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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3-09-13 14:50:47

고은 성폭력 사건


주의. 사건·사고 관련 내용을 설명합니다.

이 문서는 실제로 일어난 사건·사고의 자세한 내용과 설명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1. 개요2. 진행 과정
2.1. 과거의 성추문과 가짜 고은 사건2.2. 이문열의 소설 사로잡힌 악령2.3. 2017-2018년 미투 운동 때 성폭력 의혹이 제기되다2.4. 재평가 및 여론
3. 지자체의 반응

1. 개요

시인 고은성폭력을 저질렀던 사건. 대한민국의 미투 운동을 통해 수면 위로 떠올랐다.

2. 진행 과정

2.1. 과거의 성추문과 가짜 고은 사건

고은의 성폭력 의혹은 미투 운동 이전부터 존재해 왔다. 이미 그가 문단에 등단한 직후부터 고은의 성추문에 대한 소문이 공공연히 나돌 정도였다. 60~70년대에 고은이 폭음을 하며 성폭력과 기행을 일삼은 탓에 일부 문인들이 그를 실제로 경찰에 고발하는 등 여러 차례 문제가 된 적이 있었다. 당시 고은의 성추문은 2018년 미투 운동에서 폭로된 것처럼 단지 성추행이나 성기 노출 정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훨씬 심각한 수준의 것들이었다.

그는 당사자 여성만 아니라 한 가정과 동료 문인까지 파멸시켰다. 시인이자 러시아어, 일본어 번역가 구자운은 환속하여 세상에 나온 고은에게 호의를 베풀어 그를 자기 집에서 먹고 자게 해 줬는데 고은은 그 은혜를 구자운의 아내와 간통하는 걸로 갚았다. 구자운의 부인은 자녀들을 버리고 떠나 버렸고 본래 다리에 장애가 있었던 구자운은 아들 둘과 남겨진 채 폭음으로 고통을 달래다 위암으로 숨을 거두었다. 진짜 사이코 스릴러는 이 다음인데 문상객들이 찾아가 보니 고은은 자기 때문에 가정이 박살나고 요절한 시인의 시신 옆에서 사발에 막걸리 부어 놓고 젓가락으로 두들기며 반야심경을 읊고 있었다고 한다.정규웅의 문단 뒤안길-1970년대 <13>비운의 시인 구자운 소설가이자 동서문화사 사장인 고정일의 폭로

이 무렵 등장한 것이 당시 문단에서 널리 회자된 가짜 고은 사건이다. 고은은 자신의 기행과 성폭력 문제가 제기될 때마다 극구 부인하며 자신를 사칭한 '가짜 고은'의 짓이라고 말했다. 고은 본인의 기억에 따르면 '가짜 고은'이 처음 등장한 것은 1961년이라고 한다. 이어 1962년 고은이 종단으로부터 징계를 받고 환속하자 '가짜 고은'도 머리를 기르고 환속한 세속인 차림으로 고은 행세를 하고 다녔다. 고은이 밝힌 환속 이유를 다룬 1963년 경향신문 기사에는 '가짜 고은'이 전국 각지에서 갖가지 범죄를 저지르고 다녀서 수배령이 내려졌으나 체포하지 못하고 있다고 기술되어 있다.
하나의 전쟁이 사소한 발단으로 시작되듯이 그의 환속도 사소한 데서 고려되었다.
작년과 금년 사이에 가짜 고은이 생겨나서 서울을 중심으로 김천, 여주, 대전, 제주, 수원, 대구 등지를 비롯해서 각 산중사원에서 갖은 비행, 부녀농락, 협박, 사기, 가짜약혼 등을 하면서 명예가 훼손됨으로써 화가 났지만, 중부서에서는 전국적으로 수배하고 있으나 아직 잡지 못하고 있다.
그 가짜는 정부고관댁을 방문해서 사기행각을 하였다. 이렇게 신변의 인격이 구석구석에서 타락하기 때문에 그는 날마다 우울하였으나 한편 마음대로 해먹으렴 하고 잠자코 있었다.
아무튼 그는 현 종단의 형성내질이나 아직도 봉건적인 운명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이런 외부적인 것보다 자신의 비승려성을 발견하고 나서 환속할 것을 홀연히 결심한 것이다.
경향신문 1963년 8월 3일자 3면 《시인 고은은 왜 환속했나》
이렇게 전국 여러 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가짜 고은'이 나타나 추행과 기행을 일삼자 '가짜 고은은 홍길동'이라는 우스갯소리까지 생겨났다. 이에 진짜 고은은 '가짜 고은'이 한두 명이 아니라면서 자신의 유명함을 한탄하기도 했다. '가짜 고은'의 악행은 갈수록 대담해져서 서울에서는 모 대학 영문과 졸업반인 여대생과 결혼하고 제주도에서도 충남대 가정과 출신의 여자와 동거하는가 하면 계룡산에서는 공주 지방의 문학청년들의 추앙을 받으며 금품 수취도 일삼으며 각종 사기 행각을 벌였다. '가짜 고은'의 악행 때문에 진짜 고은이 억울하게 가해자로 몰려 죽도록 얻어맞은 적도 여러 차례라고 한다.

인터넷도 휴대폰도 없던 시절임에도 불구하고 '가짜 고은'은 신통하게도 진짜 고은의 지방 스케줄을 척척 알아내 경주, 김천, 충남 등 각지에서 열린 백일장, 한시대회 등에 심사위원으로 참석하여 추행과 기행으로 물의를 일으켰다. 공교롭게도 '가짜 고은'이 이런 물의를 일으킬 때마다 진짜로 초청받은 '진짜 고은'은 무슨 사정 때문인지 행사장에 나타나지 않았다. 이에 분개한 지방 문인들이 고은을 고발하기도 했다. 고은은 이에 대해 '가짜 고은'의 소행이라고 계속 강변하였다. '진짜 고은'은 이런 신출귀몰하던 '가짜 고은'을 붙잡기 위해 기를 썼다고 하지만 문학 관련 행사장에 수없이 나타난 '가짜 고은'과 좀체로 마주치지 못했다.

고은의 주장에 의하면, 이런 신출귀몰하던 '가짜 고은'이 잡힌 것은 두 차례였다고 한다.

첫 번째는 제주도에서 지역 유력자의 딸과 사기 결혼한 '가짜 고은'이 검거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검거 시점에 대해서는 고은 스스로도 증언이 오락가락했다. 어떤 인터뷰에서는 1963년의 일이라고 하며 다른 인터뷰에서는 1968년의 일이라고 했다. 체포 정황에 대해서도 본인이 직접 체포했다고 하기도 하고 붙잡혔다는 사실을 전해 들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1968년에 직접 체포했다는 회고는 후술하는 두 번째의 서울에서의 체포 이야기와 혼동한 것으로 보인다. 가장 개연성이 높은 회고에 의하면 고은은 잘 알려진 대로 1963년 목포발 제주행 배에서 세 번째 자살 시도를 하려다 실패해서 제주도 산지항에 도착했다. 그의 제주 방문은 이때가 세 번째[1]였는데 그가 이번에는 제주도에서 눌러 살려고 왔다고 밝히자 제주일보 등 지역 언론에서 '진짜가 나타났다'는 기사를 실으며 이전에 누군가 고은을 사칭해 사기결혼을 했다가 들통나 붙잡혔다고 했다는 것이다. #

그러나 이 사기결혼 이야기와 사칭범 검거 사실은 고은의 주장 외에는 다른 객관적인 자료(언론기사, 사건기록, 관련자 증언 등)로 검증되지 않는다. 일각에서는 오히려 고은이 환속하기 이전 아직 승려 신분으로 제주도를 방문했을 때[2] 한 여자와 사실혼 관계까지 치달았다고 주장했다. 사기결혼 이야기는 이 과거 행적을 둘러대기 위해 꾸며냈다는 것이다. #

두 번째는 서울에서 활개치던 '가짜 고은'을 종로3가 백궁다방[3]에서 형사와 함께 검거했다는 것이다. 고은은 이 사건에 대해서도 1970년대 중반의 일이라고 했다가 1968년의 일이라고 하는 등 증언이 오락가락했다. 그래도 이 사건은 동아일보 기사를 통해 1968년에 일어난 사실로 확인되며 1970년대로 기억하는 것은 단순한 기억 착오로 보인다.
▼ 2일 서울 성동경찰서는 S출판사원 전의섭씨(32, 서울 성북구 삼양동)를 잡아 즉결 심판에 돌렸는데…
▼ 전씨는 시인 고은씨(33)로 행세하면서 주로 바람난 문학소녀들을 꾀어내 농락하고 다녔다는 것으로…
▼ 이 바람에 진짜 고씨는 난데없이 알지 못하는 여자들로부터 다정한 전화와 편지를 받고 당황하곤 하다가 지난 28일 모 여선생과 만나기로 돼있던 다방에 형사와 함께 나가 전씨를 붙잡았다고…
▼ 철창 신세가 된 전씨는 자기의 승명이 「고운(高雲)」이라 『고운입니다』하면 여자들이 으레 「고은」인줄 알고 따라다니더라고 극구 변명…
동아일보 1968년 10월 2일자 3면 《휴지통[4]

고은과 지인들은 이 당시의 정황에 대해 조금 더 자세한 뒷이야기를 전한 적이 있다. 검거 당시 이 '가짜 고은'은 시인을 사칭한 사기를 노모를 모시는 생계수단으로 삼고 있었으며 심지어 대학 영문학과 졸업반 여성과 관계를 갖고 결혼까지 한 상태였다. 체포된 '가짜 고은'은 진짜 고은에게 감옥에 가게 되면 어머니와 아내를 돌봐줄 사람이 없다고 하소연하고 사기결혼을 한 그의 아내도 '남편을 새 사람으로 만들겠다.'고 눈물로 호소하였다고 한다. 고은은 이를 딱하게 여겨 고발장을 찢은 뒤 술을 사 주며 따귀만 두어 대 갈긴 뒤에 용서를 해주었다고 한다. #1 #2 이는 고은의 호방하고 따뜻한 인격을 보여주는 미담으로 회자되었다.

그러나 당시의 동아일보 기사를 자세히 보면 '진짜 고은'이 '가짜 고은'을 잡고서도 용서해 줬다는 미담도 과장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우선 실명까지 적시된 이 '가짜 고은' 전씨는 전업 사기꾼이 아니라 직장인(출판사 직원)이었다. 자기 직장이 버젓이 있는데 생계를 위해 전업 사기행각을 벌였을 가능성은 낮다. 또 기사에는 그가 즉결심판에 처해졌다고 나온다. 이것은 죄질이 경범죄 수준으로 미미했음을 의미한다. 이때 잡힌 '가짜 고은' 전씨가 1960년대 전국 각지에서 벌어진 사기, 혼인빙자간음 등으로 이미 수배가 내려진 당사자였다면 '진짜 고은'이 고발장을 찢건 말건 무거운 형사처벌이 불가피했을 것이다. 따라서 이 경우는 출판계에 종사하던 범인 전씨가 이름이 익은 관련 문인들을 사칭하며 사기 데이트를 벌인 정도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가짜 고은' 이야기가 100% 거짓이라고 볼 수는 없으나 당시 고은에 얽힌 수많은 기행 및 범죄 행각이 모두 '가짜 고은'의 소행이라고 보기에는 명쾌하게 설명되지 못하는 부분이 너무 많다. 1968년 '가짜 고은'이 검거되었지만 이후에도 수년간 '가짜 고은'의 출몰은 끊이지 않았다. 이문열은 고은을 모델로 한 것으로 유명한 소설 사로잡힌 악령에서 이러한 고은의 해명을 빗대 "해방 뒤 이 나라에는 가짜 백작사건까지 있었지만 가짜 문인이 있었다는 말은 그의 연보나 자서전 이외에는 본적도 들은 적도 없다. 거기다 그 소동이 있었다는 60년대 중반만 해도 그의 지명도는 전국적으로 가짜가 돌아다닐만큼 높지도 못했다. 그 전에도 그 뒤에도 그보다 지명도 높은 사람이 수없이 많았는데 어째서 그들에게는 한 번도 그같은 가짜 소동이 없고 그때만 해도 그리 대중적이지 못하던 그에게만 집중적으로 가짜 소동이 일어난 것일까."고 꼬집었다.

결국 '가짜 고은' 주장에도 불구하고 1960~70년대 초까지 고은과 관련된 불미스러운 소문이 계속 퍼지자 당시 고은이 몸 담고 있던 순수 문학계는 점점 그를 배척하였다. 이에 심각한 위기 의식을 느낀 고은은 네 번째 자살 시도를 했다. 1970년 무렵 북한산 정릉 계곡에서 수면제 100여 알을 먹고 잠들었으나 마침 주변에서 훈련하고 있던 예비군들에 의해 발견되어 북한산 입구에 있는 병원으로 옮겨져 다음날 30시간만에 깨어났다. 다행히 그의 주머니 속에 다소간의 돈이 들어 있었던 탓에 이 돈으로 병원비를 지불하고 그를 입원시킬 수 있었다고 한다. 외진 병원이었지만 어찌 알았는지 최인훈 등 동료 문인들이 병문안을 와서 그가 깨어나길 기다리고 있었다고 한다. #

순수 문학계에서 멀어지던 고은은 1974년 갑자기 저항시집 <문의 마을에 가서>를 발표하며 저항시인으로 변신했고 이어 1974년 11월 진보 성향 문인들을 결집하여 대한민국 최초의 진보 성향 문인 단체인 '자유실천문인협의회(민족문학작가회의)'를 창설하고 초대 회장에 취임하여 진보 문학계의 좌장이 되었다. 이후에는 '가짜 고은' 사건도, 고은과 관련된 성폭력 루머도 더 이상 나돌지 않게 되었다.

고은의 이러한 변신은 본인의 추악한 악령을 감추고 민주화 운동이라는 거대하고도 절대적인 시대의 숙제이자 사명감이라는 타이틀 뒤에 숨어 더욱 악이 번성하게끔 하였다. 이 악은 절멸되지 않으며 오히려 주위에 부역자, 동조자들로 인하여 엽색 행각은 사소한 일, 대의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일 정도로 묵과되었으며 고은을 비난하는 것은 곧 민주화 정신의 문학계를 비판하는 것으로 걷잡을 수 없이 그 의미가 커져만 갔다.

이후 진보문단의 거장이 된 고은은 성추행 파문이 불거지기 1년 전인 2017년 3월 TV에 출연하여 당시 박근혜 정부의 '문화계 블랙리스트'를 강도 높게 비판하고 아울러 문단 내 성폭력 사태에 대해 "슬픈 일"이라고 말하면서 "현대 초기에는 퇴폐적, 퇴행적 일탈을 한 문인들이 있었지만 지금은 작가들도 사회가 요구하는 윤리적 기준을 갖춰야 한다"고 일침을 놓았다. #

2.2. 이문열의 소설 사로잡힌 악령

그의 악이 번성하는 한 파렴치한 엽색(獵色)의 식단도 풍성했다. 자랑스레 휘젓고 다니는 색주가는 기본이었고 손쉽고 뒷말없는 유부녀는 속되게 표현해 간식이었다. 더욱 악의 섞어 말하자면 신선한 후식도 그 무렵에는 그에게는 흔했다. 시인의 허명에 조금했다가 화대도 없이 몇 달 침실봉사만 한 신출내기 여류시인이 있는가 하면, 뜻도 모르고 관중의 갈채에만 홀려 있다가 느닷없이 그의 침실로 끌려가 눈물과 후회 속의 아침을 맞는 얼치기 문학소녀가 있었고, 그 자신이 과장하는 시인이란 호칭에 눈부셔 옷 벗기는 줄도 모르다가 (중략) 놀라 때늦은 비명을 지르는 철없는 여대생도 있었다.
사로잡힌 악령》, 이문열

1994년 소설가 이문열이 소설 사로잡힌 악령을 발표하여 문학계에 파문을 불러일으켰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승려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폭음을 일삼던 문인이었는데 유명 원로 스님의 수제자라는 명성을 이용해 문화예술계의 고위 인사들과 접촉하면서 문학계의 중심인물로 군림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후 주인공은 자신의 권력을 이용하여 여성 문학 지망생들을 농락하는 악마성을 드러냈다. 그러나 그가 지나친 악행을 일삼자 일부 문인들은 그를 문학계에서 배척하려고 시도한다. 이에 주인공은 살길을 모색하기 위해 이번에는 민주투사로 변모한다. 그리고 오히려 더욱 유명 인사가 되어 자신의 권력으로 예전보다 더 심한 악행을 일삼으며 살아간다는 내용이다.

소설 속에서 또 다른 효봉스님의 문도의 입을 빌려 그가 무턱대고 계속해서 스승님을 찾아 어찌어찌 상좌가 되었다고 묘사하고 있다. 또한 문단에 데뷔한 후 자칭 효봉 스님의 상좌(수제자)라고 말하는 등 효봉 스님의 명성을 이용하여 문화예술계의 고위 인사들과 쉽게 교류할 수 있었다고 한다. 소설에서는 명사 사냥꾼으로 표현되었다. 한 예로 말 몇 번 섞어 본 것이 몇 년 뒤에는 아주 잘 아는 사이로, 또 몇 년 뒤에는 죽마고우로 포장되어 사람들을 현혹했다는 대목이다.

남북작가회담을 추진하다가 구속된 일도 소설 속에서는 방북을 선수치고 싶었으나 빼앗긴 것에 대한 분, 그러나 이러한 일로 또다시 추앙받게 되고 떠받들어 받게 된 씁쓸한 현실에 대한 비난이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

이 소설 주인공의 실제 모델이 바로 고은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자 당시 고은이 좌장으로 있던 '민족문학작가회의' 등을 비롯해 진보 계열 문인들이 집단으로 들고 일어나 이문열을 공격했다. 당시 진보 문인들은 민주투사 출신이며 현재 진보 계열 문인들의 정신적 지주인 고은을 의도적으로 비방하고 있다며 이문열을 맹비난했다. 당시 고은은 김영삼 정권이 자신을 표적으로 삼아 음해하고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러한 맹공에 밀린 이문열 작가는 "특정인물을 상정한 것은 아니었다"고 한 발 물러섰다. 하지만 비난이 수그러들지 않자 자신의 출간 단편집에서 제외했으며 이 책에 대해 절판 조치까지 취했다. 때문에 이 작품은 1994년 출간된 중단편집 '아우와의 만남' 초판에서만 볼 수 있다.

한 가지 알아 둬야 할 것은 이문열이 30대 초반까지만 해도 고은을 상당히 존중했다는 점이다. 이문구의 <산 너머 남촌>에 실린 송기숙의 발문, 시골 밭둑의 싱싱한 수풀을 보면 1982년에 1979년 지미 카터 내한 반대시위에 대한 재판을 받기 위해 대구교도소로 이감되어 있던 고은을 면회하기 위해 송기숙, 이문구, 황석영, 김지하 등이 대구로 왔는데 대구에 살던 이문열도 찾아가 함께 면회했다. 그런 이문열이 왜 10여년 뒤에 <사로잡힌 악령>을 썼을까 관심을 가지는 사람이 그때는 없었다.

2018년 미투 운동의 최전선에 선 최영미가 그의 시로 고은을 천하에 고발했을 때 많은 국민들이 충격의 도가니에 빠진 것에 반해 그 당시 훨씬 높은 수위로 강도 높게 소설적 표현을 이용하여 고은을 비판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실체가 널리 알려지지 못하였다. 만약 그 당시 정의가 바로세워졌다면 노벨문학상 후보라는 문단의 오점은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사로잡힌 악령 전문

더 자세한 내용은 사로잡힌 악령 참조.

2.3. 2017-2018년 미투 운동 때 성폭력 의혹이 제기되다


그러나 일부 여성 문인은 이날 언론사에 보낸 보도자료에서 "최영미가 특정한 고은에 의한 성폭력의 실체는 아직 사실관계도 확정되지 않았다"며 "지금으로부터 23~24년 전 인사동 어느 주점에서 벌어졌다고 하는 '고은 성추행 목격담'에 대해서는 발표 다음날 인사동 탑골주점 사장이 그 같은 사실이 없었다는 취지로 공개 증언을 했고, '괴물' 시 속의 출판사 편집자로 지목된 이 역시 시 내용이 자신이 겪은 바와 다르다고 증언해 지금도 진실공방과 후속조처가 진행되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고은은 군사독재 타도와 민주화운동에 헌신하고 한국문학 100년의 상징적 존재가 되었다. 고은의 생애와 작품이 얻은 가치를 여성운동의 이름으로 일방적으로 매도하고, 진실이 아닌 풍문만으로 폐기하는 결과를 빚었을 때 우리 여성문학인들이 모욕감과 굴욕감을 느낌은 물론, 이것이 여성운동의 대의마저 손상할 우려를 금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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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재평가 및 여론

저런 사건들이 밝혀진 뒤 거의 모든 곳에서 여론과 인식이 매우 좋지 않게 되었다. 여러 사람들 앞에서 유사 자위행위를 하고 거리낌 없이 자신의 성기를 만져 달라고 요구하며 노래방에서는 자신의 성기를 노출하는 등 너무나도 충격적인 증언의 연속이라 그에 대한 평가는 더 나빠질 수도 없을 정도로 추락했다. 게다가 말년에 노망이 들어 버젓이 저지른 행위들이라기보단 이미 60년대부터 축적된 추악한 행태와 엽색 행각이 말년에 이르러서까지 자제가 되지 않았음을 사람들이 깨달으면서 그는 돌이킬 수 없는 나락으로 떨어졌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놀랍다", "이토록 거대한 악이 지금까지 존경받으며 성장해 왔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다", "평소 고은의 시에 아는 바가 전혀 없었음에도, 이렇게까지 떠받들여지는 것이 이상하다고 했는데, 그 주위사람들이 지금까지 떠받들여줘서 그런 것 아닌가? 도대체 이런 사람을 왜 그토록 찬양했는가? 어이없다"며 놀라움을 표했다. 실제로 이 사태 이전에도 그의 바르지 못한 행실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떠돌았고 자신을 치켜세우기 위해 존경받는 문인들을 근거 없이 깎아내리고 말도 안 되는 인신공격을 하는 등 치졸하고 유치한 행태가 잘 알려져 있긴 했으나 그의 작품을 떠받들던 문학계에게 억눌려 무시되곤 했던 것.

소수의 지인들이나마 '작가의 도덕과 작품은 별개'라며[6] 그를 옹호했지만 이마저도 여의치 않았고 되려 욕을 바가지로 먹었다. 사실 그의 평가가 완전 나락으로 떨어진 데는 이 지인들의 옹호가 말 그대로 결정타를 날렸다고 할 수 있다.

옹호해 주겠다고 나선 인간들조차 "그 분이 그럴 분이 아니다"라는 말은 하나도 안 했고 '그때는 시대가 그랬다'거나 '그런 행위로 시인의 업적이 폄하되어서는 안된다'는 소리밖에 안 나오면서 옹호자들조차 그런 일이 없었다고 도저히 말을 못 할 만큼 명명백백하게 그 짓을 했다는 걸 역으로 입증해 버렸기 때문.[7]

이로 인해 1994년에 이미 이를 세상에 폭로한 이문열이 재평가를 받았으며 그간 고은의 행태를 알고도 이를 묵인한 문단 권력의 추악한 협잡배에 대한 분노도 강해졌다. 대중은 "이를 알고도 묵인한 그들은 도대체 뭐하는 사람들인가? 이게 과연 예술과 인생을 논하는 문학가들, 시인들이 할 일인가?"하며 혀를 끌끌 찼다.

2018년에 출간된 수능특강에 수록된 <머슴 대길이>는 미투운동 이후 EBS 수능특강 관련 강의에서 해당 부분을 전부 편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은은 집필을 계속할 것이며 절필하지 않겠다고 선언하였으며 창작과비평사[8]당분간 출간이 힘들 것 같다고 복귀를 고려하는 입장을 보여 빈축을 샀다.

그리고 2023년 시집과 대담집을 잇따라 내놓았다. 계간지에 고 김성동 작가 추모시도 기고했다.#

물론 출간 소식에 여론이 싸늘했던 터라[9] 결국 시집을 발매했던 실천문학사에서는 출간을 취소했다. #
그러다 반년 만에 재출간했다. #

이후 고은 시인의 시 발매에 대한 여론의 비판이 부당하다며 설문조사를 실시했다. 설문조사를 공유하는 문학 신문 트윗 설문조사에서는 출판의 자유권출판의 자유권리 억압 사태에 대한 원인 분석 설문 조사라는 제목을 사용하여 극단적인 예시[10]와 내용으로 여론의 비판에 대해서 부당함을 설파했다. 하지만 출판의 자유가 있다면 고은 시인이 10년 넘게 계속된 위계에 의한 성폭력 등을 사과하지 않고 되려 피해자에게 손해 배상 등을 청구해 놓고 책을 또다시 출간한 사실에 대해서 비판할 자유가 있으며 이 비판에 출간 취소를 결정한 것은 실천문학사의 행동이라는 것을 유의해야 한다. 당연히 가해자 옹호, 범죄 미화라는 비판이 쏟아졌다.

3. 지자체의 반응




[1] 창비신서 121권 『고은 문학의 세계』(1993년 발행)에 실린 인터뷰에 의하면 1960년 무렵에 구상과 처음 왔고 그 다음(날짜 미상)에 불교계 관련 일로 한 번 더 방문했다고 회고하고 있다.[2] 고은 스스로도 1963년의 제주행이 세 번째임을 인정한 바 있다.[3] 백궁다방은 단성사 옆에 위치한 서울 시내 유명 다방 중 하나였다. 단성사, 피카디리극장, 세기극장(1979년 이후 서울극장)이 모여있던 곳이라 인기 있는 데이트 장소이기도 했다.[4] 동아일보의 가십성 기사 게재 코너로, 21세기에도 남아 있다.[5] 입주 당시 광교역처럼 광교 입주민들의 반발에 시달린 바 있다.[6] 이러한 주장에서 비롯된 각종 발언 자체가 작가와 작품을 따로 떼어내어 작품의 질을 막론하고 작가의 도덕성에 문제가 있다는 뜻에서 나온 것이다. 후술하겠지만 옹호자 쪽에서조차 그의 도덕성에서만큼은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주었다.[7] 진짜 술 퍼먹고 남자한테 키스한 문인도 있었다. 술집에서 술 마시고 나오다가 김지하를 보게 되자 밑도 끝도 없이 달려들어 끌어안고 입술이 부르틀 정도로 키스를 했다. 강제 키스 당하다 입술 깨물린 김지하는 이후 최인호를 슬슬 피해다녔다.[8] 고은의 절친으로, 천안함 피격 사건과 관련하여 음모론을 퍼뜨린 문단 권력자 백낙청이 지배하는 출판사.[9] 1월경 실시된 설문조사 결과도 고은 시인의 복귀를 반대하는 여론이 다수다.#[10] 평생 농사만 짓던 농부가 범죄를 저질러 5년간을 복역하고 나와서 다시 농사에 종사하는데 주위에서 평생 농사를 짓지 못하게 하는 것은 범죄입니까? 정의입니까? / 그 범죄 농부가 수확한 벼(장물 아님)를 모 정미소에서 판매할 수 있게 쌀로 도정해주었는데, 그 정미소에 대해 범죄인을 도와준 사악한 정미소라며 판매중단을 압박하는 것은 범죄입니까? 정의입니까? 등. 정작 고은 시인의 성폭행에 대해서는 처벌받지 않았다. 이를 폭로한 피해자와 언론 기자에 대해 고은 시인이 손해배상 소송을 진행했을 뿐이다.[11] 만인보에 3.1 운동 관련 인물들에 대한 내용도 있다는 것이 서울시청측의 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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