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광역시의 관광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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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희경루(喜慶樓)는 광주광역시의 누각이다.2. 역사
2.1. 연혁
- 1451년, 공북루의 옛터에 남북 5칸, 동서 4칸의 중층 누각으로 지어졌다. 동쪽에 활터를 만들었다(신숙주의 희경루기(喜慶樓記)). 이후 광주의 랜드마크로 기능하였다.
- 1533년 불에 타 소실된 후 1534년 재건되었다(심언광의 희경루기).
- 1866년 목사 안응수(安膺壽)가 중수했다.
- 구한말~일제강점 초기에 소멸된 것으로 추정된다. 1912년 광주우체국이 건설될 때 사라졌거나, 우체국 옆에 남아있다가 나중에 사라졌을 수도 있다.
- 2023년 광주공원에 중건되었다.
2.2. 위치
조선시대에는 광주읍성안, 현 충장로우체국 인근에 있었다고 추정된다. 조선시대 여러 차례 발간된 읍지에 객관[1] 북쪽에 있다고 언급되어 있다.[천득염,김민주,2010] 1896년 지도군수 오횡묵의 여행기에도 객사 뒤에 활터와 관덕정이 있었다고 한다.[광주역사민속박물관,2020] 또한 우체국 근처에 향청(鄕廳)이 있었던 점, 이 일대를 과거에 사정리(射亭里, 활 쏘는 정자가 있는 곳)라고 불렀던 점도 근거가 된다.[조광철,2008]2.3. 이름
희경은 함희상경(咸喜相慶)을 줄인 말로, 모두 기뻐하고 서로 축하한다는 뜻이다. 유래는 다음과 같다.만호(萬戶) 노흥준에게는 소매라는 기첩(妓妾)이 있었다. 그런데 광주 목사 신보안이 소매와 정을 통하다가 노흥준에게 현장을 걸려서 구타당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1428년 봄에 일어난 일이며 1429년에 알려졌다. 일단 소매는 관기(官妓)였으므로 첩으로 삼는 것은 불법이었다. 신보안도 마찬가지이지만, 사건과 별개로 몇 개월 뒤 이질로 사망했다.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왕의 대리인'으로 온 관리를 구타했다는 사실이다. 1430년, 노흥준은 곤장을 맞고 변방으로 쫒겨났으며 광주목이 무진군으로 강등되어 장흥부 소속이 되었다.[세종실록(1)][세종실록(2)] 그러다가 1451년, 문종 원년에 다시 광주목으로 환원되었다.[문종실록] 이를 기념하기 위해 마침 짓고 있던 누각 이름을 희경루로 정하게 되었다.
조선 후기에는 관덕정이라는 이름을 더 많이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활을 쏘는 곳을 관용적으로 관덕정(觀德亭)이라고 불렀다).[천득염,김민주,2010]
3. 현재의 희경루
2023년 9월 20일, 희경루 중건식 | 1567년, 희경루방회도 |
복원이 아니라 '중건'이라고 표현했다. 원래 장소에 그대로 짓는 것은 불가능하기도 하고,[9] 정확한 원형을 모르기 때문이다. 다만 대한민국 보물 제1879호 희경루방회도에 그려진 모습과 문헌 자료, 비슷한 누각인 광한루·영남루·촉석루의 구조 등을 비교해 원형을 추정할 수 있으며[천득염,김민주,2010] 이를 바탕으로 건설되었다.
건물 앞면의 한자 현판은 조선왕조실록에서 집자했지만, 뒷면의 한글 현판을 강기정 광주광역시장이 써서 논란이 있었다.#
[1] 객사 광산관은 충장로1가 25-1 일대에 있었다. 광주읍성 문서 지도 참조.[천득염,김민주,2010] 천득염, 김민주. (2010). 광주목 희경루의 복원 연구. 건축역사연구, 19(6), pp. 23-38.[광주역사민속박물관,2020] 광주역사민속박물관. (2020). 1896년 광주 여행기, pp. 172-233.[조광철,2008] 조광철. (2008). 광주우체국 일대가 조선시대 `활터’였다. 광주드림.[세종실록(1)] 세종실록 46권, 세종 11년 11월 13일 을묘 3번째기사[세종실록(2)] 세종실록 47권, 세종 12년 3월 26일 병인 4번째기사[문종실록] 문종실록 8권, 문종 1년 6월 7일 갑술 2번째기사[천득염,김민주,2010] [9] 원래 장소인 구 광주우체국, 현 충장로우체국 건물 또한 광주광역시의 근현대사에서 중요한 장소였기 때문에 철거할수 없는 상황이다.[천득염,김민주,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