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21년 ~ 1607년(다이에이(大永)원년 ~ 게이초 10년)
1. 개요
일본 전국시대의 인물. 통칭 호조인 가쿠젠보 인에이. 코후쿠지(興福寺)[1]의 승려로 코후쿠지 경내에 있는 호조인의 원주가 되었으며, 호조인 인슌이 완성시킨 호조인 창술의 창시자로 유명하다.2. 생애
부처님을 모시는 승려이지만 무예를 좋아해 토다 요사에몽에게 넨류와 이사와 이에나오에게 카토리 신토류를 배웠다. 또한 야규 무네요시와 함께 카미이즈미 노부츠나에게 검법을 배웠으며, 창술의 명인인 다이젠다유 모리타다에게서 창술을 배웠다.무사 수업 도중에 머슴으로 위장하여 호조인에 들른 나기나타의 명인인 아나사와 모리히데에게서 나기나타, 봉술의 비법을 전수받았으며, 아나사와와 세키슈사이의 협력을 얻어 보장원류의 창술을 만들어 표(表) 9본, 진위(眞位) 6본으로 총 15본의 조목을 제정하면서 창날 아래에 양쪽으로 가지날이 달린 십문자창법(十文字槍法)을 창안하여 호조인류 창술 유파의 개조가 되었다.
다른 지방의 영주의 초청으로 시합장에 나가 12명을 상대로 승리했다고 하며, 이 일을 통해 이름이 떨치면서 그의 도장에 찾아오는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 또한 활의 명인인 무네히사라는 사람과 코후쿠지 남쪽 문에서 겨루어 이겼다고 한다.
만년에 부처를 모시는 몸으로 무술에 힘을 쏟는 것은 할 바가 아니라면서 자신의 뒤를 이어 호조인의 원주가 되는 사람에게는 무예를 금지시켰으며, 게이초 10년인 1607년에 사망한다.
그의 제자로는 가니 사이조, 나카무라 나오마사, 나카무라 시자에몽, 오조인 도에이 등 많은 제자가 있다.
3. 대중매체에서
우리나라 어법에서는 ㅈ, ㅉ, ㅊ 다음의 이중 모음은 올 수 없고, '호조인'의 '조'는 じょ가 아니라 ぞ이기 때문에 '호조인'만이 옳은 표기이지만, 대중 매체에서는 거의 대부분 '호죠인 인에이'이라는 표기를 사용한다.3.1. 가면라이더 고스트
창 안마의 모티브가 되었다.창 안마는 안마 어설트와 창이 결합되어 태어난 괴인으로, 강인한 창을 장비하여 완력을 이용한 날카로운 찌르기를 특기로 한다.
3.2. 태합입지전 5
창술 유파인 보장원(호조인)류의 대빵으로 나온다. 기본 무력 92에 창명인 칭호로 추가 무력10이 붙어서 102. 그외엔 딱히 보정도 없고 그냥 강할 뿐이지만 무기가 창이기 때문에 처음 상대할때는 감이 잘 안 잡힐 수가 있다. 비기 전수받을때는 반드시 창을 들어야하는데 태합입지전에서 창술 유파라고는 이양반 하나에, 후기시나리오에 가야 좌분리류가 추가되는 정도라 막상 배운 기술이 없는 처음에는 좀 짜증난다.3.3. 배가본드
창술로 유명한 보장원에 도전하러 온 무사시에게 길을 알려주는 것으로 첫 등장.[2] 이 때 무사시가 쫄아붙게 만들 정도의 살기를 내뿜었지만 정작 무사시를 따라다니던 조타로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다. 이후 무사시가 호조인 인슌과 싸울 때까지 거처를 제공하면서 무사시에게 '강자랍시고 허세부리지 마라'는 가르침을 주지만 워낙 선문답이라 무사시는 열만 받고 깨닫지 못한다(…). 그리고 무사시가 보장원에 도전하러 갔을 때 미처 따라가지 못한 조타로에게 인에이는 이미 은퇴했다고 하면서 자신이 인에이임을 밝힌다.이후 무사시가 인슌에게 패배하자, 무사시를 치료하면서 '인슌은 승리만을 거듭하여 패배를 모르며 공포를 모르기 때문에 미숙하다'면서 인슌의 약점을 알려준다. 그리고 무사시가 패배한 이유를 일깨워주는 한편, 몸소 무사시와 맞서면서 보장원의 창술이 어떤지 보여주는데 무사시가 계속 패배했다는 묘사가 나온다. 하지만 그 가르침을 받은 무사시는 결국 인슌과 싸워서 승리하고, 인슌이 드디어 깨우쳤음을 기뻐하면서도 인슌이 어떠한 마음으로 살아왔는지 알기에 슬퍼한다. 함께 승부를 지켜본 아곤에게 이 승부는 보장원의 기록에 남기지 말 것을 부탁하고는, 거의 동시에 기절한 인슌과 무사시를 데리고 하산한다. 다만 노인인데다 비를 맞아서 잠시 앓았다.
완치된 후 다시 방랑을 떠나는 무사시에게 직접 자신이 텃밭에서 기른 채소로 담가서 주위에 나눠주는 '보장원(호조인) 채소절임[3]'을 주면서 배웅하고, 인슌이 보장원에 전해져 내려오는 창을 반납하자 기쁘게 받아들인 후 돌아가던 인슌에게도 채소절임을 나눠주면서 보장원 편이 마무리된다.
무도(無刀)... 이 세상의 온갖 사상들 중에,
말로 다할 수 있는 것이 과연 얼마나 될까.
논리가 아니다. 느끼는 것이다.
말로 다할 수 있는 것이 과연 얼마나 될까.
논리가 아니다. 느끼는 것이다.
그 뒤엔 대부분 무사시의 상념이나 다른 인물들의 회상 속에서 등장한다. 과거에 야규 세키슈사이와 함께 카미이즈미 노부츠나에게 도전했으나 둘 다 한 번도 이기지 못하자 그에게 가르침을 받은 적이 있다고. 야규 세키슈사이 사망 1년 후 조용히 영면한다.[4]
3.4. 용과 같이 켄잔!
또 다른 미야모토 무사시를 추적하기 위해 키류-무사시가 호죠인 사원으로 들어가려다 문전박대 당한 후 만난 노인. 키류를 시험해보고는 인슌을 쓰러트려달라고 부탁하며 추천서를 써준다. 그 후 키류가 인슌을 쓰러트린 후, 마루메 나가요시와 접선시켜 또 다른 미야모토 무사시의 진상을 알려준다. 마루메와는 신카게류 동문이자 20년 지기였기 때문.[1] 일본 나라현 나라시에 있는 법상종의 대본산이다. 한국 한자어로는 "흥복사"인데, 우리나라에도 같은 이름으로, 고려 시대 평양에 있던 절과 백제 의자왕 시절에 고구려 승려 보덕이 창건한 전라북도 김제시의 절이 있다.[2] 원작격인 요시카와 에이지의 소설에서는 보장원 옆의 오장원의 주지스님인 닛칸이고, 인에이는 등장하지 않는다.[3] 다만 한국판 번역은 김치라고 써놨는데 원명은 쓰케모노(漬物: 무, 배추, 가지, 고사리 등 소금에 절인 반찬)이다. 채소절임은 굳이 김치 말고도 전세계에 많은 음식이라 이걸 김치라고 번역하는 건 좀... 하지만 현재의 붉은 김치는 임진왜란 후에나 생긴거고, 그전에는 사실 소금에 절인 음식이었다. 이해안가는 번역은 아니지만 장아찌가 더 자연스럽다. 번역자의 과도한 기합으로 보이지만 김치라는 단어가 19세기 이후에 등장한 것을 생각하면, 한국보다 일본에 먼저 김치가 존재했다는 엉뚱한 설을 주장한 결과가 되어버렸다.[4] 야규 세키슈사이의 사망 소식을들었을 때 식사도 거르고 의욕을 잃은 모습을 보이는데 아무래도 절친이 세상을 떠나니 생각보다 감정적으로 큰 상처를 입은 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