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밝은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5-03-26 11:32:40

나례



儺禮
유튜버 50mang쏘망의 현대판 보컬로이드 풍으로 만든 비형랑의 나례가 영상
1. 개요2. 나례도감과 나례청
2.1. 나례가(儺禮歌)
2.1.1. 원문과 현대어 해석

1. 개요

과거 음력 섣달 그믐날에 민가와 궁중에서 가면을 쓴 사람들이 일정한 도구를 가지고 주문을 외워서 귀신을 쫓아내는 의식이었다. 원래 중국에서 시작한 의식이다. 나례와 관련한 대표적인 의식은 12월 그믐날 밤에 주요 악사와 기생들이 궁에서 처용무를 추는 것인데, 처용처용무 문서도 참고하면 좋다.

나례와 관련해서 유명한 사건은 무신정변이다. 뜬금없다고 할 수 있겠지만 무신정변의 주역인 정중부가 문신들에게 원한을 품기 시작한 계기가 이 날에 있었던 모욕 때문이고 정확히 말해 고려사에서는 왕(인종)이 참석한 나례 자리에서 각자 잡기를 보이며 뛰어다니며 즐겼다고 하는데 이 때 내시 김돈중이 정중부의 수염을 촛불로 태워버렸다. 이에 정중부가 때리고 욕보이자 김돈중의 아버지인 김부식이 왕을 찾아가 정중부를 처벌해달라고 하였고 이것으로 말미암아 정중부가 김돈중에게 원한을 가졌다고 한다. 다만 이건 정중부 개인의 김돈중에 대한 원한이고 무신 전체가 김돈중을 증오하게 되는 원인은 따로 있었다.

2. 나례도감과 나례청

나례의식은 무가적 성격이 강한 의식이었으나, 성리학을 이념으로 삼은 조선시대에 와서도 산대잡극(山臺雜劇)의 일종으로 계속 거행되었다. 조선에서 중국의 사신을 맞이할때엔 나례를 준비하는 임시 기구인 나례도감(儺禮都監)을 설치했으며, 의금부와 군기시에 각기 좌변 나례도감과 우변 나례도감이 설치되었다. 본래 태종 대에는 산대도감(山臺都監)으로 불렀으나 이후 나례청(儺禮廳) 혹은 나례도감으로 그 명칭이 정착되었다.

나례도감은 조선초기 대규모 나례를 행할 목적으로 나례가 끝나면 폐지되었다. 광해군대에는 이를 나례청으로 상설화했으나, 인조 때에 나례의 폐단을 지적하고 나례청을 혁파하였으며, 그 뒤에 이따금 그것을 행하고자 할 때는 관상감(觀象監)에서 그 일을 맡아 하였다.

2.1. 나례가(儺禮歌)

나례가를 재현한 연주 영상

나례의식을 거행할 때 사용되던 평음조 고려가요로, 시용향악보에 1절이 수록되어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다.

2.1.1. 원문과 현대어 해석

羅令公宅(나령공택) 儺禮日(나례일)이
廣大[1](광대)도 金線(금선)이샤사ᄉᆞ다
긍에ᅀᅡ 山ㅅ굿ᄇᆞᆺ 겻뎌신ᄃᆞᆺ
鬼衣(귀의)도 金線이시라
리라리러 나리라 리라리

나령공택 나례일엔
광대옷도 금선이시라
궁에서 산굿판 곁들이시니
귀신옷도 금선이시라
리라리라 나리라 리라리


[1] 여기서의 광대는 가면극의 가면을 의미하는데, 특히 처용무는 가장 대표적인 조선 나례용 무악(巫樂)을 대표하는 가면극으로 나례가에서 말하는 금선(金線)또한 처용의 옷을 금색으로 칠하던 것을 의미한다. 연산군은 술에 취해 흥겨우면 직접 처용무를 잘 추었으나, 중종반정이후로는 한동안 폭군의 선례가 되어 금기시되었다. 그러나 전통이 끊어진 것은 아니고 나례가 거의 파해진 영조시기 이전까지 궁중악의 파연에는 계속 사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