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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00386a><colbgcolor=#fecd21> 청 추존황후 孝獻端敬皇后 | 효헌단경황후 | |
생몰년도 | 1639년 ~ 1660년 9월 23일 |
시호 | 효헌장화지덕선인온혜단경황후(孝獻莊和至德宣仁溫惠端敬皇后) |
배우자 | 청세조 순치제 아이신기오로 푸린 |
신분변화 | 현(賢)비⇒황귀비 |
자녀 | 황4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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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순치제의 후궁. 속칭 동악비. 만주 정백기 사람으로 내대신 동악 석(棟鄂 碩)의 딸이다.2. 생애
18살에 입궁하여 순치제의 사랑을 독차지했고,[1] 순치 13년 8월에 '현비'(賢妃)라는 칭호를 받아 현비 동악씨(賢妃 棟鄂氏)라 불렸다.[2] 그 해 12월 황귀비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3] 동악씨가 황귀비로서 받은 예우는 민혜공화원비, 의정대귀비 등, 정실 취급받던 동서궁황비 이상이었다. 본래 황후를 책립할 때만 조서를 천하에 반포하지만 순치제는 황귀비 동악씨의 책립조서를 천하에 반포한다. 동악씨를 제외하면 황후가 아님에도 조서를 반포한 예는 건륭제가 즉위 13년이 된 해에 한귀비 나랍씨를 황귀비섭육궁사로 책립하며 동악비의 선례를 따른 경우밖에 없다. 그리고 순치제는 황귀비 책례를 명하며 황태후에게 존호를 올렸는데, 황후 자리가 예정된 황귀비섭육궁사를 제외하면 일반적으로 후궁을 봉할 때 하지 않는 일이다.당연히 효장태후는 황후를 무시한 순치제의 행동에 분노할 수밖에 없었다. 동악씨의 책립 조서에는 황태후가 자애로운 명을 내려 황귀비로 책한다고 나와있으나, 사실은 효장태후가 병석에 누운 틈을 타 순치제는 동악씨를 황귀비로 책립한 것이다.
1657년 아들(1657~1658)향년 0세을 낳았는데 바로 순치제의 4황자 영친왕(榮親王)이다. 순치제는 가장 사랑하는 여인과의 사이에서 아들이 탄생하자 크게 기뻐했고, 황태자에 봉하려고까지 했다. 그러나 이 아이는 약 3개월 만에 요절하고 말았고, 이에 엄청난 충격을 받은 현비 동악씨는 얼마 후 걸린 천연두를 이기지 못하고 21살의 나이인 1660년에 세상을 떠나게 된다.
현비 동악씨가 죽자 순치제는 슬픔을 이기지 못 해 5일 동안 정사를 돌보지 않았고, 심지어는 현비 동악씨의 뒤를 따르겠다고 말한 적이 있다고 한다. 순치제는 국법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강하게 반대한 대신들을 물리치고 현비 동악씨를 황후로 추존, 효헌장화지덕선인온혜단경황후(孝獻莊和至德宣仁溫惠端敬皇后)란 시호를 내렸다. 또 수천 자에 달하는 동비행장(董妃行狀)을 직접 지어 그녀를 기렸다.
2.1. 동악씨의 이전 신분에 대한 설
순치제의 이복동생 양소친왕(襄昭親王)[4]의 복진이었다는 야설이 있다. 이 야설이 꽤 설득력이 있다고 평해지지만, 정사에서 기록된 바는 없으므로 정설이 아니다. 이 야설대로라면 순치제는 동생 마누라를 빼앗아 결혼한 것(...). 양소친왕 복진설을 미는 사람들이 대는 근거는 그녀가 입궁한 나이가 수녀 선발 이후였다는 점,[5] 양소친왕이 죽은 후로 책봉이 미뤄졌다는 점이 있다. 그러나 아이신기오로 종보에 따르면 양소친왕의 복진은 효장태후의 친조카 보르지기트씨다.강남의 유명한 한족 기생 동소완이었다는 야설도 있다.
동악씨가 3품 이상의 만주팔기 무관의 처였다는 설도 있다. 이 설은 동악씨의 남편은 만주 군인이었다고 기술된 <아담 샬 전기>에 기인한다. <아담 샬 전기>에 따르면 이러하다. '순치제는 어느 만주 군인의 부인에게 열렬한 연애감정을 가졌는데, 그 군인이 부인을 질책하자 순치제가 그 군인의 따귀를 때렸고, 그 군인은 자살했다. 이후 순치제는 그 부인을 황궁에 데려와 귀비로 삼았다.' 동악씨의 전남편이 양소친왕이라는 설을 부정하는 학자들은 아담 샬이 말하는 군인이 양소친왕이었다면 황제의 동생이나 친왕이라고 기술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들은 3품 이상 고관의 부인은 황궁에 드나들어 후비를 접견할 수 있으니 고관의 부인이었던 동악씨가 후비를 접견하면서 순치제와 만났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며, 순치 11년 효장태후가 3품 이상 관료의 부인이 후비의 시중드는 관례를 폐지한다는 명을 내린 것도 순치제와 동악씨의 불륜을 막기위한 조치였다고 추정한다.
현재 연구자들은 <아담 샬 전기>에서 기록된 것처럼 순치제와 동악씨가 불륜관계였다는 것은 다소 회의적으로 보지만[6] 동악씨가 본래 젊은 과부였다고 보고 있다.
3. 가족
강희제를 도와 가르단 정벌에서 활약했던 대장군 피양구(費揚古)가 바로 그녀의 동생이다.순치제의 후궁이었던 정비(貞妃) 동고씨는 그녀의 사촌동생인데, 정비 동고씨는 순치제 사후 순장당했다.
4. 대중매체
그녀와 순치제의 애틋한 로맨스는 매우 유명하여, 수많은 중국 사극들의 소재로 활용되고 있다. 청나라 초기를 다룬 사극들, 그 중에서도 순치제나 효장문황후가 나오는 작품이라면 그녀 역시 거의 빠짐없이 등장한다고 봐도 좋을 정도.- 산하련 배우 장설영
야설을 일부 차용해, 동악비와 황제가 사랑하는 사이였으나 양소친왕이 그녀에게 눈독을 들이자 일단 양소친왕과 파혼시켜 놓으려고[7] 절에 수개월간 수행 보낸 후 양소친왕과의 혼사가 유야무야되자 후궁으로 들이는 것으로 나온다.
- 다정강산 배우 후몽요
드라마 다정강산에서는 한족 기생설을 채용했는데, 그에 따라 동소완이 실제 역사에서 친아버지였던 악석의 양녀가 됨으로써 만주족에 귀화한 것으로 나왔다.
[1] 아담 샬 역시 순치제가 그녀에 대해 열렬한 연애 감정을 품고 있었다고 증언했다.[2] 6월에 효장태후가 동서이궁황비를 책립하라고 명하며 정남왕 공유덕의 딸 공사정을 동궁황비로 책립하고자 하였으나 정치적인 이유와 공사정과 손연령이 이미 집안끼리 약혼했다는 사정 때문에 파기되었다. 이후 현비가 동궁황비가 된 것으로 보인다. 조선 사신의 연도기행에서도 '과부인 귀비가 동궁황후로 책봉될 것이다'라는 기록이 남아있다.[3] 순치제가 동악씨를 위해 명나라의 후궁제도를 참고해 황귀비라는 직책을 신설한 것이다.[4] 이름은 아이신기오로 봄보고르(Aisin-gioro Bombogor, 愛新覺羅 博穆博果爾). 청태종 홍타이지의 11번째 아들로, 어머니는 차하르 릭단 칸의 아내였다가 홍타이지와 재혼한 의정대귀비 보르지기트씨(懿靖大貴妃 博爾濟吉特氏)이다.[5] 황제나 황족의 부인이 되려면 수녀 선발을 거쳐야 하는데, 이 수녀 선발의 제한연령이 17세까지다. 수녀가 되어 양소친왕의 복진으로 뽑혔다가 황제의 부인이 된 거 아니냐는 점.[6] <아담 샬 전기>에 오류가 상당수 있고 동악씨가 과부라는 다른 기록에서도 불륜에 대한 이야기는 없다.[7] 황제는 양소친왕이 그녀를 좋아하는 줄 모르는 상태에서 양소친왕이 좋아하는 여자와 맺어주겠다고 약속을 해버렸다.[8] 1인2역으로 약혜, 완운(동악비)을 연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