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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바우 영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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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fff> 고바우 영감의 주요 선정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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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7호 538호 53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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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기록
}}}
The longest series of four-cut cartoons
(최장기 연재한 4컷 만화)
<rowcolor=#fff> 대상 기록 장소 등재 시일
<rowcolor=#000,#fff>
고바우 영감
50년 241일
대한민국 서울
기네스 세계 기록 설명 페이지

}}}}}} ||

파일:attachment/고바우 영감/ko.jpg
파일:1955.2.1 동아.jpg파일:고바우영감(마지막회).png
동아일보 연재 첫회
1955년 2월 1일
마지막회, 문화일보
2000년 9월 29일

1. 개요2. 등장인물3. 출판4. 여담5. 관련 문서

1. 개요

시사만화가 김성환 작가가 1955년부터 2000년까지 연재한 4컷짜리 시사 풍자만화.

고바우 영감이 처음 등장한 것은 1950년 '만화신보'에 연재 중이던 '고사리군'에서 고사리군의 아버지로 등장한 것이다. 고바우 영감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것은 1950년 12월 30일 '사병만화'이고 이후 '만화신문', '만화승리', '월간희망' 등의 잡지를 거치다가, 1955년 2월 1일부터 동아일보로 자리를 옮겨서 매일 연재되었다. 공식적으로는 1955년 2월 1일자가 첫회다. 동아일보에서 1980년 8월 9일(7,971회)까지 연재하고 1980년 9월 11일(7,972회)부터는 조선일보로 자리를 옮겨서 1992년 8월 10일(11,700회)까지 연재했다. 1992년 10월 1일(11,701회)부터 문화일보로 자리를 옮겨서 연재되다가 2000년 9월 29일(14,139회)를 끝으로 50년 만에 연재가 종료되었다.

대한민국 시사만화 중에서 1만 4139회 연재라는 최장 기록을 가지게 되었으며, 스크린톤 없이[1] 만화 펜촉 그대로 매일 신문에 연재한 4컷짜리 만화인 점으로도 보듯 작가의 필력도 세월에 따라 변화한 적이 있기도 하다.

초기에는 가정적이고 넌센스적으로 그려낸 풍자물이었으나 함께 연재되던 1컷만평을 대신하여 1950년대 종반 경무대 똥통 사건으로 사회적 탄압을 받고 1960년대 4.19 혁명5.16 군사정변기 등을 거치면서 점차 정치적 풍자물로 바뀌어갔으며 만화검열이 심했던 1970~80년대를 거치면서는 정치사회를 비판하고 풍자하는 만화로 진화해가면서 그 당시 검열당국의 경고와 제재 등을 받은 적도 있다. 심한 경우 말풍선 하나가 통째로 잘린다거나 아예 한 화 전체가 지워져서 나간 적도 있다. 몇몇 에피소드를 대충 봐도 이렇다.

놀라운 것은, 실제로 이 때는 이런 수법을 쓰면서까지 군대 안 가려고 했던 사람들이 꽤 있었다는 사실이다. 기사에 따르면 심지어 항문양잿물을 발라 치질로 위장하는 경우도 있었고 기피자의 규모는 매년 5만~10만에 달했다. 6.25 전쟁이 끝난지 얼마 되지 않아 거지가 된 상이군인들의 처참한 모습을 흔히 볼 수 있었고, 지금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북한의 재남침 위협이 컸던 때였다. 게다가 당시 군납비리는 심각한 수준이어서, 짬밥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사병으로 군대를 가면 제대로 먹지도 못하던 시절이었다. 그리고 당시에는 복무규율도 제대로 정해져있지 않고, 일본군시절의 똥군기 잔재가 엄청나던 시절이라 구타가혹행위가 수시로 벌어지던 때였다.[2] 이러니 입대에 대한 두려움이 워낙 커서 이렇게까지 했던 모양이다. 참고로 김성환 본인은 6.25 당시 입대하여 현역으로 실전을 겪으며 살아남았다.

검열은 제5공화국 시절인 1980년대가 가장 극심하여 이때는 1950년대 초처럼 내용 없는 만화로 돌아갔는데도 각종 의심, 검열, 방해를 받았다고 한다. 이렇게 풍자의 맛이 사라진 만화에 딴 사람이 그린다는 오해를 받기도 했다고 한다.

가장 가관은 1981년 새해 복 많이 받으시라면서 인사하는 고바우 영감이 머리가 빛나는 장면 때문에 전두환을 상징하는 거 아니냐고 연재불가당한 사례. 전두환이 듣보잡 군인 시절 이전부터도 대머리 고바우 영감이었음에도... 박용식 같이 전두환 닮았다는 이유만으로 방송 나오지 못한 경우처럼 대머리 전두환을 연상하게 하는 것은 불가하던 시절이었다.

다만 영향력이 하도 큰 지라 독재정권 하에서 여러번 잡혀가거나 벌금을 내어도 손찌검도 당하지 않고 불수면 고문도 없었다고 한다. 되려 5일 뒤 석방되어 인지도만 높아졌는데, 화백은 작전 성공이었다고 회고했다. 역시 대인배 이승만 정권에서는 450의 저렴한 벌금으로 퉁친 적도 있는데 이때도 만화가 무슨 허위"보도"를 하느냐며 욕이나 더 먹었다고.

독자들에게는 정치사회를 풍자하고 신랄한 비판을 그려내었기 때문에 신문을 보는 입장에서는 답답한 기분을 날렸다거나 풍자적인 내용으로 인해서 재밌었다는 평가들이 오갔다. 자체 설문조사에서 신문을 볼 때 가장 먼저보는 기사로 고바우 영감이 꼽히는 일도 부지기수였다고 한다.

연재가 종료된 2000년 11월에는 고바우 영감 연재 50주년 기념우표가 발행되기도 하였다.

2. 등장인물

3. 출판

4. 여담

5. 관련 문서



[1] 1992년, 문화일보로 옮긴 뒤 연재 분량에서는 스크린톤을 간간이 썼다.[2] 흔히들 말하는 쌍팔년도 군대가 바로 이 시절을 가리키는 말이다. 1962년까지 한국은 서기가 아닌 단기를 사용했고, 4288년인 1955년 시절의 열악한 군대가 바로 이 시기이다.[3] 조선일보가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에 추가되기 전에는 조선 뉴스 라이브러리에서 볼 수 있었다.[4] 이 기간 문화일보 연재 분량은 1,183회인데 검색결과는 1,170건이고, 중간에 제목/날짜는 있는데 클릭해도 이미지가 안뜨는 경우나, 만화가 아닌 고바우 영감을 다룬 기사들도 섞여 있어 최소 수십 건은 누락이라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