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위에서부터 호이스 그레이시, 호리온 그레이시, 헬슨 그레이시, 힉슨 그레이시 홀커 스레이시 , 엘리오 그레이시, 호일러 그레이시 |
Gracie fami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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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개요
브라질의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시작된 격투기 가문. 브라질리언 주짓수(그레이시 주짓수[1])를 창시하고 전파한 것으로 유명하다.현대의 종합격투기가 이 가문의 주짓수 홍보를 위한 세계구급 도장깨기 행보로 인해 생겼다고 할 수 있을 정도.
3. 역사
그레이시 가문의 조상은 스코틀랜드 렌프루셔 페이즐리[2]에서 뿌리를 두고 있으며 1900년대즈음 브라질로 이주해 세아라주에 정착했다가 리우데자네이루로 옮기고 이후 파라주 벨렝으로 옮기게 된다.주짓수의 초창기 역사를 논하자면 초기 유도(강도관 유술)가 빠질 수 없는데, 유도의 창시자 가노 지고로의 제자였던 마에다 미츠요가 20세기 초중반 브라질로 이민갔을 당시, 가르친 제자가 브라질리언 주짓수의 주요 창시자 중 한 명인 카를로스 그레이시이다. 브라질의 벨렝 유지이자 카를로스의 아버지 가스탕 그레이시는 마에다의 브라질 정착에 도움을 주었고, 보답으로 마에다는 장남 카를로스에게 약 3년간 유술을 가르쳐줬다.[3]
이후 카를로스와 (마에다와는 연이 없지만) 카를로스를 사사하고 함께 발전시킨 동생들이 도장을 열어 문하생들을 가르치며 주짓수를 전파한게 브라질리언 주짓수의 시작이었다.
주짓수 역사에서 카를로스만큼 비중있게 언급되는 인물은 바로 엘리오 그레이시이다.[4] 카를로스의 동생이었던 엘리우는[5] 카를로스에게 주짓수를 가르쳐주길 요청했지만, 카를로스는 체격이 왜소하고 허약했던 엘리오에게 무술은 맞지 않다며 거부했다. 하지만 엘리우는 정식 수련은 하지 못했지만 카를로스의 도장을 엿보며 어깨너머로 주짓수를 익혔고, 이 기술들만으론 자기보다 체격이 큰 상대에게 통하지 않는다고 여겨 왜소한 자신에게 맞게 기술들을 조금씩 변형하거나 아예 창조했다.
이후 한번은 카를로스가 도장을 비웠을 때 엘리오가 비공식 사범으로 교육을 진행했고, 수강생들에게 평가가 좋았다. 이를 본 카를로스는 엘리오의 가능성을 알아보고 함께 수련하는 것을 허락했고, 나중에 카를로스가 사업에 집중하느라 도장 운영에서 손을 뗀 뒤엔 직접 도장을 맡기도 했다. 카를로스의 아들들도 엘리우에게서 사실상 주짓수를 배운다. 심지어 카를로스의 첫째 부인 자식들은 카를로스가 재혼하면서 부인이 키우는 것을 거부하자 엘리오 밑에서 자랐다. 사실상 엘리오가 그레이시 2세대들의 아버지이자 스승 역할을 한 셈.
1921년 벨렘에서 다시 리우데자네이루로 거주지를 옮겼고 1930년대 이후 엘리오는 과거 스트리트 파이터를 즐긴 마에다 미츠요를 흉내라도 내듯 본격적으로 브라질 내의 여러 무술 강자들에게 도전하고, 유도가와 레슬러를 포함한 상대 대부분을 꺾으며 좋은 실력을 보여준다. 1947년에는 당시 헤비급 복싱 챔피언이던 조 루이스에게도 도전했으나 루이스 측이 거절하면서 무산된다. 물론 이 당시 무용담이란게 흔히 그렇듯 과장된 부분도 있고 실제론 무승부도 꽤 있었다고 하나, 어찌됐든 이때까진 공식적 패배는 없었고 다수의 유도가들을 이긴 것도 사실이었다.
그런데 1951년 당시 유도계 1인자 기무라 마사히코가 상파울로 신문사의 초청으로 가토, 야마구치 등과 함께 브라질에 들어와 있었다. 이에 가토를 비롯한 유도가들을 꺾은(카토를 기절시키기까지 했다) 엘리오와 기무라의 대결이 벌어지게 된다. 그러나 엘리우는 기무라에게 완력 차이에 밀려 메쳐졌고 팔이 부러지는 부상까지 입게 되어, 본인은 계속 하겠다고 했지만 세컨측의 타월 투척으로 기무라가 최종 승리하게 된다.[6]
이런 결과가 나온 이유를 살펴보자면 일단 룰은 유도룰이 아니고 타격 금지에 한쪽이 항복할 때까지 싸우는 룰이었다. 그런데 기무라는 대중에게는 그냥 유도가로 알려졌지만, 입문은 타케우치류 유술로 했고 그 뒤에 고등전문학교에서 고전유도를 수련했다. 또한 프로유도라고 해서 좀 더 실전적인 유도를 추구했는데 여기 룰이 꺾기, 조르기를 포함해서 한쪽이 항복해야 이기는 룰이었다. 즉, 룰 자체도 기무라에게 익숙했던 것이었다. 게다가 기무라는 물구나무 서서 도장을 몇 바퀴 돌거나 손가락 힘으로 동전을 반으로 접을 수 있는[7] 괴력의 소유자였던 반면, 엘리오는 상기했듯 워낙 약골이라 형들도 무술하지 말라고 말리는걸 오로지 기술로 극복하여 파이터가 된 사람이었다. 당시 둘의 몸무게 차이는 상당했다고 하니[8] 말 다했다. 결과적으로 룰도 서로 익숙하고 기술적으로 엄청 큰 차이도 없었는데[9] 힘은 기무라가 훨씬 강했던 것.
이렇게 엘리오는 기무라에게 패하여 약간의 망신을 당하긴 했지만, 전화위복으로 브라질에서 브라질리언 주짓수의 인지도는 이전보다 더 상승하게 된다. 실제 당시 이 싸움은 브라질에서 엄청난 관심을 모았는데, 관객만 2만명에 심지어 브라질 대통령까지 경기를 보러 올 정도였다. 이후 엘리우는 자신의 도장과 유파를 만들게 된다. 다만 한동안 가문에서 문제가 되었던 것은 그의 아들 호리온에 의해 엘리오 유파만이 그레이시 주짓수 상표 등록을 하게 되어 다른 유파들은 그레이시 주짓수라는 상표를 쓸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인데, 이후 법적인 조정을 거쳐 다른 유파들도 이름을 사용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이 상표로서의 그레이시 주짓수의 시작이다.
1955년에는 자신의 전 제자인 발데마르 산타나(Valdemar Santana)와의 대결에서 싸커킥으로 TKO 당해서 패배하기도 한다. 발데마르는 원래 그레이시 가문을 위해 수년간 싸웠지만, 엘리우와의 사이가 틀어져서 나가고[10] Haroldo Brito의 주짓수 도장으로 간다. 이후 발데마르는 엘리우와 발리투도에서 경기를 가졌다.
1984년 브라질에서는 주짓수 vs 격투기라는 대회가 열리기도 했는데#, 이 대회에는 레이 줄루, 마르코 후아스 등이 나왔다. 그레이시 주짓수와 격투기 팀이 1:1로 대결했는데, 주짓수 선수가 무에타이/루타 리브레 선수에게 1라운드 5분만에 TKO 패 당하거나 루타 리브레 베이스의 마르코 후아스가 주짓수 선수와 동점으로 비겼다는 것(20분 제한), 오히려 주짓수 선수가 무에타이 선수를 타격으로 TKO 시키기도 한다(...) 솔직히 양팀 선수들의 무술 배운 것들을 보면 웬만한건 다 배워서(주짓수, 복싱, 레슬링, 무에타이 등) 대회 제목 처럼 단일 격투가들은 아니었다. 1991년에 주짓수 vs 루타 리브레가 열렸는데# 주짓수 팀의 전승이었다. 주짓수 팀이 루타 리브레팀 3명 중 2명을 타격으로 TKO로 시키고, 1명은 서브미션(펀치)로 이겼다. 이처럼 주짓수는 과거부터 타격을 겸비했었다.
그 후 엘리우의 아들 호리온 그레이시와 힉슨 그레이시가 주축이 되어 카를로스의 장남인 칼슨과 연동하여 자기들 도장깨기 모음집인 그레이시 액션 비디오를 미국에 발매하여 인기를 끌었으며, 이런 기반을 바탕으로 1990년대 처음으로 UFC 대회를 개최하여 세계적인 강자들을 모아 상대적으로 체격이 작은 동생 호이스 그레이시를 출전시켜[11] UFC 대회를 우승하게 하는 등의 방식으로 오늘날의 세계적인 유명세를 얻게 되었다.
사족으로 브라질리언 주짓수 창시자 문제를 놓고 소소한 다툼이 있기도 한데, 주로 카를로스와 엘리오 유파간 입씨름이다. 실제 엘리우 측에서 보자면, 가드 기술을 비약적으로 발전시키는 등 기술 보강으로 약자가 강자를 이긴다는 식의 현대 브라질리언 주짓수 이미지를 정립했고, 격투가 양산이나 홍보 측면에서도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했다. 상기했듯 엘리오 본인부터가 실전 무술가로 이름을 날렸고 많은 제자들을 수련, 초대 UFC를 개최한 호리온 그레이시와 1,2,4대 UFC 우승을 해 90년대 브라질리언 주짓수를 전세계에 알린 호이스 그레이시, 발리 투도의 전설 힉슨 그레이시 등도 엘리우의 아들들이다. 괜히 엘리우가 '브라질리언 그래플러들의 아버지'라고 불리는게 아닌 것.
다만 엄연히 따지면 브라질리언 주짓수의 창시자는 카를로스 그레이시와 엘리우 그레이시를 포함한 그레이시 가문의 형제들이 정답이고, 그중에서도 명목적 시초는 카를로스, 중흥기를 이끈건(이른바 일대종사) 엘리오였다고 보는게 더 정확할듯. 관련 블로그 칼럼. 실제 지금도 브라질리언 주짓수에서 다수파는 카를로스 계열이다.
4. 목록
후손이 많은 관계로 주요 인물이나 나무위키에 문서가 있는 사람들 위주로만 정리.- 0세대
- 가스탕 그레이시
- 1세대: 주짓수의 공동 창시자로 전부 주짓수 레드벨트(10단)를 받았다.
- 2세대
- 칼슨 그레이시 - 카를로스의 장남,칼슨그레이시 아카데미 설립
- 카를로스 그레이시 Jr. - 카를로스의 아들. 그레이시 바하, IBJJF 설립.
- 칼리 그레이시
- 호리온 그레이시 - 엘리오의 장남. 미국으로 이주해 UFC를 개최.
- 힉슨 그레이시 - 엘리오의 아들. 그레이시 가문 히든 보스로 불리며 한 세대를 풍미했다. 전 브라질 삼보 국가대표 금메달리스트. 호이스, 호일러와는 이복형제.
- 호이스 그레이시 - 엘리오의 아들. 1,2,4대 UFC 우승. 브라질리언 주짓수의 강함을 임팩트 있게 세계에 알린 인물.
- 호일러 그레이시 - 엘리오의 아들. 아부다비 컴뱃 레슬링 금메달리스트. 본인도 엄청난 강자였지만 패배한 일화들이 더 유명하다. 히카르두 델 라 히바에게 "델라히바 가드"로 패배했다거나, 에디 브라보에게 서브미션으로 졌다.
- 홉슨 그레이시
- 홀스 그레이시 - 카를로스의 아들이자 전 브라질 삼보 국가대표 금메달리스트. 유도, 레슬링, 삼보 등을 크로스 트레이닝하며 주짓수 기술 발전에 기여해 주짓수 체계를 완성시켰다는 평을 받았다. (고전 유술의 트라이앵글 초크를 주짓수에 처음 소개한 것도 홀스로 알려져 있다.) 가문 내 재능과 실력이 최고로 뽑혔지만 헹글라이더 사고로 안타깝게 31세에 젊은 나이로 사망한다.
- 3세대
- 칼슨 그레이시 Jr. - 칼슨 그레이시의 장남 칼슨 그레이시 아카데미 그랜드마스터
- 하이안 그레이시
- 클락 그레이시
- 헨조 그레이시 - 아부다비 컴뱃 레슬링 금메달리스트.
- 히론 그레이시 - 호리온의 장남. 그레이시 아카데미 수장.
- 헤너 그레이시 - 호리온의 차남. 히론과 함께 그레이시 아카데미 운영. 배우자 이브 토레스 그레이시.
- 크론 그레이시 - 힉슨의 아들. 2021년 기준 유일한 UFC 현역 그레이시.
- 하우프 그레이시 - 홉슨의 차남.
- 호드리고 그레이시 - 헬리스 그레이시의 아들.
- 호저 그레이시 - 모계가 그레이시 가문. 세계 주짓수 선수권 대회 금메달리스트.
- 홀스 그레이시 주니어 - 홀스 그레이시의 아들. 세계 주짓수 선수권 대회 금메달리스트, 아부다비 컴뱃 레슬링 은메달리스트.
- 4세대
- 키라 그레이시 - 모계가 그레이시 가문. 아부다비 컴뱃 레슬링 금메달리스트.
- 네이만 그레이시 - 모계가 그레이시 가문. 크론과 유이하게 종합격투기에서 활약하고 있으며 웰터급에서 활동한다. Bellator MMA 소속.
5. 기타
격투가 사쿠라바 카즈시가 전성기 시절 많은 그레이시들을 꺾어서 "그레이시 헌터"라고 불리기도 했다. 사실 이것도 내막을 알고 보면 웃긴게, 일본의 UWF 계열 프로레슬러 안조 요지, 사사키가 1994년 LA의 힉슨 그레이시 도장에 일본 기자들이랑 무작정 찾아가 대결을 하자고 도발했고[12] 이에 응한 힉슨이 안조 요지를 말 그대로 묵사발을 만들었는데[13], 이후 그레이시 가문 격투가들이 일본에 종종 찾아와 다른 격투가들도 관광 보내며 일본 격투계의 자존심을 박살내던 중 카즈시가 체면치레를 한 것이었다.물론, 주짓수 일변도의 그레이시 가문이다보니 정석적인 그래플링 싸움을 하다 캐치레슬링에 기반을 둔 변칙적인 그래플러이며 체격조건도 괜찮았던 사쿠라바에게 불의의 일격을 당한 것. 하지만, 이후 사쿠라바는 낙무아이 출신 타격가인 반달레이 실바나 극강의 그래플러인 히카르두 아로나에게 피지컬과 격투가로서의 기술적 완성도에서 압도당하며 처참하게 무너졌다. 결국 사쿠라바가 그레이시 헌터라고 한동안 불린건 이종격투기가 종합격투기로 발전하는 과도기를 보여주는 주요 사례 중 하나라 할만하다.
켄간 시리즈에 나오는 주요 일족인 쿠레 일족의 모티브가 된 가문이기도 하다.
네이버 웹툰 싸움독학의 최강자 중 하나인 로건 그레이시의 이름 모티브로 추정된다.
이름이 대부분 C 또는 R[14]로 시작하는 전통이 있다.
[1] 사실 마에다가 브라질에 오기 이전에도 유술가들은 존재했다. 그러나 지금은 그 영향력이 압도적이 되면서 '브라질리언 주짓수=그레이시 주짓수' 비슷할 정도로 위상이 커져버려, 브라질리언 주짓수라고 하면 그레이시 주짓수를 고유명사마냥 흔히 일컫게 된 것. 다만 BJJ 수련자들은 그레이시 주짓수라는 명칭을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스스로를 '그레이시 주짓수'라고 부르는 사람이 있다면 십중팔구는 호리온 그레이시의 도장인 '그레이시 아카데미' 소속이라고 봐도 된다.[2] 글래스고 동쪽에 위치해있다.[3] 이때만 해도 유도는 서구권에서 무명에 가까운 인지도로, 강도관 유술에서 유도로 명칭이 바뀐지도 얼마 안된 시기고 심지어 강도관 유술도 유술 유파중에서도 늦게 생긴 편이다. 그렇기에 마에다는 브라질에 오기 전부터 이미 전파되어있던 다른 유술 유파들마냥, 유도도 결국 상대적으로 친숙한 이름인 유술(주주쓰->주짓수) 도장이라고 홍보하면서 가르쳤다.[4] 실제 엘리오 유파는 본인들이 현대 브라질리언 주짓수를 정립했다는 식으로 주장하고, 실제로도 마냥 허황된 주장은 아니다. 후술 참조.[5] 둘은 1902년생, 1913년생으로 11살 차이가 났다. 참고로 가스타우 그레이시는 총 9명의 자녀를 뒀는데 카를로스는 첫째, 엘리우는 7번째 자식이었다.[6] 경기중에 우세하게 된 기무라는 엘리오에게 '무리하지 마라' 등의 말을 했지만 엘리우가 끈질기게 버티자, 어쩔 수 없이 훗날 기무라 락으로 불리게 되는 '팔 얽어 비틀기'의 한 종류를 걸어 팔을 부러뜨린다.[7] 기무라와 친했던 최영의도 자주 써먹었다.[8] 10~30kg대까지 말들이 다양하다. 다만 기무라가 더 무게가 나갔다는건 공통된 언급.[9] 기무라는 각 10분 3라운드 시합에서 1라운드 10분 동안은 승부를 걸지 않고 엘리오의 기술 파악에 주력했다고 한다. 이후 2라운드 3분째 되던 순간 승부.[10] 도장을 청소하다가 수도꼭지를 계속 틀어 시설을 침수 시켜서 엘리오가 화가 났다는 설과 엘리오가 싫어하는 프로레슬링 활동이 늘어나서 나가게 되었다는 설이 있다.[11] 일족 중 가장 강했던 힉슨은 키 대비 체격이 컸고, 기술이 뛰어났던 호일러는 반대로 체격이 많이 작아 거구의 상대에게 패배할 위험이 있어 비교적 호리호리했던 호이스가 출전했다고 한다.[12] 힉슨 그레이시를 프로레슬러로 섭외하려고 했는데 힉슨이 각본 싸움엔 관심없다는 식으로 말해 열 받았다는 카더라가 있다.[13] 힉슨은 관절기로 안조를 꺾으면 나중에 진거 아니라고 변명할까봐 일부러 더 얼굴을 타격했다고 한다. 그리고 피로 얼룩진 사진을 일본 기자들이 찍어서 대서특필하며 그레이시 가문과 U-계열 프로레슬러들간 갈등의 시발점이 된다.[14] 포르투갈어 발음으론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