foot in the country(잉글랜드에 발을 들여놓지 않은 유일한 잉글랜드 왕비)"로 알려져 있었다. 남편이 죽은 후 잉글랜드를 방문하거나 사절을 보냈지만, 전에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1] 리처드와 안초가 왕자 신분으로 1177년에 팜플로나에서 마상창시합에 참여하여 친분을 맺었다는 이야기의 출처는 〈History of the Counts of Poitier〉이며 실제 기록에 근거한 것이 아닌 당시 유행한 낭만주의적 역사 서술 방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또한 리처드가 안초 7세와 친분을 맺었다는 기록은 존재하지 않는다.[2] 앙브루아즈는 리처드가 푸아티에 백작 시절부터 베렝겔라를 열렬히 사모하고 깊이 마음에 품었다 주장했고, 1177년 리처드가 나바라 왕국 수도 팜플로나에서 열린 마상창시합에 참여한 전적을 들어 역사가들은 최소 과거에 리처드와 베렝겔라가 안면이 있었다 해석했다.[3] 원정으로 왕국을 비울 때 40년 간 분쟁해 온 툴루즈를 견제하기 위한 전략적 목적이 있었다.[4] 이와 관련하여 13세기에 쓰인 카스티야 왕국의 "엘레오노르 드 아키텐이 아들의 신부로 아델을 못마땅해하여 이 혼담을 무효로 돌릴 방법을 고민하고 직접 아들의 신부를 물색했다. 그 결과 나바라 왕 안초 6세의 맏딸 베렝겔라를 맞아들이기로 했다."라는 기록이 있다. 이 주장은 캔터베리의 저베이스의 "캔터베리 주교 볼드윈을 통해 전해 들은 바, 1185년에 엘레오노르가 유폐에서 풀려났다"라는 기록을 근거로 엘레오노르가 1185년부터 리처드의 신부를 물색했다고 말한다. 뉴버그의 윌리엄은 "엘레오노르가 아들의 신붓감을 고르기 위해 많은 준비를 했다." 디스의 랄프는 "왕위에 오른 직후 리처드가 모후의 이름에 명예가 되는 일이면 무엇이든 하고자 했다."라고 기술했다. 역사가들은 엘레오노르가 알리스를 싫어한 건 확실하다고 동의했다.[5] 이 이유로 아델이 이미 리처드의 아버지인 헨리 2세의 정부가 되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고 이것이 약혼 파기의 한 원인이 되었다.[6] 학자들은 필리프 2세가 십자군 앞에서 두 왕의 갈등에 대한 우려를 불식시키기 위해 베렝겔라를 맞이했다고 해석했다.[7] 그녀는 남편보다 먼저 돌아왔고 이 기간 동안 그녀는 남편의 몸값을 마련하기 위해 노력했다.[8] 알럼은 부부가 화해하고 죄를 뉘우친 리처드 1세가 아내에게 전념하며 평화롭게 살기로 했으리라 해석했다. 잉글랜드 연대기 작가들은 베렝겔라를 "미모와 언변으로 명성이 자자한 여인", "미모보다 현명함으로 명성이 더 높다", "나바라의 아름다운 여인", "검은색 머리와 검은색 눈을 한 사랑스럽고 훌륭한 음악가", "교양있고 온화하고 모든 면에서 리처드 왕과 어울리는 배우자"라고 칭송했다. 역사가들은 베렝겔라가 남프랑스 문화에 익숙하고 음악에 조예가 깊다는 점에서 부부가 공통점이 많았다고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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