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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21:55:31

검도 vs 해동검도 삼대논쟁

1. 개요2. 논점
2.1. 정통성 논쟁2.2. 실전성 논쟁2.3. 베기 논쟁
3. 이후4.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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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해동검도검도간의 논쟁.

해동검도가 1980년대 후반 이후 급격히 세를 불리게 되면서, 일본 무술인 검도를 보급하던 대한검도회와의 충돌이 시작되었다. 대한검도회에서 검도 7단이라고 자처한 나한일을 단급 사칭 및 검도 단어의 무단 사용으로 고소하였다. 이에 나한일 측은 해동검도 명의의 유단증을 제출하면서, 자신은 해동검도 7단이라고 맞고소를 하였고 혐의 없음으로 수사종결 처분되었다.

무술 명칭 끝에 도(道)를 붙이는 것은 20세기 들어 일본에서 시작한 것으로, 가노 지고로의 유도가 시초이다. 검도 역시 그러한 흐름을 따랐던 것으로, 고유명사라고 볼 여지도 있지만, 이미 한국에선 '~검도'라는 이름의 단체가 난립하고 있어서 일반명사처럼 쓰이는 경향이 컸기 때문에 법원에서 나한일 측의 손을 들어준 것이다.

이후 해동검도 측이 세를 불리면서 검도에 대해 디스를 걸었다. 이는 앞서 말한 검도 측과 원한 문제도 있지만, 당시 메이저였던 검도를 까고 자신들의 위치를 확고히 함으로써 수련자를 떼로 긁어모으고, 창작무술이 근본이었던 자신들의 취약한 기반을 가리고자 하는 데 있었다. 해동 측에서 다양하게 검도를 디스했지만 총체적으로는 3개 주제로 압축할 수 있다. 90년대와 2000년대 중반까지 검 무술 관련 커뮤니티에서는 늘 이 문제로 시끌벅적했다. 3개 주제는 다음과 같다.

2. 논점

2.1. 정통성 논쟁

해동검도 측이 검도를 공격하는데 쓴 가장 큰 떡밥. 간단히 말해서 검도는 독립군 학살하던 침략자 일본군의 무술이고, 해동검도는 고구려 시절부터(?) 전해내려온 고유의 우리 검도라는 논리였다.[1] 해동검도 측이 자부심을 가지는 가장 큰 원천이자, 지금도 일부 유효하다.

검도는 1980년대까지 굳이 역사나 그런 것을 건드리지 않고 그냥 조용히 수련하는 것을 방침으로 삼았다. 누가 봐도 일본 옷인 하카마를 입고 죽도호구를 쓰기 때문에 가린다고 해도 가릴 수도 없는데 반일감정을 굳이 자극해서 손해를 볼 이유가 없기 때문이었다. 수련자들이나 일반인들도 일본의 무술임을 잘 알았지만, 대다수 한국 일반인들은 비싼 운동으로 알려진 검도보다는 복싱, 태권도, 합기도 같은 맨손무술을 더 배우려고 했기 때문에 검도에 대한 대중의 관심도 그렇게 크지 않아 국내 사회에 자연스럽게 녹아들 수 있었다.

문제는 딱히 드러내고 싶지 않았던 이 부분을 당시 신생단체였던 해동검도가 크게 자극한 것. 특히 80년대는 국풍81 등 신군부 정권이 민족주의 강화 정책을 지속적으로 실시하던 때였거니와 지금보다 반일감정이 훨씬 심했기 때문에, 검도의 약점인 '쪽바리 일본무도를 배우지 말자.'는 슬로건을 해동이 터트리자 검도는 대내외적인 폭풍에 휩싸였다.

여기에 드라마 '무풍지대' 등으로 크게 이름을 알린 탤런트 겸 해동검도 무술인 나한일의 후광과, 고구려 전통 검술이라는 드립, 민족검도라는 드립에 의해 해동검도는 대대적인 중흥기를 맞게 되었다. 대규모 사범 연수를 통해 적극적으로 세력확장에 나선 때도 이 즈음. 이후로 해동검도 수련자들은 2000년대 초반 나한일과 김정호의 분쟁 때문에 재판판결문이 해동검도의 진실을 파헤칠 때까지 이 점에 대해 자부심이 컸다.

당시 대한검도회장 이종림은 이런 후폭풍에 대응하고자 '일본에 검과 검술을 전해준 것은 고대 한국인데, 검도가 일본으로 건너가 발전했으므로 결국 우리가 준 것을 다시 되찾아온 것'이라는 논리를 내세웠다. 이 주장은 이후 국제검도연맹의 회원단체인 대한검도회의 공식 입장이 되었다. 그러나 이 주장은 사실 해동검도 주장에 버금가는 또다른 역사 왜곡이라, 검도인들 사이에서도 무리수 주장을 과감히 철회해야 한다는 의견이 많다.

하여튼 이렇게 정통성 문제에서 해동검도가 우위를 점하던 찰나, 이를 한번에 박살내는 사건이 벌어지니, 그것이 바로 해동검도 내의 분쟁으로 벌어진 재판 과정 중 나온 해동검도의 실체 탄생 내력이었다. 재판에 따르면 해동검도는 고대 고구려 무술 따위가 아니라 기천문심검도에서 갈라져 나온 유파이며, 해동검도의 실체는 현대에 만들어진 창작무술이라는 것이 밝혀진 것이다.[2]

일각에선 후술된 베기 논쟁에서 보이듯 해동검도 역시 베기술은 족보를 거슬러 올라가보면 일본군 장교 나카무라 타이사부로가 창시한 나카무라류에서 유입되었고, 더 거슬러 올라가면 일본육군의 군도술인 군도의 조법에서 나왔다는 주장도 하는 모양.

하여튼 이렇게 해동검도 역시 현대 창작무술이라는게 까발려진 이후에도 2010년대까지 해동검도의 몇몇 관장들이 모여서 비슷한 논리로 검도를 디스한 바 있었으나, 인터넷이 대중화된 현대에 와서는 정보를 찾아 보기 쉬워져서인지 더 이상 해동검도측 논리가 잘 통하지 않는다. 차라리 더 그럴듯한 창작검술을 창안해서 검도, 해동검도 둘 다랑 차별화하는게 나을 지경.

2.2. 실전성 논쟁

해동 측은 자기들은 진검이랑 무거운 목검으로 수련하고, 격자 부위를 한정하지 않았고, 치는 것이 아니라 베기를 하며, 보법이 자유자재고 어쩌고 운운하며 죽도랑 호구만 뒤집어쓰고 한정된 부위만 골라 툭툭 때리는 검도는 스포츠에 불과하며, 실전성 면에서 해동검도와는 상대가 되지 않는다고 주장하며 우월성을 내세웠다.

외적으로 보기에 격자 부위를 한정하지 않고, 진검이랑 목검을 씀이 좀 더 실전에 가까운 것은 분명하기 때문에 검도 측에서도 당장 할 말은 없었다. 그러다 나중에 반박하며 내놓은 논리는 다음과 같았다.

그 외 다양한 논리를 내세웠지만 해동 측에서는 모두 비겁한 변명이라고 하며 자신들이 실전제일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여기에는 자칭 <고구려 실전검술>이라는 자부심이 작용한 것도 있었다.

검도 측에서는 이런 해동 측 도발에 대해 기본적으로 무대응, 무시한다는 원칙을 정하고 타 유파와 교류하면 파문한다는 규칙까지 제정했었다. 이 때문에 일제강점기부터 검도를 배웠으며 한국의 대한검도회 창설과 운영에 큰 역할을 한 남승희 선생이 타 유파 인원들에게 교습했다는 이유로 파면당했다. 검도인들이 크게 안타까워했다. 남승희 선생은 이종림 이사가 주도한 벨트 도복, 준거폐지 등에 반발하며 규칙 몇 개 바꾼다고 일본색이 사라지지 않는다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남승희 선생의 입장에 동조하는 검도인들이 특히 안타까워했다.

당연히 해동 측은 자신들과 한번 제대로 붙으면 바로 깨질 것이 틀림없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피한다는 것이라며 해동검도 총재였던 나한일/김정호는 대한검도회에 진검승부를 제안하기도 했다. 물론 검도 측은 거절했고 해동은 더욱 의기양양.

그러나 지도부에서 금지한다고 해도 개인 단위로 해동 측과 대련을 해본 경우는 생각보다 빈발했다. 그리고 비공식으로 행한 이런 개인 단위 시합에서 해동검도가 참담하게 깨졌다는 웃픈 이야기가 점점 퍼져나갔다. 애초에 무술이라는게 으레 그렇지만 수련 종목보다 개인의 숙련도가 더 중요한데, 그래도 나름 국내 검도계를 수십년 대표한 대한검도회 검사들에게 온갖 유사도장들이 갓 뭉쳐 탄생한 해동검도가 비비긴 인재풀에서 무리수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참고로 검도 측은 격자 부위를 제한시키고, 해동은 전신을 타겟으로 하도록 했으면서도 나왔던 결과. 해동 측 수련자 일부가 검도 도장에 도전장을 냈다가 역관광탄 사례도 있었다는 카더라가 있다.

물론 이 정도로 해동은 꺾이지 않았다. 90년대 후반부터는 자신들의 패배는 검도의 가벼운 대나무 막대기 때리기 장난질에 익숙하지 않아서일 뿐, 진짜 진검으로 하면 질 리가 없다는 논리를 주장했다.[6] 물론 일반인들의 상식으로도 진정 실전성이 있는 무술이라면 죽도를 쓰든 진검을 쓰든 제 실력을 발휘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점점 해동검도에서도 죽도와 호구를 쓰는 도장이 늘어나더니, 이제는 숫제 검도의 연격을 하는 도장도 꽤 있다. 대나무 막대기 때리기 장난질은 필요없다더니 독자적인 대련술과 호구를 고안한다며 누가 더 빨리 때리나 하고 대련하며 세미나까지 여는 곳도 있는 상황.

지금은 폐간된 무술잡지 마르스에서도 해동검도가 발구름 때 몸 전체가 앞으로 나가질 않고 제자리에서 발만 움직인다는 등의 문제를 지적한 바 있었다. 결국 이러한 것들이 합쳐져 해동검도의 실전성 우월감은 많이 퇴색되었다. 진검술 이해 문제에서도 검도인들 중 진검검리를 가르치는 검도의 본을 따로 연습하거나, 거합도를 따로 수련하는 사람이 많아졌기 때문에 더이상 진검 좀 만져봤다고 우월감 가질 시대는 끝났다고 할 수 있다. 현대 창작이며 그 뿌리부터가 출처와 실전성이 의심스러운 심검도기천문에서 비롯된 해동검법이, 일본 고류 검술 중에서 실제 우위가 있다고 판단되어 대세가 된 검도에게 확실한 실전 우위를 점한다고 볼 근거는 없다.

2.3. 베기 논쟁

해동검도가 검도를 깔 때 내세운 것 중 정통성은 왜색 떡밥, 검리에선 실전 떡밥이라면, 퍼포먼스에서는 베기 떡밥이 나왔다.

해동검도 동영상들을 보면 알겠지만, 퍼포먼스가 대부분 뭘 베는 식인데 보통 신문지, 짚단, 대나무 등을 턱턱 잘라댄다. 자를 때의 포스가 임팩트가 있고, 또 벤 다음에는 칼을 빙빙빙 돌리다 납도한다던가, 신선 뺨치는 가오를 잡으며(...) 다음 베기를 준비하는 등 오도방정을 떨며 마무리하기 때문에, 그냥 둘이서 있다가 눈에 보이지도 않게 팍 치고 끝나는 검도에 비해서 훨씬 대중들에게 받아들여지기 쉽다.[7] 실제 이런 베기 영상에 혹해서 해동검도에 입문한 경우도 많다고.

해동검도가 자신있게 내세우는 것이 바로 이 베기술이었다. 당연하겠지만 그동안 대한검도회는 죽도 검도와 더불어 제정거합, 그리고 120 cm정도의 봉을 쓰는 장도(杖道)까지 포함된 일본 전검련과는 다르게 죽도 검도만 계속 해 왔고, 검도에 포함된 진검형인 '검도의 본'도 잘 하지 않았었다. 그러다 보니 진검을 이해하는 것은 전무하다고 과언이 아닐 수준이었다. 해동검도가 베기에서 노하우가 많았던 것과 달리 짚단도 대나무도 베어본 적이 없어 해동검도가 진검베기를 주제로 태클을 걸어도 달리 할 말이 없었다. 다만 과도한 퍼포먼스적인 면을 지적하는 정도가 고작. 당연히 해동은 진검으로 베는 것이야말로 검술의 본질이라며 의기양양했고, 실전성 떡밥과 맞물려 넷상에서 벌어지는 대규모 논쟁에서 해동검도의 큰 무기가 되었다.

한편, 사실 해동검도의 베기술은 일본 나카무라류의 베기술이 유입된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비천 이영식은 진검술을 추구하다 나카무라류의 교본을 보고 연구하여 베기술을 터득했고, 나중에는 나카무라 타이사부로에게 직접 사사해 나카무라류를 배워 그 정수를 배웠다고 하는데, 이 이영식의 단체가 도법협회로 여기서 베기술을 배운 사람들이 80년대 말~90년대 초 한창 해동검도가 세력을 늘려갈 때 사범으로 영입되거나 들어갔다는 것. 현재도 해동검도 도장 중에서는 토야마류의 형을 가르치는 곳이 간혹 있는데, 이런 곳이 바로 도법협회 출신 사범들이 운영하거나 영향을 받은 곳이라는 주장이다.

하여튼 이들이 들어와 베기술을 정착시킨 것은 좋았지만, 퍼포먼스적인 면에 너무 집착하다보니 나카무라류 베기술의 본질에서도 멀어졌다. 짚단을 베어도 떨어지지 않고 그대로 서 있는 무협지적 퍼포먼스도 추구하다 보니 삼각도라는 도검을 만들어내기도 즉 실전을 위한 베기가 아닌, 베기를 위한 베기가 되어버린 것.

3. 이후

대한검도회 측에선 그동안 죽도검도에만 신경쓰느라 정작 중요한 것을 모르던 검도 측이 거합이나 검도의 본, 베기 등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과거보다는 진검에 더 신경 쓰게 되었다. 또한 왜색 논쟁을 겪으며 검도의 정체성을 숨기기보다는 차라리 확고히 하는 편이 좋다는 공감대가 형성되고, 해동의 자폭으로 자신감을 얻었다는 것도 있다. 특히 해동은 협회가 수없이 분열하여 세력이 축소, 더 이상은 검도 측에 대항할 여력이 없어졌다. 가끔씩 해동이 던지는 전통검도 드립은 이미 웃음거리가 된 지 오래다.

그러나 본국검법, 조선세법을 엉성하게 복원한다거나 준거폐지, 벨트 도복같은 독자적 규정변경, 명백한 역사왜곡인 검도 한국기원설[8] 등으로 검도인들 사이에서 불만이 많다. 왜색 논쟁을 너무 신경 쓴 나머지 이종림 이사가 내놓은 대책이지만, 내외적으로는 눈 가리고 아웅이며 오히려 검도의 전통을 훼손했다는 비판이 많다. 본국검법, 조선세법만 해도 검도의 검리에 맞춰 복원하느라 무예도보통지의 기록과 달라진 점이 많고, 검도인들은 검도의 시각에서 공공연하게 '검리와 맞지도 않는다.'고 비판하기도 한다.

90년대 검도에 삼대논쟁을 걸어 흥했던 해동은 21세기 들어 무술도장계 자체의 쇠퇴와 삼대논쟁 패배, 대대적인 협회분열, 나한일의 공금유용 건 등까지 겹쳐 관원 유치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한다. 더군다나 인터넷 대중화로 이런 속사정들이 까발려지며 향후 개선 여지도 불투명한 상태.
2024년 현재는 현대 창작 무술임을 인정하고, '검을 사용하는 무예'라고 홍보하고 있다. 태권도와 비슷하게, 사실상의 방과후 탁아소(...) 역할을 하며 학부모들에게 어필하는 실정.

4. 관련 문서



[1] 당연히 역사적 근거가 없다. 무술이란 것은 의외로 필요성이 낮아지면 맥이 쉽게 끊긴다. 조선시대 무기술도 상당수 실전되어 현대에 복원중인 상황이고, 심지어 메이지 유신 직전까지 번성했던 일본 고류 무술조차 메이지 유신 이후 대다수가 맥이 끊겨 일부만 전해내려오는 상황이다. 그런데 망한지 1500년이 다되어가는 고구려의 전통무술이 현재까지 내려올 가능성은 0에 수렴한다.[2] 다만 법정 싸움 이후에도 협회사이트에선 아직 고구려와 사무랑 드립을 당당히 치고 있다.[3] 간혹 몸싸움이 벌어질 수야 있을지도 모르지만, 칼싸움은 현대 한국 같은 환경에서는 말이 안 된다. 맨손무술은 호신술 타령이라도 하지만 검도는 그걸로도 적용하기 힘든 게 현대인이 칼을 항상 차고 다닐 수도 없다.[4] 격자 부위가 머리, 허리, 손목인데 (목은 찌르는 것이니 제외) 머리는 칼 맞으면 즉사이고 허리는 최소 치명상, 손목은 무장해체가 된다. 거기다 머리는 높이, 손목은 칼 바로 위쪽, 허리는 가장 깊숙한 곳에 있기에 타격이 힘들다.[5] 초보들에게는 은근 무리가 많이 간다. 특히 왼쪽 손목.[6] 흥미롭게도 이러한 '진검승부면 우리가 이긴다.'는 변명은 검도의 모태가 된 북진일도류가 타 유파를 시합에서 박살낼 때마다 들었던 변명과 똑같다. 북진일도류는 암살과 테러가 난무하는 혼돈의 막부말, 후대에 이름을 남긴 많은 명검사들을 배출함으로서 죽도 시합으로 단련된 실력은 실전에서도 유용하다는 것을 말 그대로 실전으로 증명하였다. 이전까지 죽도 검법은 실전에선 안 통한다느니 진검이면 우리가 이긴다느니 떠들던 타 유파 검사들은 데꿀멍했다나 어쨌다나..[7] 드라마나 영화에 나오는 검술은 실전성보다는 멋을 추구한 모습이 대부분이니, 그런 영상에 길든 대중들의 눈으로 보기에 더 멋졌던 것도 있다. 물론 이런 검술이 실전성으로는 한참 부족할 수밖에 없지만...[8] 해동검도의 역사왜곡 사기랑 똑같은 수준이다. 대한검도회 주장대로 고대 한국에서 기원했을지라도 일본에서 천 년이 넘게 가다듬어진 검도를 한국 전통무술이라고 할 순 없다. 차라리 한국무술임을 주장하고 싶으면 일본 전검련 가맹국에서 탈퇴하고 기술 체계를 갈아엎어서 완전 독자 노선을 걸으면 된다. 그런데 일본 검도의 가맹국으로 등록은 해놓고 한국무술 타령이니 이 얼마나 앞뒤 안 맞는 행보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한검도회는 영향력이 일본 전검련 다음 2위이고(애초에 검도 자체가 세계적으로 그리 넓게 퍼진 무술이 아니다), 세계적인 경기를 개최하면 일본계열와 한국계열 나라들로 양분화되는 현상까지 발생하니 기가 찰 노릇. 일본과 대한검도회 간 마찰이 있자 일본계열 국가들이 대부분 불참했던 국제경기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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