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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4 21:41:40

김채곤

김채곤
Chaegon Kim | 金采坤
<colbgcolor=#002e48><colcolor=#fff> 본명 로버트 채곤 김(Robert Chaegon Kim, 金采坤)
출생 1940년 1월 21일 ([age(1940-01-21)]세)
경상남도 부산부
(現 부산광역시)
국적
[[미국|
파일:미국 국기.svg
미국
]][[틀:국기|
파일: 특별행정구기.svg
행정구
]][[틀:국기|
파일: 기.svg
속령
]]
가족 배우자 장명희, 자녀 김정연, 김종륜, 김재연
부친 김상영, 동생 김성곤[1]
학력 경기고등학교 (졸업 / 54회)
한양대학교 (산업공학과 / 학사)
퍼듀 대학교 (산업공학과 / 석사)

1. 개요2. 생애3. 로버트 김 간첩 사건4. 사건 이후5. 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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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의 전직 해군 정보국의 컴퓨터 분석관. 1996년 주미국 대한민국 대사관에 파견된 국방무관이었던 백동일 대령에게 1996년에 일어난 북한대남 도발강릉 무장공비 침투사건 당시 미국 정보 당국이 파악하고 있던 북한 잠수함의 동향 등 군사 기밀을 유출하여 미국 FBI에게 체포된 후 9년간 복역했다.

2. 생애

1940년 부산광역시[2]에서 태어나서 1958년 경기고등학교 졸업[3], 1965년 한양대학교 산업공학과를 졸업하고 미국의 퍼듀 대학교로 유학하여 산업공학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1970년에는 미국 항공우주국에 입사하였고 1974년에는 MITRE Corp[4]에서 교통 업무를 하면서 미국 시민권을 취득했다. 이를 바탕으로 1978년에 미국 해군 정보국에서 근무하기 시작하여 컴퓨터 정보 분석관으로 미군 컴퓨터 시스템인 JME(Joint Maritime Information Element)를 연구, 개발했다.[5] 미국 해군 정보국에서는 비밀 정보 사용 허가인 SCIF(Specialized Compartmented Information Facility)를 취득했다.

KF-21과 관련하여 미국의 스텔스 전투기 기술을 유출한 혐의로 미국에서 처벌받은 한국계 미국인 박시몽과 유사한 점이 있는데 한국계 미국인으로 공학을 전공하였고 미국의 국방 관련 정보를 모국인 대한민국에 유출하였다는 점 등이 공통점이다.

이와 비슷하게 2024년에는 오바마 행정부에서 대북 관련 업무를 했던 수미 테리가 스파이 혐의로 체포되는 사건이 일어났는데 한미관계혈맹이라고 불릴 정도로 가까운 사이지만 자국의 국익을 위해서는 한미 양국이 첨예한 경쟁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3. 로버트 김 간첩 사건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로버트 김 간첩 사건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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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사건 이후

1997년 7월 미국 알렉산드리아 연방법원에서 징역 9년과 보호관찰 3년을 선고받아 교도소에 수감되고 나서 처음에는 치과에서 조수로 일하다가 목공 공장에서 일했고 2년 후에는 중국계, 히스패닉계 재소자에게 영어 수업을 하면서 교도소 내 도서관에서 일했다고 한다. 출감 6개월 전에는 민영교도소로 옮겨서 주중에는 직접 운전하여 교도소 밖의 세탁소에서 일하면서 급료를 받았고 주말에는 집에도 다녀올 수 있었다고 한다.

2004년 6월 1일 출소해 가택 수감, 2004년 7월 15% 감형받아 보호관찰을 받아서 전자발찌를 차고 생활했는데 본래의 보호관찰 기간은 3년이었지만 나중에 1년으로 단축되어 2005년 10월 4일에 보호관찰이 종료되었다. 2005년 11월 6일 한국을 방문하였고 김수환, 김대중, 조용기 등 한국의 저명 인사들을 방문하였다.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이 물심양면으로 도움을 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보호관찰이 끝난 후에도 한동안 FBI의 감시를 받아 왔는데 주지사에게 청원하여 2015년에야 복권되었다.

5. 저서



[1] 로버트 김 후원회 홈페이지 로버트 김 약력 참조.[2] 전라남도 여수시 출생으로도 알려졌지만 초등학교를 여수에서 졸업했다.[3] 54회 졸업동기로 박찬종, 유흥수, 이상배, 이태섭(이상 국회의원), 오명, 한승주, 윤여준(이상 정부), 손경식(재계) 등이 있다. 졸업생 582명중 300여명이 서울대에 진학했다.[4] 1958년 MIT Lincoln Lab에서 분사한 군사 싱크 탱크로 1990년 냉전 종식 이후에는 다양한 분야에 진출했다. 로버트 김은 재직 당시 군사 관련 업무를 했을 것으로 보인다.[5] 로버트 김 후원회 홈페이지 로버트 김 사건 개요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