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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현(1900)

파일:김구현(1900).jpg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출생 1900년 5월 6일
경상북도 안동군 풍북면 오미동
(현 경상북도 안동시 풍산읍 오미리[1] 244번지)[2]
사망 미상
사망지 미상
본관 풍산 김씨(豊山 金氏)[3]
이명 김수특(金壽特)
범주(範疇)
상훈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1. 개요2. 생애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독립유공자.

2. 생애

1900년 5월 6일 경상북도 안동군 풍북면 오미동(현 안동시 풍산읍 오미리 244번지)에서 아버지 김재덕(金在悳, 1883 ~ 1953.12.21.)[4]과 어머니 진성 이씨(1879 ~ ?.7.28.)[5] 사이에서 2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이후 안동군 예안면 서부동[6] 117번지로 이주하여 이곳에 본적을 두었다.[7]

1919년 3월 11일 예안면장 신상면의 호출로 예안면사무소 숙직실에서 신동희·신응두·이광호·이남호(李南鎬)·이시교(李時敎)·이중원(李中元)·백남학(白南鶴)·이호명(李鎬明) 등과 만났고, 신상면으로부터 일전에 예안면 사람 김동택·이동봉(李東鳳)·이용호(李用鎬)·신응한(申應漢) 등은 3월 3일 경기도 경성부에서 치러진 고종인산에 참석하였다가 그곳에서 일어난 3.1 운동을 목격하였고, 이후 귀향하여 독립만세시위 소식을 전했다는 것을 들었다. 이에 숙직실에 모인 사람들과 함께 예안면에서도 만세시위를 일으키기로 결의했다. 처음에는 이튿날인 3월 12일 예안면 장날에 거사하려 했으나 날짜가 촉박했으므로 다음에 올 장날인 3월 17일에 만세시위를 벌이기로 결정하고, 예안면사무소 내에 비치된 등사판을 이용하여 기미독립선언서를 인쇄하고 태극기도 제작하였다.

3월 17일 오후 3시 30분, 이들은 면사무소 뒤편 선성산(宣城山)에 일본인이 세워 놓았던 대전기념비(大典記念碑)[8]를 무너뜨린 후 독립만세를 외치며 예안면 장터로 집결하였고, 이에 예안공립보통학교[9] 재학생, 만촌교회[10] 장로 민태규기독교면려(勉勵)청년회 간부 신세균(申世均) 등이 이끄는 만촌교회 신도들, 예안면 유림 지도자 조수인(趙修仁)과 김진휘(金鎭暉)·조맹호(趙孟鎬)·조방인(趙邦仁) 등이 이끄는 유림, 이원영 등을 비롯한 진성 이씨 문중 사람들이 각각 시위대에 합류함으로써 시위대의 규모는 2천여 명에 달하였다. 이 때 일본 제국 경찰 및 주재소 헌병들이 시위대 선두에 섰던 15명을 체포하였는데, 이를 계기로 시위대는 더욱 불어나 보다 거세게 만세시위를 전개하면서 예안주재소까지 점령하였다. 이어 시위대는 일본 제국 육군 군인 및 일본 제국 경찰 3명을 포로로 삼아 무장 해제시킨 뒤 이들을 앞세워 '대한독립만세'를 부르게 하며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오후 6시에는 주재소 앞에서 구금된 사람들의 석방을 요구하였고, 주재소를 둘러싸고 돌과 기왓장을 던졌다. 이 과정에서 시위대 25명이 다시 체포되었고, 이후 안동군에서 출동한 일본 제국 육군 수비대에 체포되었다.

1919년 4월 7일[11] 대구지방법원 안동지청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을 선고받았다. 이때 20세 학생이었던 김구현은 원심 판결 조서에서 "우리 조선 민족도 자결(自決), 곧 스스로 결정하여 독립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만세를 높이 불렀노라고 주장했다.# 4월 16일 대구지방법원에서 형무소로 이감되었고[12], 공소를 제기하여 5월 10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 혐의에 대해 원심 판결이 취소되었으나 형기는 그대로 유지되었다.[13] 이후 상고를 제기하였으나 6월 12일 고등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 혐의에 대해 상고가 기각되어[14] 최종적으로 형이 확정되었다.

출옥 후 안동군 예안면 서부동 167번지로 이주하여 본적을 옮겼다.[15] 그러나 이후의 행적은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

1995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1] 풍산 김씨(豊山 金氏) 집성촌이다. 독립유공자 김만수·김재봉·김지섭도 이 마을 출신이다.[2] 1919년 6월 12일 고등법원 수형인명부[3] #. 심곡공파(深谷公派) 29세 현(鉉) 항렬.[4] 자는 치성(穉成).[5] 퇴계 이황의 후손인 이만구(李晩九)의 딸이다.[6]안동시 도산면 서부리[7] 1919년 6월 12일 고등법원 판결문. 이 지번은 안동댐 건설로 수몰되었다.[8] 대전(大典)이란 천황의 즉위식을 뜻하는 어대전(御大典)의 줄임말이다. 다이쇼 덴노가 즉위한 1912년경에 세워졌던 것으로 추정된다.[9] 1909년 사립 선명학교로 설립되었다가 1912년 공립으로 개편되어 예안공립보통학교로 개칭되었다. 1996년 예안초등학교로 개칭되고 1999년 온혜초등학교 소속의 예안분교가 되는 등 명맥을 유지하다가 2009년 온혜초등학교에 통폐합되면서 폐교되었다.#[10] 현 예안교회[11] 1919년 3월 24일 대구지방법원 안동지청 형사사건부에는 3월 24일로 되어 있다.[12] 1919년 4월 16일 대구지방법원 집행원부[13] 1919년 5월 10일 대구복심법원 판결문[14] 1919년 6월 12일 고등법원 판결문[15] 독립유공자 공적정보. 이 지번 또한 안동댐 건설로 수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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