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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6:13:14

김종태(1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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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태
파일:김종태 열사.jpg
출생 1958년 6월 7일
경상남도 부산시 동구 초량동
(現 부산광역시 동구 초량동)
사망 1980년 6월 14일 (향년 22세)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신촌동 세브란스병원
학력 중학교 졸업자격 검정고시 (합격)
제일 산업중학교 (졸업)

내 작은 몸뚱이를 불사질러 광주시민, 학생들의 의로운 넋을 위로해드리고 싶습니다.

1. 개요2. 생애
2.1. '깨어있는' 노동자로서의 삶
2.1.1. 광주, 광주, 광주
3. 광주 시민학생들의 넋을 위로하며4. 참고 자료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의 민주운동가이자 열사.

2. 생애

2.1. '깨어있는' 노동자로서의 삶

1958년 부산 초량동에서 목수 김윤배의 아들로 태어났다. 가족과 함께 상경하여 서울 미아리에서 학창 시절을 보냈다. 당시 미아리는 서울에서 손꼽히는 빈민촌 중 하나였다. 하지만 70년대 재개발로 인해 그의 가족은 쫓겨나 광주대단지로 강제이주 당한다. 게다가 아버지마저 연탄가스 중독과 중풍으로 쓰러지면서 김종태는 엉겁결에 '소년가장' 노릇을 해야 했다. 그로부터 그는 노동자가 되었다.

성남에서 여러 일을 전전하다가 17살에 성남 제일실업학교에 들어가 사회현실에 눈을 뜨게 되었다. 18살 때 검정고시에 합격했고, 가나안 농군학교에 들어가 공동체적 삶에 대해 공부했다. 농군학교를 수료한 후에는 제일실업학교 출신 노동자들로 구성된 '형제단'에 들어가기도 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며 김종태는 노동운동가로 한층 성장하게 된다.

그러던 중 주민교회에서 이해학 목사를 만났다. 이해학 목사[1]는 민주화운동에도 참여한 바가 있는 진보적인 종교인으로 김종태에게 크나큰 영향을 미쳤다.

1979년 연고지였던 미아리에서 방위병으로 복무하게 되었으나 여전히 사회현실을 외면하지 않고 주변인들을 모아 독서회를 꾸리기도 했다. 그러던 중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는 사건이 발생하고 만다.

2.1.1. 광주, 광주, 광주

군인이었지만 방위였기 때문에 김종태는 계속 주민교회에 다니고 있었다. 1980년 6월 1일, 주민교회에 특별한 자리가 마련되었다. 5.18을 겪고 광주를 빠져나온 사람들의 증언을 듣는 자리였는데, 김종태 또한 거기 있었다.

강단에 선 사람은 동화작가 윤기현으로 농민운동을 하던 중 광주에서 5.18을 겪었었다. 그가 광주의 참상을 말하자 주민교회의 교인들은 울었다. 헌데 김종태는 의문을 제기했다. 실제로 그런 일이 있었냐고 따졌다. 이에 윤기현은 그에게 직접 광주로 가보라고 말했다. 김종태는 곧 광주로 향했고, 모든 것을 알게 된 후 다시 성남으로 돌아왔다.
진실을 안 김종태는 사람들에게 5.18의 진실을 알리는 전단지를 만들어 뿌리고 다녔다. 하지만 소용이 없었다. 동생의 증언에 따르면 그는 매일 직접 유인물을 만들고 밤을 새워가며 등사하여 5.18을 알리기 위해 노력했으나 아무도 안 들어줬다고 한다.

1980년 6월 9일[2], 그 날도 그는 열심히 유인물을 행인들에게 나누어주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형사가 나타나 그를 뒤쫓아왔다. 그러자 김종태는 유인물을 한꺼번에 뿌리고는 미리 준비한 석유를 뒤집어쓰고는 불을 당겼다. 그리고 이렇게 외쳤다.
노동삼권 보장하라! 비상계엄 해제하라!
이 상황을 목격한 어느 약사가 소화기로 불을 꺼주었으나 이미 때는 늦은지 오래였다. 김종태는 지나가던 트럭에 실려 세브란스병원 응급실로 이송되었으나 5일만에 숨을 거뒀다.

그의 묘비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영원한 노동자 김종태님은 성남에서 일한 노동운동가 민중이 주인 되는 세상을 위해 <형제단>을 만든 예수의 제자 5·18광주학살에 분노“광주시민의 넋을 위로하며”라는 성명서 를 발표하고 80년 6월 9일 신촌네거리에서 분신 92년 5월 광주 5월 시민상 수상 광주의 정신과 하나가 되어 여기 묻히다. - 망월동에 묻힌 김종태의 묘비에 새겨진 글귀

3. 광주 시민학생들의 넋을 위로하며

오늘날 한국의 암울한 상황을 타개해 나가고자 분연히 일어났던 용기 있는 한국인들이여! 그대들이 피를 흘리면서 성토하던 그 안개정국은 이제 완전히 마각을 드러내어 뻔뻔스럽게도 그 음모와 책략을 표면화했습니다. 소위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가 군장성들로 구성되었으며, 행정부의 전기능을 장악하고 그 우두머리에 전두환 중장이 상임위원장이란 감투를 쓰고 올라 앉았습니다. 허수아비 같은 최규하 대통령을 뒤에서 조종하며 숱한 민중의 지도자들을 법의 이름으로 잡아들이고 있습니다. 숱한 학생들은 포고령의 이름으로 발가벗기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이 땅엔 또다시 군사정권이 들어섰습니다. 지을 수 없는 역사적 과오 5.16 쿠데타, 그후 19년간 장기독재, 아! 한국의 앞날이 먹구름으로 덮이고 있습니다. 박정권 20년간의 좋은 시절을 좀처럼 청산할 수 없다는 듯이 독재 밑에서 부정부패로 치부해 오던 유신체제 잔당들이 지금 이 나라를, 이 국민들을 손아귀에 넣으려 하고 있습니다. 진실은 유언비어가 되고 유언비어가 진실이 되어 버리는 이 어지러운 시국은 국민들에게 입을 막고 귀도 막을 것을 강요하고 있습니다. 국민들은 입이 있어도 말을 못하는 채, 귀가 있어도 못 들은 채, 눈이 있어도 못 본 체해야 겨우 목숨을 부지하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요컨대 국민들이 수군거려선 안 되는 무서운 음모, 계략들로 가득찬 정권야욕에 불타는 무리들, 민주가 어떻고 민족이 어떤지 안중에도 없는 무리들이 지금 이 땅에서 활개를 치고 있습니다. 악이 선보다 강한 세상, 정의가 불의한테 눌리는 세상, 이런 세상이야말로 우리가 분노해야 하고 고쳐 나가야 할 세상입니다. 법과 질서라는 미명 하에 행해지는 조직적인 폭력, 몽둥이와 포승줄 아래 우리들의 모든 자유는 빼앗기고 눌린 채 한국의 밤은 깊어지고 있습니다. 기다림에 지친 다수의 국민들은 저마다 모두 불신을 품고 앉아 점점 무기력해 가고 있습니다. 용기를 잃어 가고 있습니다. 아니, 그보다도 무관심해지고 있습니다. 몽둥이와 포승줄 아래 두려움을 느끼고 있습니다.
국민 여러분!
과연 무엇이 산 것이고 무엇이 죽은 것입니까? 하루 삼시 세 끼 끼니만 이어가면 사는 것입니까? 도대체 한 나라 안에서 자기 나라 군인들한테 어린 학생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수백, 수천 명이 피를 흘리고 쓰러지며 죽어가고 있는데 나만, 우리 식구만 무사하면 된다는 생각들은 어디서부터 온 것입니까?
지금 유신잔당들은 광주 시민, 학생들의 의거지역감정으로 몰아붙이며 '전라도 것들'이라는 식의 민심교란작전을 펴고 있습니다. 국민의 의사를 몽둥이로 진압하려다 실패하자 칼과 총으로 진압하고서 그 책임을 순전히 불순세력의 유언비어 운운하며 국민들을 기만하고 우롱하고 있습니다. 국민들이 계엄철폐를 주장하면 계엄을 더 확대시키고 과도기간 단축을 요구하면 더욱 늘리려고 혈안이 되어 있으면서, 학생들에게는 자제와 대화를 호소한다니 정말 정부에서 말하는 대화의 자세란 어떤 것인지 궁금하기만 합니다. 안보를 그렇게 강조하면서도 계엄령 확대와 시민의 감시 등을 하기 위해서 전방의 병력을 빼돌려 서울로 집결시키는 조치는 정말 이해가 안 갑니다. 사리사욕이라는 것이 그렇게 무서운 것인가를 새삼 느꼈으며, 권력이 그렇게도 잡고 싶은 것인 줄 새삼 느꼈습니다. 한 마디로 한국 국민들을 무시하고 있습니다. 국민의 저력을 우습게 보고 있는 저들에게 따끔한 경고를 해주고 싶습니다. 독재자 박정희의 말로가 어떻게 끝났는가 하는 물음을 던지고 싶습니다.
내 작은 몸뚱이를 불살라 국민 몇 사람이라도 용기를 얻을 수 있게 된다면 나는 몸을 던지겠습니다. 내 작은 몸뚱이를 불질러 광주 시민, 학생들의 넋을 위로해 드리고 싶습니다. 아무 대가 없이 이 민족을 위하여 몸을 던진다는 생각은 해 보지 않았습니다. 너무 과분한, 너무 거룩한 말이기에 가까이할 수도 없지만, 도저히 이 의분을 진정할 길이 없어 몸을 던집니다.

1980년 6월 9일
김종태
1980년 6월 9일, <광주시민,학생들의 넋을 위로하며> 전문[3]

4. 참고 자료

그들의 광주, 우리의 광주(2)_김종태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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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참고로 이해학 목사는 현재 주민교회의 원로목사이시다.[2] 이 날은 그가 제대하기 일주일 전이었다.[3] <5.18광주민주화운동자료총서> 제2권, 광주광역시 5.18사료 편찬위원회, 1997. 다만 작성자가 김종태가 아닌 김의기로 잘못 적혀있고, 작성 날짜도 사실은 1980년 6월 9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