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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태석

파일:권태석.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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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fff><colbgcolor=#0047a0> 초명 권태건(權泰健)
자 / 호 경여(景汝) / 몽우(夢牛)
출생 1895년 8월 18일
공주부 청산군 군내면 백운리
(現 충청북도 옥천군 청산면 백운리)
사망 1948년 8월 23일 (향년 53세)
황해도 해주시
본관 안동 권씨[2]
상훈 건국훈장 애국장

1. 개요2. 생애
2.1. 독립운동2.2. 통합당 운동2.3. 중도파로서의 행보2.4. 최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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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2006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2.1. 독립운동

권태석은 1895년 8월 18일 충북 영동군 매곡면 유전리 외가에서 무반 가문의 아버지 권중은(權重殷) 초명 권재윤(權在允). 1903년(고종 40) 8월 18일 광주군수(光州郡守)로 있을 당시 고종의 윤허로 개명했다.#]과 어머니 수원 백씨 백규수(白奎洙)의 딸 사이의 2남 3녀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안동 권씨 추밀공파 33세이며,본적은 경북 김천군 김천면 남산정 174-1(지금의김천시)였고 부친 권중은(權重殷)은 19세의 나이에 무과에 합격하고 무반으로 출사하여 갑오개혁 이전에 이미 정3품 훈련원 정(正) 및 경주진영장(慶州鎭營將) 등에 올랐고, 대한제국 시기에는 규장각 부제학에 올랐으며(정2품 자헌대부) 1885년(고종 22) 선전관(宣傳官)과 초관(哨官)을 시작으로 종6품 훈련원 주부(訓鍊院主簿), 종5품 훈련원 판관(判官), 종3품 하동도호부사(河東都護府使)·단천도호부사(端川都護府使)·삼수도호부사(三水都護府使)·절영도 수군첨절제사(絶影島水軍僉節制使), 정3품 훈련원 정(正)·경주 진영장(慶州鎭營將) 시종원 분시어(侍從院分侍御), 광주군수(光州郡守), 전라남도 검세관(全羅南道檢稅官), 양산군수(梁山郡守), 규장각 부제학(副提學) 등을 역임했다.], 조부 권창섭(權昌燮)은 1858년(철종 9) 무과에 급제하여 정3품 훈련원 도정(訓鍊都都正)에 올랐고 , 작은아버지 권중하(權重夏)초명 권재문(權在文).] 또한 1887년(고종 24) 정시(庭試) 2회 무과에 갑과 1위, 즉 장원으로 급제하여# 훈련원 첨정(訓鍊院僉正)에 오르는 등[3] 말년에는 정3품 통정대부로 마치는 등 당대의 무반가에서 자라났다.

그는 경상남도 함양군에 위치한 안의공립보통학교를 재학하다 4학년 때 중퇴한 후 국내외를 오가며 학업에 진력하려했으며, 공부를 위해 종제인 권태훈과 함께 도주하다 부산에서 아버지인 권중은에 의해 잡혀왔다는 얘기, 일본에서 학업 중 조센징이라 놀리는 일본학생을 구타한 후 상해로 갔다는 등 독특한 행보로 보부상 지방 지부의 일원을 맡기도 했다. 1916년, 그는 평생의 동지 최익환(崔益煥)을 만났다. 최익환은 충남 홍성군 출신으로, 권태석의 행보를 언제나 함께 한 둘도 없는 동지였다.

1919년 2월 고종의 인산에 참관하기 위해 경성으로 상경한 권태석은 그곳에서 일어난 3.1 운동에 자극받고 마침 경성에 있던 최익환과 독립운동 방법을 모색했고 최익환의 권유를 받아들여 대동단에 가입했다. 대동단은 관료 출신 전협과 최익환 등이 보다 조직적이고 치밀한 독립운동을 전개하고자 3.1 운동 직후 조직한 비밀결사로, 권태석은 가입 후 격문 인쇄기와 용지 구입비 600원을 지원했다. 그리고 전협, 최익환 등과 함께 조선의 독립을 주장하는 대동단의 취지와, 학생들에게 동맹휴학을 촉구하는 내용이 담긴 격문 수천매를 인쇄하여 배포하였다.

대동단의 목표는 제2의 독립만세시위를 벌이고 의친왕 이강을 상하이로 망명시켜 민족운동진영의 구심점으로 삼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황족부터 종교인, 군인과 부인층 등으로 사회 계층을 분리하고 그중 유림과 청년 등 4개 계층 인물들을 조직에 끌어들였다. 그리하여 조직 구성원과 제2의 만세시위를 벌이기 위해 선임한 민족대표 33인 안에는 다양한 층위의 연령·직업·교육 수준·사회적 계층이 포괄되었다. 권태석은 비록 고위 관직을 역임한 집안의 자손이었지만 대동단의 취지에 적극 공감했고, 친형 권태영(權泰英)의 자산을 몰래 처분하면서까지 거액의 운동자금을 마련했다.

그러나 대동단의 행보는 일제 경찰에게 발각되고 말았고, 그는 1919년 5월 23일 체포된 뒤 1920년 12월 7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제령 제7호 및 출판법,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하다 1921년 6월 12일에 출소했다. 출옥 후 그 해 10월 4일에 그의 고향인 김천군의 금릉청년회(金陵靑年會)가 주최한 강연회에서 '청년의 의무'를 주제로 강연했다. 그리고 이듬해인 1922년 3월에는 여운홍, 장덕수와 함께 국내외 문화 교류를 표방하는 문화단체인 세계협회(世界協會)를 발기하는 등 사회운동을 이어갔다.

그는 이후 다시 상경하여 1924년 10월, 권태석은 최익환과 함께 고려공산동맹 서울파에 합세했다. 서울파 사회주의 그룹은 국내에서 가장 광범위한 영향력을 지녔다. 그에 따라 경직된 운동노선 보다는 국내 민족주의 계열과 적극적으로 협동하는 노선을 추구했다. 1920년대 중반, 서울파는 민족단체를 총 집중할 통일적 표현기관으로서 조선물산장려회계열과 함께 조선민흥회를 발기하기로 했다. 권태석은 1926년 7월 8일 명제세와 더불어 조선민흥회 발기회 준비위원으로 선임되었다.

이듬해인 1927년 2월 신간회가 조직되어 전민족적 유일당을 표방하자, 조선민흥회는 신간회와 통합해야 한다는 요구를 받게 되었다. 이때 권태석과 최익환은 조선민흥회와 신간회의 통합을 주도했다. 구체적으로 1927년 2월 10일 조선민흥회 창립대회가 취소되고 신간회와의 합동이 결의되었으며, 권태석은 최익환, 명제세 등과 합동교섭을 전담하는 합동위원으로 선임되었다.

1927년 2월 12일 조선민흥회와 신간회의 통합이 결의되고 단체명과 강령도 신간회에 따르기로 결정되면서 조선민흥회는 신간회에 흡수통합되었다. 합동위원으로 이를 주도한 권태석은 통합된 신간회 창립대회의 준비위원으로 선임되어 신간회 내에서 활동을 이어갔다. 그는 신간회에서 주요 실무직인 총무간사와 서무부장, 상무위원을 역임했다. 1927년 7월에는 전국적으로 나타난 동맹휴학에 대한 진상조사에 나섰다. 한편 원산에서 이계심(李啓心)이라는 청년이 권총과 탄환을 소지한 사건에 연루되어 구류되었다가 석방되기도 했다.

지역차원에서는 자신의 고향인 김천지회를 중점적으로 키우는등 활동하였다. 그 과정에서 안재홍, 권동진, 박동완 등의 민족주의자들과 폭넓게 협력했다. 마찬가지로 그는 국내 운동의 파벌성 극복과 통일적 조공 조직을 지향한 ML파 사회주의 그룹에도 협력했다. 1926년 11월부터 조공에 가입하여 당 내외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다. 동년 12월 6일에 개최된 제2차 조공 당대회에서는 조직부에 배속되었다.

그런데 당 비서 안광천이 1927년 9월 4일에 조직된 영남친목회에 관여한 사건을 계기로 조선 공산당 내부에 분열이 나타났다. 영남친목회에 관변 친일인사들이 포함된 사실 등이 문제가 됐다. 권태석은 조공당원임에도 영남친목회와 안광천을 비판하는 반대성명에 참여했다. 하지만 당시 조공의 중심인 ML파 사회주의 그룹과 권태석을 포함한 서울 구파 그룹간의 근본적인 갈등은 운동노선에서 비롯되었다. 특히 ML파가 1927년 11월 '조선지광(朝鮮之光)'에 「신간회와 그에 대한 임무」를 발표하여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헤게모니 쟁취를 주장하면서 양자 간에 치열한 논쟁이 벌어졌다. 이때 권태석은 신일용(辛日容), 홍양명(洪陽明) 등과 함께 서울 구파 그룹을 대표해 ML파와 대립각을 세웠다. 이에 ML파는 서울구파 그룹을 ‘청산론 자’로 명명하며 당 중앙에서 배제시켰다.

이후 권태석은 서울구파 사회주의자들과 춘경원당(春景園黨)을 조직하여 독자적인 운동노선을 유지했다. 하지만 ML파 사회주의 그룹의 주도권이 유지되고, 춘경원당의 코민테른 승인 획득도 좌절되는 위기에 직면했다. 게다가 1928년 4월부터 일제가 보안법위반을 내세워 춘경원당 당원을 대대적으로 구속함에 따라 국내 서울파 사회주의 그룹의 활동 공간이 사라지게 되었다. 1928년 10월에는 권태석이 1926~27년간의 조공 활동이 발각되어 체포되었다.[4] 경성지방법원으로 이송된 그는 1929년 4월 5일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6년형을 선고받았다. 그로 인해 대전형무소에서 두 번째 옥고를 치른 후 1934년 10월 7일에 출소하였다. 이후 당국의 감시를 받으면서도 충북 청산에서 소비조합운동을 하는 일방 만주로 이주하여 독립운동을 계속하다가 8.15 광복으로 자유의 몸이 되었다. 그는 고향인 김천을 떠나 첫 수형생활 중 옥바라지를 하던 가형을 따라 서울 당주동에 본적을 두었고 두번째로 소위 일제의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수형생활이 끝나자 충북 옥천군 청산면 백운리, 둘째 누나가 광산 김씨 댁으로 출가한 인연을 따라 전적을 하는 당시로서는 보기드문 일도하였다.

2.2. 통합당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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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직후, 권태석은 여운형이 조직한 건국준비위원회에 합류했다. 1945년 8월 17일에 결정된 건준 조직 인선에서 그는 무경부(武警部) 책임자로 임명되었다. 이 직책의 임무는 일제가 사라진 뒤의 혼란을 최소화하기 위해 치안을 담당하는 것이었다. 그해 8월 22일, 권태석은 선전부장으로 임명되어 송진우, 김병로, 백관수 등 우익 인사들을 건국준비위원회에 끌어들이기 위한 교섭을 담당했다. 그러던 중 여운형이 피습당해서 우익의 건준 참여를 요청하는 초청장이 발송되지 못하자, 그는 8월 23일에 백관수를 직접 찾아가서 건준 확대위원으로 서울의 우익 계열 인물들을 추천받는 협동안을 제안했다. 이를 우익 진영이 받아들이면서 건준이 좌우통합의 상징성을 확보할 기회가 생겼다.

2018년에 발간된 김인식 교수의 논문 〈민족주의 세력의 조선건국준비위원회 개조 움직임〉에 따르면, 권태석은 신간회 등 민족통일전선을 함께 했던 건준 부위원장 안재홍과의 협조 하에 우익의 건준합류를 추진했다고 한다. 하지만 건준 내 좌익의 견제로 우익측과 합의된 60명 외에 70여 명의 확대위원이 새롭게 추천되면서, 우익의 건준 합류가 무산되었다. 이후에도 권태석은 건준 전체회의에서 여운형과 안재홍의 사퇴안을 함께 처리할 것을 주장하여 안재홍의 퇴진을 저지하고 건준의 민족통일전선 기조를 유지하려 했다.

그러나 건준이 점차 좌경화되고 우익의 건국방향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전면에 내세워 국가건설의 주도권을 장악하는 방향으로 변화하면서, 건준의 민족통합은 더욱 요원해졌다. 이에 권태석은 건준을 탈퇴하고 중도우익 정당통합운동에 참여했다. 그는 박헌영 등이 주장하는 친일파가 포함된 우익 계열의 정치 참여 배제론에 대해 "조선을 분열시키는 책략"이라며 강력히 비판했고, 오랜 동지인 최익환을 비롯해 권동진, 오화영, 그리고 안재홍명제세 등 인사들과 함께 범우익 통합 운동을 착수했다.

1945년 12월 14일, 권태석은 YMCA 회관에서 신한민족당 창당대회에 참석했다. 신한민족당은 국내 민족진영의 통합이 목표인 정당으로, 22개 민족주의계 정당 및 단체의 통합으로 구성되었다. 22개 정당은 창당과 동시에 이루어진 기존 당 해체선언에서 ‘정당의 분립이 민족분열의 요인이 될 위험성이 있고 자주독립의 시기를 지연시키는 大癌이 됨을 正覺한지 오래다.’라고 밝히고, ‘우리는 소아를 버리고 대아에 就하여 민족적 총 역량을 집결하야 민족의 지상명령인 민족자주 독립을 전취’할 것을 선언했다.

신한민족당 창당 선언은 민족을 모든 계급을 포섭하는 통일적 전체로 상정하고, 대립자에 대한 극복과정을 통해 서만 자주와 독립이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나아가 민족민주주의적 자주독립국가 건설과 전민족의 단결을 정강으로 발표하여 민족통일운동의사명을 분명히 했다. 임원으로 천도교계열 민족운동 원로인 권동진이 총재가 되었고, 오화영이 정치국장에, 그리고 이를 보좌하는 정치국 차장에 권태석이 선임되었다. 최익환도 기획국 차장으로 이름을 올렸다.

1945년 12월, 모스크바 3상회의는 미소공동위원회를 수립하고 한국의 정당, 사회단체와 협의하여 임시정부를 수립하기로 결의했다. 이에 따라 1946년 1월 미소공위에 참여하기 위해 한국민주당과 조선인민공화국까지 포괄하는 좌우익 4개 정당 통합이 논의되었다. 권태석은 1946년 1월 8일부터 신한민족당을 대표해 좌우익 통합운동에 참여하였다. 이는 미소공위를 앞둔 민족통일전선 결정의 일대결정으로 민중의 기대를 모았다. 하지만 좌우노선의 대립을 극복하지 못한 통합 움직임은 끝내 결렬되었고, 좌익과 우익 진영 내부의 통합 운동이 별도로 진행되었다.

우익측의 정당통합은 좌우익 모두에 큰 영향을 끼친 임시정부 봉대론을 통해 유리한 위상을 선점한 임정계가 주도했다. 이에 권태석은 임정계가 과도정권을 수립하기 위해 1946년 1월에 소집한 비상정치회의주비회에 신한민족당 대표로 합류했고, 조직, 조례 기초위원과 심사위원, 그리고 외무와 서무분과 책임자를 역임했다. 한편 반탁투쟁 전개 과정에서 우익진영의 주도권을 확보한 임정계 한독당이 자당 중심의 세력 강화에 박차를 가함에 따라, 1946년 3월부터 우익정당 통합운동이 빠르게 진전되었다. 권태석은 합당 절차가 본격화되기 전부터 한독당, 민주당 인사들과 협의하고, ‘각당과 각계의 행동을 통일하고’, ‘역량을 통합하며’, ‘국내·국제적으로 거족적 단결하여’ 미소공위에 대처해야하는 민족통일의 당위성에 공감을 표했다.

한독당과 안재홍이 창당한 국민당, 그리고 한민당과 신한민족당이 참여한 4당 합동은 4월 7일을 기점으로 가속화되었다. 신한민족당에선 권태석과 김여식, 최익환이 합당원칙 합의에 참여했다. 그 결과 당명과 강령을 한독당에 따르고, 중앙위원과 부서를 신설하는 당통합 방안이 결정되었다. 또, 한독당의 삼균주의 이념, 토지 국유화 등도 대체적으로 수용되었다. 그러자 한민당 내에서는 지나치게 한독당에게 유리하게 통합되었다는 비판이 일어 합동이 철회되었고, 신한민족당 내부에서도 이견이 나타났다.

먼저 국내 민족진영 통합 정당인 신한민족당과 국민당이 국내 기반이 부족한 한독당에 통합되는 구도가 지닌 현실성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었다. 게다가 사상적 동질성을 전제한 자파 주도의 통합을 추구한 한독당의 정치노선을 경계하는 목소리도 있었다. 특히 신한민족당 중견층은 한독당 위주의 당통합 운동이 완전한 자주독립을 목표로 하는 진정한 민족혁명 세력의 총 집중적 민족 단일화인지에 대해 의구심을 가졌다. 이 같은 현상은 당통합 진전 과정에서 점차 악화되어 조선혁명당 등과 연계한 분당 기미까지 나타났다.

하지만 권태석은 권동진, 최익환 등 통합파 당 지도부와 함께 당 통합 논의를 지속했다. 그는 청년당원들과 접촉해 통합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그 결과 1946년 4월 18일 한독당, 국민당, 신한민족당 3당의 합당이 이루어졌다. 합당 직후 신한민족당의 통합파 지도부는 당원들에게 다음과 같이 합당의 당위성을 설명했다.
긴박한 국내외 정세와 자체 역학관계에 있어서 종파적 존재를 허락하지 않는 현실에선 동일한 요소의 大黨의 정리통합으로써 강력한 지도당의 출현이 시급한 요구로 되어있음을 직시하라! 그 실현은 시각을 다투는 문제이다. 특히 김구 주석 령도하에 한국독립당과 국민당, 신한민족당 당합당은 조선민족의 2대 임무(외적조건의 해결과 사회적 해방)수행과정에 있어서 각 당이 표명한 정강, 정책에 의하여 정치적 기본 노선이 동일하므로 대중적 기본토대 역시 동일하지 않을 조건에 놓여있지 않음이 명백하므로 당 합동은 동일한 정치노선의 지도권의 결합인 동시에 분산된 대중의 통일조직을 위함이니 무슨 조건과 법이 있겠는가?

3당합당 직후 단행된 중앙부서 개편 결과 권태석은 통합 한독당의 조사부 부장으로 임명되었다. 8월에는 한국독립당의 당헌 등을 수정하는 연구수정위원으로 임명되어 한독당 당헌, 당규를 국내조건에 맞게 수정하였다. 이로써 국내기반이 부족했던 한독당의 외연과 대중성 확대에 기여했으며, 당내에 국내파·민주파 세력을 형성해 나갔다. 실제로 3당 합당 이후 임정계가 집행부에서 후퇴하고, 다수 세력이 된 국내파가 크게 부상했다.

2.3. 중도파로서의 행보

1945년 12월에 결정된 모스크바 3상 회의는 미소공동위 설치와 더불어 한국을 5년간 신탁통치하기로 합의했다. 이에 김구, 이승만 등 한독당은 반탁운동을 단행해 3상회의 결과를 지속적으로 부정했고 미소공위 참여 역시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반면 권태석은 안재홍 등과 함께 미소공위에 참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양측의 의견 차이로 인한 마찰이 고조되었고, 1946년 4월 18일 미소공위에서 공위 참여가 가능한 정치세력 범위의 확대를 발표하자 한독당내 논쟁이 촉발되었다. 그렇지만 5월 미소공위가 결렬되면서 이 논쟁은 한동안 조용해졌다.

1947년 제2차 미소공위 재개가 가시화되면서 한독당 내 논쟁이 본격화되었다. 1947년 1월 18일 한독당 중앙위원회에서는 모스크바 3상회의 참여 문제를 놓고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 이때 권태석 등 다수의 중앙위원은 ‘삼상결정반대노선 청산에 관한 건의서‘를 당에 제출했다. 건의서는 민족의 독립이 막연하고 관념적인 운동으로 성취되지 않으며, 민주적 투쟁과 실천 속에서만 달성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아울러 민중 개혁을 실천할 수 있는 민주통일 정권 수립에 매진하는 목표로의 전환을 요구하였다. 반면에 삼상결정반대로의 투쟁방향 집중을 독립과 통일정권 수립을 지연시키는 행위로 비판했다.

임정계 지도부는 이러한 움직임에 대응하지 않고, 1월 24일에 조직된 반탁투쟁위원회를 주도하고, 이를 바탕으로 우익정당 통합을 모색하는 기존 방식을 답습했다. 그에 따라 삼상결정 찬성과 미소공위 참여를 주장하는 한독당 국내파 세력과의 갈등이 악화되었다. 권태석도 임정계가 당내 건의를 무시하는 태도로 일관하자 외부 세력과 연대를 모색했다. 그는 1947년 3월부터 한독당 국내파, 즉 민주파를 대표해 사회민주당과 신한당, 민중동맹의 3개 단체와의 연합체 구성문제를 논의하였다. 1947년 3월 19일, 그는 '3상결정에 관한 결정서'를 〈독립신보〉에 기고했다.
① 민주독립은 반연합국적 투쟁에서가 아니라 미소 양민주세력의 세계사적 협조 과정에서만 실현될 것이니 모스크바 삼상결정은 그 구체적인 표현이다.
② 민생문제, 정치적 자유 보장, 3․8선 철폐 등 중요 과업의 ○○ 실천 방향은 공위 속개 촉진으로 삼상결정에 의한 민주통일 정권의 수립 투쟁에 집중 통일할 것을 주장한다.

이러한 권태석 계열의 움직임을 반당행위로 인식한 임정계 당 지도부가 1947년 5월경 간부직 사표를 제출하면서 당내 분규는 심화되었다. 5월 10일의 전국대표자대회에서는 권태석의 부의장 취임이 일부 세력의 항의로 취소되면서 당내 갈등이 여실히 드러났다. 결국 5월 14일 당의 영수인 김구의 강력한 입장 표명 후에, 삼상결정지지를 주장하던 권태석과 김일청이 찬성 135표, 반대 113표로 제명되었다. 권태석은 제명 직후 삼상결정 지지안에 대한 임정계의 무대응이 갈등의 근본 원인임을 지적하고, 반 민주주의파가 진정한 민주주의자를 제명한 것으로 사태를 규정하였다.

그는 이후에도 당외에서 한독당 내 국내파, 내지는 민주파 세력의 확대와 미소공위 지지를 촉구하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더불어 같은 목표를 지닌 모든 민주세력과의 연대를 촉구하였다. 나아가 삼상결정을 지지하는 한독당내 세력을 규합하여 1947년 5월 말 엽에 민주한독당을 창당하였다. 민주한독당은 삼상결정의 지지, 미소공위 결렬 음모의 분쇄, 공위협조투쟁을 방침으로 정했고 권태석 등을 중앙상무위원으로 선임했다. 이처럼 제2차 미소공위가 본격화되는 시점에서 민주한독당은 미소공위 지지와 협조 투쟁으로 중점 과업을 전환하였다. 같은 시기 한독당 내의 국민당계를 포함한 중앙위원 89명도 미소공위 참여를 주장하는 연서와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1947년 10월에 미소공위가 결렬되고 한국문제가 유엔으로 이관되면서, 권태석은 남북통일정부를 수립하기 위한 중도파 운동에 합류하였다. 1947년 9월 말엽, 권태석은 미소양군 철병안을 지지하고 통일정부 수립을 위한 남북지도자 회담을 요청하였다. 1947년 10월부터는 김규식의 범 중도연합인 민족자주연맹에 합류하여 규약과 강령 등을 기초했고, 1948년 1월 9일에 개최된 상무위원회에서 총무부 차장으로 선임되었다.

민족자주연맹에 합류한 이후 권태석의 운동 방향은 민족통일 정부 수립 추진과, 단독정부 수립 반대 그리고 미소군 철병 지지로 요약된다. 민족통일국가를 수립하기 위해선 미소군이 철병하고, 남북과 좌우익간의 통일전선에 기초하여 정부 수립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는 1948년 2월 27일 유엔한국임시위원단과의 인터뷰 도중 그의 다음과 같은 발언에서 구체적으로 확인된다.
한국분단의 주요원인은 두 점령군이지 한국인 자신이 아닙니다. 일제하에서도 한국인은 통일전선을 이룩했습니다. 저는 40여년 간 일본제국주의와 싸운 인사들 가운데 한사람입니다. 당시에도 공산주의자와 민족주의자가 존재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일제와 싸우기 위해 통일전선을 형성하였습니다. 구체적인 예를 들겠습니다. 1927년 신간회라는 단체가 있었습니다. 이 단체는 일제에 맞서 통일전선을 구축하기 위해 공산주의자와 민족주의자로 구성되었습니다. (중략) 한국의 독립은 공산주의자와 민족주의자 간의 협력을 통해 달성될 수 있었습니다.

권태석은 좌우익의 통일전선 수립을 자주독립의 기본 토대로 인식했다. 그에게 통일전선 수립은 신간회와 같은 제반 정치세력 통합, 통일정당 조직으로 구체화되었다. 그러한 차원에서 일제강점기에서부터 미군정기에 이르기까지 민족 유일당과 범우익 통합 정당 조직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같은 인터뷰에서 권태석은 자신이 1920~30년간 독립운동과 공산주의 운동을 했을 때도 주요한 관심사는 한국의 독립이었고, 해방 이후에는 독립을 쟁취하기 위한 통일전선 모색에 관심을 가졌다고 언급했다. 좌우익 모두에게 반동 또는 좌익으로 규정되고, 일제강점기보다도 끔직한 신변위협에 시달리면서도 진정한 독립을 위한 통일운동에 매진해왔다고 소회를 밝혔다.

2.4. 최후

1948년 4월, 권태석은 평양에서 열린 남북회담에 민족자주연맹 소속으로 참가했다. 그리고 8월 23일 2번째로 38선을 넘던 도중 해주에서 갑작스런 병환에 걸려 사망했다. 향년 53세.

그는 사회주의계 인사였고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했기 때문에 오랜 세월 대한민국에서 잊혀진 존재가 되었다. 그러다 2006년에서야 비로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1] 1929년 4월 6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촬영된 사진.[2] 추밀공파 혁(𠋈)계 33세 태(泰) 항렬.[3] 1887년(고종 24) 종6품 전설사 별제(典設司別提)·주부(主簿)를 시작으로, 총어영 초관(摠禦營哨官), 종5품 훈련원 판관(訓鍊院判官), 종4품 훈련원 첨정(僉正), 좌포도청 종사관(左捕盜廳從事官) 등을 역임했다.[4] 당시 그는 경기도 경성부 숭인동(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숭인동)에 거주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