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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4-28 21:45:42

3.15 의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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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00700015_0001.jpg 파일:00700036_0001.jpg
민주당 마산시당 앞에 집결한 시민들 민주당 마산시당이 붙인 3.15 규탄성명서
파일:attachment/b0007832_12045043.jpg
3.15 의거 기념탑. 창원시 마산합포구 서성동 소재.

1. 개요2. 전개3. 각계의 대응
3.1. 이승만과 자유당3.2. 민주당 등 야권3.3. 후속 시위
4. 기념식5. 기타

1. 개요

1960년 3월 15일부터 4월 13일까지를 전후하여 마산에서 3.15 부정선거에 항거하여 발생한 민주화 운동.[1]

2. 전개

3.15 부정선거 당일 전국적으로 부정선거가 적발됐고 마산, 광주 등 여러 도시에서 투표권을 우롱당한 시민들과 학생들이 거리로 뛰쳐나와 시위를 벌였는데 경찰이 총기를 발포하여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경상남도 마산시(현 창원시 마산합포구 일대)에서 벌어진 시위가 가장 유명해서 3.15 의거 = 마산으로 알려져 있다.

3월 15일 마산의 경우 아침에 장군동 제1투표소에서 민주당 참관인과 자유당원 사이에 실랑이가 벌어졌는데 참관인이 투표함을 엎어 버리자 그 투표함에서 부정선거가 적발되었다. 투표함을 엎어 버린 참관인 안맹선과 그의 남편이자 민주당 경상남도의회 의원 정남규는 사전투표를 발견했으나 곧 경찰서에 끌려갔다. 당시 자유당에서 펼친 부정선거 공작들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3.15 부정선거 문서를 참조.

경찰서로 끌려간 정남규는 도의원 신분이라서 곧 풀려났는데 그는 곧장 오동동 마산시당부로 가서 민주당원들과 논의한 끝에 아침 10시 30분 독자적으로 선거 포기를 선언하고 참관인들을 철수시켰다. 이후 방송을 통해 부정선거 무효를 주장하고 오후 3시 30분부터 민주당원들이 모여 시위를 시작했다. 민주당원들은 가두시위를 벌이며 시위대를 모았고 오동동 마산시당부에 1,500여명의 시위대가 모였는데 이때 경찰들이 들이닥쳐 민주당원들을 연행하고 시위대들에게 해산할 것을 요구했으나 시민들에게 욕만 대차게 먹고 자리를 떠났다. 특히 경찰 간부가 곤봉으로 고등학생을 두들겨패는 바람에 그 자리에 모여있던 군중들은 더욱 격앙되었고 남은 시위대들이 독자적으로 시위에 돌입하자 경찰과 반공청년단들이 이들을 무자비하게 진압했다.[2] 시위대들은 저녁에 개표가 시작되는 시청으로 모이자고 서로 약속하고 해산하게 된다.

이 소식이 시내에 퍼지자 마산 시민들은 저녁 즈음 옛 마산시청[3] 앞에 모이기 시작했고 시위 인원은 만여 명을 넘을 정도로 불어났다. 일부는 당시 마산의 중심가였던 남성동파출소로 모였으며 일몰 후 시위대와 경찰과 대치 상태가 한동안 계속되던 중 시위진압을 위해 출동한 소방차가[4] 무학초등학교 앞 전신주를 들이받아서 전기 공급이 끊어졌다. 이로 인해 정전이 일어나 신마산 일대가 깜깜해졌다. 경찰은 때를 놓치지 않고 시위대를 향해 총격을 가했다. 같은 시각 남성동파출소에서도 발포로 한 명이 사망했고 시청 앞 발포 이후 시위대들은 자정이 다 될 때까지 관공서, 경찰서(및 파출소), 자유당사 등을 습격하며 저항했다. 제1차 마산의거로 총 9명이 사망하고 80여명이 부상을 입었다. 이에 마산 시민들은 물론 전 국민이 충격에 빠졌다.

※ 3.15 마산 의거 사망자 명단 [보기 / 접기]
||<-3> 3.15 마산 의거 사망자 및 상이후사망자[5] ||
김주열 오성원 전의규
김용실 김삼웅 김효덕
김영호 김영준 강융기

3. 각계의 대응

3.1. 이승만과 자유당

이 사건에 대해 국회조사단이 이승만이기붕에게 경찰의 강경 대응에 대해 따졌는데 이승만은 공산당 사주로 벌어진 시위라고 보고받은 것을 그대로 발표했다. 심지어 최인규 내무장관 주도로 도립병원 영안실에 안치된 마산고 1학년 C반 반장 김용실의 주머니 안에 '인민공화국' 운운하는 날조된 삐라까지 집어넣는 등 공산당의 배후조종으로 모는 공작을 펼쳤다.[6] 부통령으로 당선된 이기붕은 "은 쏘라고 줬지 갖고 놀라고 준 게 아니다" 라는 망언을 터뜨렸다. 가뜩이나 정부 수립 이래 최초의 "평화적 시위대를 향한 대민발포" 사례라서 그 파장은 컸다.

또 이승만 대통령은 AP통신이 마산 사건에 대해 묻자 다음과 같은 답변을 하였다.
본인과 그의 부통령 러닝 메이트인 이기붕 민의원 의장은 3.15 선거가 부정하다고 비난하는 민주당을 물리치고 석권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이때 정부가 질서유지를 위한 경우 이외에는 선거에 손을 대지 않았다. 이런 까닭으로 민주당의 선동을 받은 일부 시위자들이 일을 저지를 때 수습을 하지 못한 것이다. 만일 경찰이 야당측의 정치적 활동을 방지하는 데 동원되었던들 이런 불행한 난동이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지만 민주주의적 발전에는 방해가 있게 되었을 것이다. 민주당은 폭력수단으로써는 결코 정권을 잡지 못할 것이다. 민주당은 어느 시기에 가서 국민이 동당을 권위있는 자리로 이끌게 될 참을성 있고 건설적인 지도역량을 기르지 않으면 안된다. 폭력행위는 정부나 자유당이 원하는 바도 아니요 실지 행하고 있는 일도 아니다. 민주당은 수치스럽게도 그들의 패배를 은폐하기 위해 그런 수단을 강구하였던 것이며 따라서 그들이 국가의 체면을 손상시킨데 대해 한국 국민에게 보답하지 않으면 안된다.

자신은 직접 경찰에게 어느 정당이나 후보자를 위해서도 어떠한 종류의 영향을 주지 말라고 명령하였으며 경찰은 하시에도 간섭을 하지 않았다고 말하였다. 사실 수많은 한국 애국자들이 민주당의 전술과 공격의 일부에 대해 분개하고 보복을 원하였으나 그들은 경찰 당국에 의해 질서를 유지할 수 있었다.

15일의 발포 사건은 이미 중앙 언론과 외신의 주목을 받고 있었기에[7] 당국에서는 여야합동 국회조사단을 파견해 이강학 치안국장의 사임 및 최인규 내무부장관의 교체[8]로 사건을 수습하려 했다. 그러나 홍진기 법무장관을 내무장관으로 자리만 옮기는 '눈 가리고 아웅' 식의 인사조치였다. 게다가 홍진기 신임 내무장관은 공산당 사주설을 주장하면서 경찰의 실탄 발포를 지시하고 이후 강경 진압을 주도하였고 "경찰의 구속, 마산 시위대의 선처 등의 대략적인 조치를 한 뒤 모든 조치를 마쳤다"고 밝혔다. 이러한 눈 가리고 아웅식의 조치에 여론은 더더욱 악화되고 말았다.

그러나 마산 의거가 벌어진 뒤 여론은 계속 험악해졌다. 이에 몇몇 자유당 인사들이 분통을 터뜨리며 "어차피 우세한 선거였는데 너무 오버했다"며 지도부를 비난하였다. 또 이승만, 이기붕에 의해 모든 당론이 좌지우지되던 상황에 의해 국회의원들이 거수기로 전락했다며 지적하기도 하였다. 이들이 모여 혁신 위원회를 조직하며 집단반발할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하였는데 이에 이승만이 직접 호통을 치자[9] 이들은 기가 죽었다. 이들은 이기붕과 면담을 갖고 이기붕이 당을 위해 애쓴다며 치하한 뒤 선처할 것을 약속하자 이에 만족하여 해산했다. 이에 동아일보 기자가 "앞으로 어떻게 활동할 것입니까?" 라고 묻자 이들은 '이기붕 의장이 선처를 약속하셨으니 앞으로 더 이상 혁신에 대해 거론 않겠다'고 답하였고 이를 동아일보측에선 이승만의 호통 한 번에 잠잠해졌으니 논에 우는 개구리한테 돌 던지자 순신간에 잠잠해진 격이라며 비꼬았다.

그리고 자유당 측은 공산당의 사주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하기 위해 여러 희생양을 찾으려고 했고 때문에 민주당의 정남규 도의원에게 남로당에 가입한 공산당원으로 총지휘하였다는 혐의를 씌웠다. 정남규 도의원은 당시 유치장에 갇혀 있었는데 기자가 경찰의 혐의가 사실이냐고 물어보자 노발대발하며 "뭐요? 날더러 빨갱이라고? 그러면 어째서 나를 시의원으로 놔두고 도의원으로 당선되게 놔두었단 말이요?" 라며 반박했다.

또 22살 먹은 청년을 체포해 그가 경찰서를 방화하였다며 그가 6.25 때 공산당 측에 부역한 자라고 주장하였는데 6.25 때는 그의 나이가 12세였으므로 말이 되지 않았고 이에 대해 민주당 측과 언론의 거센 비판을 받았다. 그러자 경찰측에선 32세라고 나이를 조작해서 발표하는 해프닝을 벌였다.[10] 훗날 밝혀진 바에 따르면 그 청년은 그냥 길거리를 걸어가다가 체포되었으며 그의 신원조회를 하는 중 자동차 정비 면허증이 발견되었는데 이를 본 순경은 자동차=휘발유=방화라는 공식이 머리 속에 떠올라 그에게 방화 혐의를 뒤집어 씌운 것이었다.

3.2. 민주당 등 야권

이에 대해 민주당은 다음날 성명을 냈다.
이 대통령은 대통령으로서 실질적 자격이 결여된 것이다. 이 대통령이 AP 기자에게 폭력 행위는 정부나 자유당이 행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민주당이 수치스럽게 수단을 강구하였던 것이며 그들이 국가의 체면을 손상시키는 것에 대해 한국 국민에게 책임을 지지 않으면 안된다라고 말하였는데 적반하장도 분수가 있어야 할 것이다.

이런 말을 국민에게 부끄럽게도 어떻게 감히 할 수 있으며 또 하늘이 무섭지 아니한가? 이번 3.15 선거에 있어서 도덕과 법을 파괴하고 부정, 추잡, 폭력, 살인 등 모든 악랄한 방법을 사용하여 국민 주권을 철저히 강탈하고 민주주의를 도살하였으며 그러고도 부족하여 마산에서는 학생과 시민을 무차별 총격으로 대량학살하였음을 전 국민이 몸서리나게 체험하였고 민주 우방제국인 공인한 바이며 런던 타임즈의 사설에선 '폭력이 가장된 선거보다도 나쁘다'라는 요지로 비난하고 또 워싱턴포스트에서는 '이승만 대통령의 세력은 또 한번의 선거승리를 불도저로 밀고 들어가듯이 차지하였다'라고 비난하였다. 이 대통령은 이를 알고서도 모르는 척하는지 아니면 진실로 아무것도 모르고 말하는지? 어느 것이건 간에 대통령으로써 실질적 자격이 결여된 발언이라고 아니할 수 없는 것이다.

민주당은 3.15 선거 무효선언을 한 뒤 당내 방침을 두고 신파와 구파가 내분을 일으켜 계속 지리한 회의를 거듭하였다. 구파는 국회 총사퇴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신파는 원내에서 싸워야 한다고 주장하였다.[11] 이들은 이 논쟁으로 인해 3월이 다가도록 2주 동안에 걸쳐 대응 방침조차 결정하지 못하였고 마침내 신파가 이겨 원내에서 투쟁하기로 결정했을 땐 이미 자유당 측에서 마산 경찰들 체포와 내무장관 경질 등의 조치를 끝내 놓은 상태였다.

이때 민주당은 간신히 내부 의견을 통합하고 서울 시내에서 집회를 열겠다고 하자 임흥순 서울특별시장은 '부정선거는 서울시에서 일어나지 않았으므로, 서울 어디에서도 집회를 열 수 없다'고 통보했다.

3.3. 후속 시위

그러자 민주당 측은 이를 무시한 채 4월 6일 부정선거에 항의하는 시위를 벌였으며 이 시위가 엄청난 시민의 호응을 받아 인파가 상당한 규모로 불어났다. 이 시위의 결과로 자신감을 얻은 민주당 측은 지부를 통해 각 지역에 시위를 벌일 것을 계획했다.

하지만 서울시에서의 시위에 놀란 정부측은 등교 중지령을 선포하는 등 시위를 철통같이 감시하도록 하였고 많은 인원을 동원하여 시위대를 에워쌌다. 부산에서 4월 8일 민주당의 지부에서 시위를 벌였으나 이러한 자유당 측의 감시에 의해 시위대는 소극적으로 가두행진을 벌인 뒤 해산하게 된다.

그리고 4월 11일 김주열 열사의 시신이 발견되면서 전국적으로 시위의 불길이 다시 타올랐다. 이후 전개는 4.19 혁명 문서 참조.

4. 기념식

매년 3월 15일 국가보훈처 주관으로 경상남도 창원시에서 정부기념식이 치러진다.

5. 기타


[1] 3·15의거 참여자의 명예회복 등에 관한 법률 제2조[2] 현재도 창원에 존속하는 '3.15 기념사업회' 자료를 보면 불종거리에서 정치깡패 등이 동원되어 시위대를 구타했다는 증언도 있다.[3] 현재의 마산합포구 청사로 쓰이는 신축 구 마산시청 건물이 아니라 그 맞은편에 있는 마산세무서 자리가 당시의 시청이었다.[4] 요즘의 물대포 용도 외에도 염색약이 들어간 물을 뿌려서 시위에 가담한 학생이나 시민을 색출해냈다. 2000년대 이후에도 본 거 같으면 그건 눈의 착각 대부분 흰 광목으로 된 옷을 입고 다니던 시절이었고 학생들의 교복도 칼라 부분은 흰색이었다. 여담이지만 일제도 조선 사람들이 흰색 옷을 입고 다니는 것을 마땅치 않게 여겨 흰색 옷만 보면 닥치고 먹물을 뿌리기도 했다.[5] 상이후사망자는 당일에 사망하지 않고 상이를 당했으나 4.19 혁명 기간은 물론이고 1960년까지 생존하다가 사망한 사람들을 포함한다.4.19 혁명 항목의 타 지역/타 날짜 사망자 명단 또한 그렇다.[6] 당시 도립병원 간호사들은 김용실을 알고 있었다. 1년 전 길거리에서 술에 취한 채 피를 흘리는 할아버지를 들쳐업고 뛰어온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간호사들은 검찰 조사에서 "경찰이 병원장에게 김용실의 검안서에 주머니에서 삐라가 나왔다는 내용을 쓰라고 했으나 원장이 거부했다"고 진술했다.[7] 동아일보는 3.15 카르테라는 코너를 아예 따로 마련해서 매일 선거 관련 소식을 현지 르포로 보도했고 AP통신도 사안의 귀추에 주목하고 있었다.[8] 최인규는 훗날 5.16 군사정변으로 군정이 시작되자 군부에 의해 마산 시민에 대한 발포의 책임을 물어 사형당했다.[9] 이승만은 장관들과 만난 자리에서 "요새 자유당 내가 대단히 소란한 것 같이 들리는데 우리가 민주당의 내분을 옳지 않은 것으로 생각하고 흉을 보았던 것인데 자유당이 단결해서 일을 잘해오다가 소란과 내분의 인상을 국민에게 주는 것은 국내외를 막론하고 부끄러운 일이라. 합심하여 조속히 수습책을 강구하라"고 발언하였다.[10] 동아일보에선 이를 두고 "10살을 마음대로 올렸다 내렸다 하는 경찰이니 공산당원 하나 만드는 것쯤은 일도 아니겠군" 이라며 비웃었다.[11] 장면을 중심으로 한 신파는 합리주의를 표방하는 미국식 자유주의자들이라 장외투장 같은 방식을 선호하지 않았다고는 하나 이건 말이 안 되는 것이 오히려 미국식 자유주의는 폭압적인 독재자(tyrant)에 저항하기 위해서 시민들이 총 들고 일어나야 한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미 자유당이 작정하고 국민들을 두들겨패는 상황에서 원내투쟁 운운하는 신파는 참으로 사태 파악이 안 되던 것이라고밖에 할 말이 없을 듯.[12] 출처: 3.15의거기념사업회 간, "3.15 의거", 1996[13] 경남대학교-마산합포구청-부림시장-육호광장-마산역-합성동까지 주요 중심가는 다 지나간다.[14] 3.15기념사업회 자체가 국민의힘이 강세인 창원에 자리하다 보니 생각만큼 국민의힘에 대한 거부 반응이 크지는 않다. 대부분 같은 지역 연고로 지연, 학연 등 인적 관계가 있는 것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