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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18 10:06:12

칠금·금릉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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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금·금릉동
漆琴·金陵洞 | Chilgeum·Geumneung-dong
<colbgcolor=#1d2088><colcolor=#ffffff> 광역자치단체 충청북도
기초자치단체 충주시
행정표준코드 4390131
관할 법정동 칠금동, 금릉동
하위 행정구역 45통 227반
면적 5.80㎢
인구 13,815명[1]
인구밀도 2,381.90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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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의원 | 충주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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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4선)
충청북도의원 | 제4선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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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필 (초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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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복지센터 칠금중앙로 37 (칠금동 874)
칠금금릉동 행정복지센터
1. 개요2. 역사3. 주요 시설
3.1. 행정3.2. 교통3.3. 교육
3.3.1. 초등학교3.3.2. 중학교3.3.3. 고등학교
3.4. 주거
4. 교통
4.1. 버스
4.1.1. 일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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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충청북도 충주시에 있는 .
과거에는 금능동으로 불렸다가, 2007년 1월 1일부로 한글맞춤법에 의거하여 지금의 금릉동으로 개칭되었다.

2. 역사

고구려, 백제, 신라의 쟁패에서 충주 일대가 일찍부터 중요했던 건 잘 알려진 사실이며, 이 일대에 진한 혹은 마한 거수국이 있을거란 예측은 진작부터 있었으나 확증은 없었다. 그러다 2018년도에 금릉동에서 고고학적으로 대규모 유물이 발굴됨에 따라, 충주를 중심으로 삼한의 한 거수국이 있었을거란 학자들의 추측은 구체적 물증으로 반론의 여지 없이 확증되었다.

다만 발굴된 유물로 봐서는 근처 충북, 충남 계열과 똑같이 목지국 계열와 동일한 마한 계열 거수국이었을 개연성이 매우 높고, 따라서 진한 계열 거수국으로 보기엔 매우 어려워졌다. 3세기 중반부터 융성했다가 4세기 초반까지 독자성을 유지했고, 반론의 여지가 전혀 없이 백제의 직접 지배지가 된 건 4세기 중반부터인 걸로 나온다. 이는 홍성, 보은, 진천을 비롯한 여전히 목지국에 충성하던 거수국들과 마찬가지 패턴인데, 백제가 목지국 지지 세력을 강압적으로 모두 굴복시키는 데 성공했다는 뜻이다.[2] 이후 4세기 중반부터는 백제의 직접 지배지가 되지만, 475년 한성 공함 이후 고구려의 진격 과정에서 거의 150여 년 되는 백제 지배기를 끝내고 고구려령이 된다.

여기서 주목할만한 부분은 진흥왕의 신라가 이곳 충주 일대에 비상한 관심을 기울이던 사항이다. 한성 공함 이후 고구려가 거의 70여 년이나 점유하던 우벌성 일대를 빼앗은 뒤로 얼마 지나지 않아 AD 558년도에 수도 금성(서라벌)의 귀족자제와 육부 호민들을 국원소경으로 사민(삼국사기 제4권 신라본기4)했는데, 신라가 이런 식으로 아예 본격적으로 서라벌 주민을 사민시킨 사례는 거의 드물었다는 점에서 충주 일대에 대한 신라의 기이하도록 각별한 관심을 읽을 수 있다. 이 이후로 서라벌 주민이 다른 곳에 집단 사민되는 사례는 적어도 문헌 및 고고학적 사례로는 견훤이 927년도에 서라벌 주민을 전주로 압송해 사민한 예 외엔 없기 때문이다.[3][4]

또한 고고학적으로 보면 백제의 직접 지배령이 천안 목지국을 제압한 3세기 후반 이후에는 죽죽 뻗어나가 적어도 4세기 중반 시점에서는 충남 일대는 물론이요 전북 김제까지 손을 뻗치고 있는데, 유독 충주를 포함한 충북이 위치는 더 가까움에도 청주를 3세기 후반에 먼저 포섭한 사례 외엔 진격이 지지부진한 건 설명이 필요한 게 분명하다. 그러니 충북 일대에서 목지국 잔여 세력이 진한의 암묵적인 지원을 받아 저항했을 개연성이 높아 보이는 것. 그런데 정작 삼국사기에서는 이런 사항에 대해 침묵하며, 다만 드러나는 건 삼국사기 초기 기록상 신라 VS 백제의 접전 장소들이 역시 기이하게도 고고학적으로 볼 때는 충북 일대의 목지국 잔여 세력 VS 백제였던 사항이다. 고로 실은 이 충주 일대가 바로 경주 사로국으로 망명하기 전 친목지국 마한 거수국이었던 김씨 족단의 근거지였을 개연성이 유력해보이는 것이다.[5]

3. 주요 시설

3.1. 행정

3.2. 교통

3.3. 교육

3.3.1. 초등학교

3.3.2. 중학교

3.3.3. 고등학교

3.4. 주거

4. 교통

4.1. 버스

4.1.1. 일반


[1] 2024년 6월 주민등록인구[2] 또한 바로 이 시기에 백제에게 일단 복속은 된 상태였으나 존재는 간신히 온존하던 천안 청당동 목지국 세력이 고고학적으로는 거의 삭제에 가까운 초토화를 겪은 걸로 나타난다. 삼국사기상 왕사에 의하면 비류왕 재위 후반~근초고왕 재위 극초반 시기다.[3] 고구려가 충주를 국원으로 명명했다는 것은 삼국사기 제35권 지리지2에 근거를 둔 것이지만, 명명했다는 얘기는 거기에 엄밀히는 없다. 고구려의 군현이었던 곳들을 거론하면서 충주에 대해 본디 '고구려의 국원성'이었다고 한 건데, 충주 고구려비에서는 엄연히 우벌성이라고 했고 국원성이라 한 것은 없으므로 찬자가 시대별 명칭을 구분해서 적었어야 함에도 착오를 범했을 개연성이 높다. 강종훈 교수 저 신라상고사 연구 102~103쪽에서 발췌함[4] 비석 건립 연도로 가장 유력한 449년 이후 눌지 마립간이 대고구려 반란을 일으킨 454 혹은 464년 사이에 고(구)려가 국원으로 바꾸었을 가능성은 아주 없진 않으나, 겨우 6년 혹은 16년 되는 세월 동안에 굳이 자기네가 불러 익숙한 우벌성이란 명칭을 국원으로 바꿀 이유가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영 회의적이다.[5] 신라사 전공 강종훈 교수는 저서 '신라 상고사'에서 충주에 근거지를 두고 있었을 진한 거수국이 충북 및 경북 일대 진한 소국들을 통솔하면서 백제와 마찰을 빚다가 사로국으로 망명했던 걸로 추론했는데, 2018년 충주 금릉동 발굴로 충주에 세력이 상당한 삼한 거수국은 있었으되 그것이 마한 계열 거수국이었음이 밝혀져 추론 중 일부는 수정되어야 하는 상황이다. 그러나 백제에게 천안 청당동 목지국이 3세기 후반에 광탈당해 전혀 리더십을 기대할 수 없었던 상황에서, 그 이후 4세기 초반까지 적어도 충북 일대의 나머지 마한 거수국들을 통솔해서 백제에게 마지막 저항을 시도해볼 수 있었을 거수국이 충주에 있었을거란 추측은 여전히 유효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