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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5-11 14:32:53

가니 요시나가


파일:1280px-Kani_Saizō.jpg
1. 개요2. 일생3. 대중문화 속 가니 사이조

1. 개요

可児吉長. 1554~1613.

일본 센고쿠 시대의 무장. 이름인 요시나가보다도, '사이조' (可児才蔵)라는 이름으로 유명하다. 일명 '조릿대 사이조'.

미노 출신으로, 아버지는 사이토 도산에게 굴복했던 미노 호족인 가니 곤조.

창술의 달인으로, 호조인류(보장원류) 창술의 시조인 호조인 인에이로부터 창술을 사사했다고 한다.

2. 일생

원래 사이토 요시타츠의 가신이었으나 사이토 가가 노부나가에게 멸망하면서 오다 가문으로 옮겨 아케치 미츠히데 등을 섬겼고, 혼노지의 변 이후에는 도요토미 히데츠구 밑에서 일했다. 도요토미 가와 도쿠가와 가가 싸웠던 코마키 나가쿠테 전투에서 도요토미가 대패하자 히데츠구와 대립하게 되면서 낭인이 된다.

그가 낭인이 된 데에는 몇 가지 설이 있는데, 대패 후 가장 먼저 사이조가 도망을 쳤다는 사실에서 기인한다. 첫번째는 도보로 패주하던 히데츠구가 말을 타고 도망가던 사이조를 발견하고 '말을 내놓으라'고 하자 '이 말은 제게 있어 비오는 날의 우산과 같은 존재이옵니다'라고 하고 그대로 도주했다는 설이다.

두번째는, '도쿠가와는 창이 먹히지 않는 강적이다. 우리 도요토미가 따위는 엿이나 먹어라'고 했다가 이를 들은 히데츠구의 분노를 사서 '잘렸다'는 설이며, 세번째는 자기도 모르게 무의식 중에 도망을 쳤다는 사실에 대한 자괴감으로 낭인이 되었다는 설이 있으며, 사후로도 오랫동안 그 무용을 칭송받는 무장치고는 의외의 사실이기도 하다.

그 후 삿사 나리마사를 거쳐 최종적으로 후쿠시마 마사노리의 가신이 되었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후쿠시마 마사노리에게 선봉을 약속했는데, 이이 나오마사가 이를 도쿠가와 가문의 불명예로 여겨 사위 마츠다이라 타다요시 등과 함께 군율을 어기고 먼저 선봉을 서려 했다.

이에 사이조는 후쿠시마 가문의 사무라이 대장 신분으로 이를 막아서서 실랑이를 벌였고, 그러던 도중에 서군의 선봉인 우키타 군이 동군의 기습으로 착각하고 사격을 시작하여 전투가 어영부영 개전되었다. 명령이 있을때까지 돌격하지 말라는 후쿠시마 마사노리의 엄명이 있었지만 사이조는 그대로 돌격하여 서군 무사 한명을 베었다. 마사노리는 군령을 어긴 사이조를 크게 질책하였고 근신처분을 내렸다.

전투 후 논공행상이 행해졌는데 사이조가 가져온 수급은 개전때 군령을 어겨가며 베었던 한개였다. 마사노리는 고작 수급 하나 때문에 군령을 어겼냐며 비난했지만 이에 사이조는 "실은 몰래 나가서 싸웠는데 근신 중인 몸이라 수급을 챙길 수가 없었습니다. 대신 제가 벤 수급들마다 조릿대를 끼워놨으니 확인해 보십시오"라고 답변했다. 확인해보니 조릿대가 끼워진 수급은 17개나 되었고 죄다 투구를 쓴 머리들이었다.[1] 총대장 이에야스에게까지 그 활약을 칭찬받았고 주군인 마사노리로부터 기존 지행에 500석을 추가로 받았다. 이것이 '조릿대 사이조'라는 별명이 생긴 계기가 된다.

그는 아타고곤겐(愛宕権現)을 열렬히 받들었고, 자신은 아타고곤겐의 길일에 죽을 것이라고 예언을 하였다고 한다. 그는 실제로 1613년의 아타고곤겐의 길일에 갑옷을 입고 앉은 채로 죽었다.

3. 대중문화 속 가니 사이조


[1] 아시가루는 삿갓을 쓰지만 무사계급은 투구를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