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안동시 출신 독립운동가, 신동희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자 / 호 | 순화(舜和) / 창산(滄山) |
본관 | 평산 신씨[1] |
출생 | 1888년[2] 4월 12일 |
경상도 예안현 읍내면 관저동 (현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동부리) | |
사망 | 1961년 9월 23일[3] (향년 73세) |
경상북도 안동군 | |
묘소 | 국립서울현충원 제1충혼당 3층-320실-11호 |
상훈 | 건국훈장 애족장 |
1888년 4월 12일 경상도 예안현 읍내면 관저동(현 경상북도 안동시 예안면 동부리)에서 아버지 신상룡(申相龍, 1868. 7. 7 ~ 1956. 7. 5)과 어머니 예안 이씨(禮安 李氏) 이재교(李在敎)의 딸 사이의 두 아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일찍이 일본으로 유학하여 수묵관(修默館)을 졸업하고 와세다대학에서 수학하다가 귀국하였다.
그는 1919년 3월 11일 5촌 당숙인 예안면장 신상면의 권유를 받아들여 신응두·이남호(李南鎬) 등 예안의 청년들과 함께 면사무소 숙직실에 모여 만세운동을 일으키기로 뜻을 모았다. 처음에는 다음날인 3월 12일 예안면 읍내 장날에 거사하려 했으나 워낙 시일이 촉박했으므로 다음 장날인 3월 17일에 거사하기로 결정하고, 면사무소 등사판을 이용하여 독립선언서를 인쇄하고 태극기도 제작하였다.
1919년 3월 17일 오후 3시 30분, 이들은 면사무소 뒷산에 일인이 세워 놓았던 대전기념비(大典記念碑)를 무너뜨린 후 독립만세를 고창하면서 장터로 집결하였고, 이를 신호로 선명학교와 보통학교 등 각급 학교의 학생들과 군중들이 시위대에 합류함으로써 시위대의 규모는 2천여 명에 달하였다. 이때 일제 경찰이 시위 선두에 섰던 20여 명을 체포하자, 군중은 주재소를 점령하고 일본 경찰 3명을 포로로 하여 무장을 해제시킨 뒤 이들을 앞세워 ‘대한독립만세’를 부르게 하면서 만세시위를 전개했다. 그러다 안동에서 출동한 일본군 수비대에 의해 강제 해산되었고, 신동희는 이때 동지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곧 체포된 그는 1919년 5월 21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1923년 예안공립보통학교 촉탁교원, 1925년 도산공립보통학교 교원촉탁, 1926년 도산동보통학교 교원촉탁 등을 지내며 교편을 잡았다.#
이후 여생을 보내다가 1961년 9월 23일에 별세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신동희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2014년 7월 16일 그의 유해를 국립서울현충원 제1충혼당 3층 320실 11호에 이장했다.
2. 완도군 출신 독립운동가, 신동희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창씨명 | 히라야마 도키(平山洞熙) |
이명 | 신동희(申洞熙) |
본관 | 평산 신씨 |
출생 | 1903년 7월 18일 |
전라남도 완도군 소안면 미라리 | |
사망 | 1985년 5월 8일 (향년 81세) |
전라남도 완도군 | |
상훈 | 대통령표창 |
1903년 7월 18일 전라남도 완도군 소안면 미라리에서 부친 신두정, 모친 김여섭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이후 사립 중화학원을 졸업하고 사립소안학교 교사를 지냈다. 1923년 3월 서울에서 개최된 전조선청년당대회(全朝鮮靑年黨大會)에 전남 완도군 소안면 배달청년회(倍達靑年會) 대표로 참가했고, 1924년 9월 완도군 소안면에서 열린 노농연합대성회(勞農聯合大成會) 제2회 정기총회에서 입석한 경찰을 퇴장시킨 후 악질지주에 대한 절교를 결의했다. 이 일로 체포된 그는 징역 6개월,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이후 완도군에서 조용히 지내다 1985년 5월 8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20년 신동희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