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 때 모습. |
중학교 때 모습. 이때부터 남자를 좋아하게 되었다고 한다. |
고등학교 졸업사진. |
김유복(金遺腹) |
1940년(일자미상) 출생 |
2016년 10월 11일 오전 1시 5분경 (향년 76세) 사망 |
1. 개요
대한민국의 게이, 성소수자로, 1940년에 태어났다. 본명은 김유복자(金遺腹子)이고 이태원동 트랜스젠더바[1]에서 접대 일을 하던, 남성을 좋아하는 MTF 트랜스젠더였다.[2] 부산 출신이다. 여담으로 아버지는 김유복이 태어나기도 전에 병으로 돌아가셔서, 유복자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2. 생애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남자를 좋아하게 되고, 부산에서 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상경하여 가수 생활을 시작했다고 한다.안타깝게도 어머니와 생이별하여 어머니의 얼굴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고 한다. 또한 유일한 혈육이었던 누나마저 20대에 세상을 떠나 고아나 다름없이 지냈다고 한다. 보호자는 과거 트랜스젠더 바에서 일하면서 알게 된 이요나 목사가 유일하다고 한다.
젊은 시절에는 MBC 라디오 전속가수와 연극 배우로서 활동한 적이 있었다. 당시 풍부한 가창력으로 가수들 사이에서 인지도가 꽤 높았다고 한다. 그런데 낮에는 MBC 라디오 전속가수로 일하는 한 편, 밤에는 이태원 게이바에서 노래를 부르는 이중 생활을 했었다고 한다. 당시는 여성호르몬을 맞기 전이었다.
그러다가 30대 초반, MBC에서의 가수 생활을 그만 두고 밤무대로 발을 옮기면서 여장을 시작하게 되었고, 눈썹 문신을 하고 약국에서 여성호르몬제를 사서 맞기도 했다고 한다.[3]
이요나 목사와 처음 만난 곳은 서울특별시 성동구 금호동에 있었던 한 게이바에서 처음 만났다고 한다. 당시 이요나 목사는 충무로에서 의상실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동성애자 친구가 대구에서 올라오자 친구들과 같이 술자리를 가지려 게이바에 갔었다고 한다.
그 때 김유복 씨는 붉은 집시 옷과 작은 손부채를 들고 쿠바의 볼레로 노래인 <키사스 키사스 키사스 (Quizas quizas quizas)>[4]를 부르고, 이 외에도 일본의 엔카, 라틴 음악, 팝을 자유자재로 불렀다고 한다.
이 후 김유복 씨가 기억에서 잊혀지지 않았던 이요나 목사는 1980년 이태원동에서 최초의 게이바 '열애클럽'을 개업했을 때 전속 가수로 캐스팅하면서 김유복 씨는 '김마리네'라는 이름으로 단독 무대를 가질 수 있게 되었고, 점차 이요나 목사와 친분을 쌓게 되었다.
클럽 '열애'는 아직도 있는데, 자신이 개업한 게이바(트랜스젠더바)를 중심으로 현재 이태원에 파악된 게이바가 100개가 넘는다는 사실을 듣고 깜짝 놀랬다고 한다. 당시 게이바는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큰 센세이션이 되어 당시 인기가 높았던 가수들이 많이 방문했었는데, 가수 패티김이 김유복 씨의 노래를 듣고 "절대음감의 소유자"라고 엄청 칭찬했다고 한다.
엄청나게 성업한 '열애클럽'은 일본 신주쿠에 지점까지 개업했고, 이름은 '벨라미 클럽'. 김유복 씨는 일본 클럽에서 노래를 부르기 위해 1년 간 일본에 원정을 다녀왔다고 한다. 이 때 김유복 씨는 인생의 황금기를 누렸다.
트랜스젠더가 된 이후에 가족들과 관계가 나빠져서 의절 상태가 되기는 했어도 꽤나 잘나갔기에 대모 소리를 들었던 적이 있었다고 한다. 트랜스젠더(게이로 잘못 알려짐)를 다룬 뮤지컬 <미스터 레이디>에 출연하기도 했다.
탈동성애 운동가 목사 이요나를 만나 성별 정체성이 남성으로 바뀌고, 동성애는 사랑이 아니라고 주장하였으며 #, # 나는 더 이상 게이가 아닙니다에 출연해 탈동성애를 주장하기도 했다.[5]
그의 말을 국민일보가 정리한 것 #, #[6]
그는 '동성애는 겉으로는 애절한 사랑처럼 보였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열렬하게 붙어다니다가도 미련없이 헤어지는 등, 지조나 정조와는 거리가 멀었다.'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그가 트랜스젠더바에서 일했다는 것과 기독교에서는 트랜스젠더가 포함된 커플의 동성애/이성애를 출생 시 성을 기준으로 한다는 점[7]을 볼 때 이는 그를 비롯한 트랜스젠더 종업원들과 남성 손님들의 관계를 동성애라고 오해한 것으로 보인다. 엄밀히 말해 남성애 MTF 트랜스젠더와 시스젠더 남성 간의 연애는 동성애가 아니라 이성애이다. 이는 시스젠더 남성 게이나 남성에 끌리는 FTM 트랜스젠더들의 동성애와는 전혀 다르다. 또 그가 동성애가 지조나 정조와 거리가 멀다고 표현한 것은 그가 유흥업소에서 일하며 자신이 보고 들은 사례만으로 판단한 확증 편향에 가깝다. 유흥업소 종사자와 고객 간의 사랑이 진실되고 지조있을 확률은 이성애자 남녀 사이라 해도 크게 높지 않을 텐데 이를 성산업의 특수성에 기인한 문제가 아니라 동성애의 문제로 퉁쳐버린 것. 그의 주장과 달리 평범하게 만나 사귀는 동성애자들의 연애는 이성애자들의 연애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런데 1985년 1988 서울 올림픽을 앞두고 정부에서 퇴폐 유흥업소를 단속하기 시작했는데, 그가 운영하던 게이바도 적발되며 벌금과 함께 1개월 영업정지 처분을 받았지만 이요나는 게이바 이외에도 3개의 가게를 운영하면서 영업을 이어나갔다.(목사가 되기 전의 일.)
그러나 서울 올림픽이 끝나고 1989년 사회 정화를 목적으로 더욱 강화되고 본격적으로 유흥업소를 단속하기 시작하면서 이요나는 1989년 말 일본으로 몸을 피했고, 이 때 김유복과의 인연이 끊어졌다고 한다.
1993년 일본에서 탈동성애를 하고 이후 신학을 공부하면서 일본 갈보리채플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1994년 6월 현재의 갈보리채플 서울교회를 창립한 이후 수소문 끝에 1995년 5월 김유복 씨를 찾게 되었는데, 이태원동의 5평 남짓한 쪽방에서 비참한 상태로 생활하고 있었다. 젊은 시절부터 만성 척추측만증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증세가 더 악화되고 거기에다 여성호르몬 과다 투입으로 인한 후유증이었던 것이다.[8] 이요나 목사의 설득 끝에 여자 옷과 악세사리 등을 다 버리고 여성호르몬 주사 투여도 중지하고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다고 한다.
3. 근황, 그리고 죽음
그러다가 한참 뒤 주변 지인들로 부터 김유복 씨에 대한 소식을 들었는데, 2004년 허리디스크 수술을 받다가 의료사고로 신경이 끊어져 한남동 도깨비시장[9] 구석의 단칸방에서 알몸에 기저귀만 찬 채 기초생활수급자로 생활하고 있었다고 한다.[10][11]이요나 목사의 도움으로 2007년 재수술을 받았지만 소용없었고, 이후 10년을 외출도 못 한 채 누운 채로 생활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2015년 3월, 이요나 목사와 함께 <나는 더 이상 게이가 아닙니다>라는 탈동성애 다큐멘터리에 출연하였다. 작중 "내가 한국 트랜스젠더 1호였다"라고 말하는 것을 보면 비록 과거에는 자신을 (여자가 아닌) '트랜스젠더'로 여겼다가 자기를 확실히 남성으로 여기게 된 듯하다.
2016년 8월 6일, 갑자기 급성 패혈증 증세가 심각해지면서 한남동 순천향대학교 부속 서울병원 응급실에 입원하였다. 입원 첫 주에 "주말을 넘기지 못할 것"이라는 의사의 예상이 있었으나, 2개월 후인 2016년 10월 11일 오전 1시 5분에 만 7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발인은 10월 13일 오전 10시 이요나 목사가 담임하고 있는 갈보리채플 서울교회장으로 순천향대병원에서 거행되었으며, 서울특별시 서초구 원지동 서울추모공원에 안장되었다.[12]
그리고 임종 전 이요나 목사에게 유언을 남겼다고 하는데, "장례는 이요나 목사가 맡아서 집례하고, 후원금에서 요양비와 장례비를 치르고 남은 돈은 교회 사역하는데 보태달라"라고 했다고 한다.
이 후 2017년 이요나 목사가 동성애자들을 전도하기 위해 종로 (낙원동), 이태원 등에 북카페를 설립할 계획을 갖고 있는데, 김 씨가 유언과 함께 남기고 간 300만 원을 북카페 설립 기금에 사용하겠다고 하였다.
4. 탈동성애 운동에서의 활용: 김유복의 불행은 정말로 동성애 자체의 본질 때문인가?
이요나를 비롯해 국내의 탈동성애 운동을 지지하는 호모포비아가 선전용으로 내세우는 대표적인 대상이다. 보통 김유복의 '동성애는 겉으로는 애절한 사랑처럼 보였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열렬하게 붙어다니다가도 미련없이 헤어지는 등, 지조나 정조와는 거리가 멀었다.'는 고백과 스스로 거동을 거의 하지 못하는 비참한 생활상을 특히 강조하며, 그러한 모습을 동성애의 결과라고 선동한다. 그러나 김유복의 불행한 말년은 정말로 동성애 자체의 본질적인 요소에 기인하였다고 보기 어렵다. 김유복의 삶을 그의 환경에 빗대어 정리하면,① 김유복이 트랜스젠더로 활동하던 시대적 배경 상, 동성애나 성전환이 극도로 터부시되었고, 동성연애나 성전환자의 연애도 혐오받았다.
② 김유복이 종사하던 직업은 유흥업소(트랜스젠더바) 운영이다.
③ 제대로 된 성전환 수술이나 호르몬 요법도 존재하지 않던 시기에, 약국에서 자의적으로 여성호르몬제를 구매하여 복용하는 방식으로 성전환을 시도했다.
④ 거동이 불편했던 것은 허리디스크 수술이 심하게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⑤ 태어났을 때부터 유복자였으며, 가족과의 연도 모두 끊어진데다 장애까지 얻어 생활이 불편한 김유복을 도울 수 있었던 사람은 탈동성애 운동을 주도하는 이요나 목사가 전부였다.
이러한 조건을 모두 고려하면, 그가 겪은 불행의 근원적인 이유를 동성애나 성전환에서만 찾는 것은 매우 부적절하다고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이외에 탈동성애 운동권에서 강조하는 '불행한 성소수자'의 사례도 그 원인이 무조건 동성애라고 단정할 수 없으며, 모든 성소수자를 대상으로 일반화할 수는 더욱 없다.[13]
[1] 당시에는 게이바라고 불렸다.[2] 트랜스젠더바에서 일하던 시절 가슴 확대 수술을 하고 여성호르몬까지 맞았다고 한다. 사망 직전까지도 그 흔적이 뚜렷하게 남아있었다.[3] 당시는 의약분업 이전이라 가능한 것이었고 지금은 여성 호르몬제는 처방전이 없으면 살 수 없는 전문 의약품으로 분류된다.[4] 쿠바의 오스발도 파레스가 1947년에 만든 곡이다. 이후 냇 킹 콜, 빙 크로스비가 불러 유명해졌다.[5] 현재 이 영상은 보수기독교 단체, 극우 성향 호모포비아들이 에이즈, 원숭이두창과 더불어 동성연애/동성결혼 관련 이야기가 나오면 동성연애/동성결혼의 결말이라며 득달같이 가지고 오는 영상이다. “동성애의 비참한 결과를 다루는 다큐가 있다.”, “탈동성애 한 사람 있다.”는 뉘앙스 댓글이 달리면 십중팔구 이 영상이라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탈동성애 운동은 예저녁에 유사과학이며 현실성 없다고 이미 판명났다. 그리고 성적 지향은 여러 사람을 만나가며 알아가는 것이다. 위생과 건강 때문에 항문성교를 기피하는 게이도 있고, 피임 목적으로 항문성교를 하는 이성애자들도 있다.[6] 국민일보는 개신교계 신문사로 동성연애/동성결혼에 대해서는 당연히 비판적으로 본다.[7] 하지만 꼭 그런 것도 아닌 것이 트랜스 남/녀 커플의 사랑도 그냥 깐다.[8] 여성이 골다공증과 근력에서 남성보다 취약하므로 근골격 질환을 겪기 쉽다.[9] 이태원 (한남동) 이슬람 성원을 지나 더 올라가면 나온다. 쉽게 설명하자면 한남대교 강북 방면으로 건너다보면 왼편으로 언덕에 집들이 촘촘히 모여있고 그 위에 조그마한 교회가 보이는데 그 부근이다.[10] 세간의 주장에 따르면 항문 섹스로 인한 항문파열이 원인이라고 하나 이는 이요나 목사가 직접 부정한 사실이다.[11] 그런데 요/변실금은 척추신경 손상으로 인한 경우가 매우 많다. 그리고 오해와는 달리 남성보다 여성에게 더 흔하다. 그리고 이렇게 변실금이 여성에게 더 흔한 원인 중 하나는 아이러니하게도 탈동성애 운동가들이 그렇게 동성애 반대의 논지로 내세우는 임신 및 출산으로 인한 척추/골반 주위 근육 손상 때문이다. 이에 비해 판단은 알아서 할 일이지만 항문성교가 변실금 원인이라는 건 아직 명확하게 밝혀진 것은 아니다. 반면 척추질환이나 출산으로 인한 척추/골반기저근 손상이 변실금을 유발한다는 것은 확실한 의학적 사실이다. http://www.mediatoday.co.kr/?mod=news&act=articleView&idxno=131676[12] 서울추모공원에는 별도의 납골시설이 없으나, 자연장지가 있다. 서울추모공원에서 화장된 뒤 자연장지에 유골이 뿌려진 것으로 보인다.[13] 이는 당연한 것이 팀 쿡, 조디 포스터, 이언 매켈런 등 사회적으로 성공한 동성애자도 무수히 많다. 오히려 그들의 행복을 가로막는 것는 동성애 자체가 아니라 동성애를 향한 사회의 편견과 차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