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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3-09 23:05:15

활터


1. 개요

을 쏘는 곳이면 다 활터라고 할 수 있지만, 일반적으로는 양궁장과 달리 국궁을 쏘는 장소를 뜻한다. 대한궁도협회에서는 활터, 정부에서는 궁도장 명칭을 사용한다.

대부분은 이리저리 옮겨지거나 하는 등 해방 이후 최근에 세워진 곳들이지만 서울황학정이나 제주 관덕정처럼 조선 시대에 세워진 곳도 있으며[1] 활터들의 이름을 보면 유래가 오래되었거나 최근에 세워졌거나에 상관없이 '관덕(觀德)'이라는 이름이 붙은 곳이 전국적으로 분포되어 있는데[2] 예기에 "활쏘기를 통해 그 사람이 가진 덕을 살핀다(射以觀德)"[3]라고 한 데서 따온 것이다.

이미 국가 단위로 활터를 제공해 백성들에게 활쏘기를 훈련시키려 한 것은 백제 아신왕 때부터의 일이기는 하지만, 활터가 민간에까지 개방되어 일반 서민이 활쏘기를 '레저'로써 즐길 수 있는 여건이 갖춰지게 되는 이른바 '민간 활터'의 시초는 조선의 궁술에 따르면 선조(1552~1608) 때 경복궁 동쪽에 오운정(五雲亭)을 지어 일반인에게 활터로 개방한 것이 그 시초라고 한다. 오운정을 시작으로 서울 및 지방에 많은 활터들이 곳곳에 생겨났다고.[4] 활터의 이름이 ㅁㅁ정이라고 붙여지는 경우 ㅁㅁ정은 활 쏘는 자리인 사대(射臺)에 세운 정자인 사정(射亭)을 가리키며, 활 쏘는 자리인 사대와 활 쏘는 목표물인 과녁 그리고 사대 자리에 지은 정자인 사정이 활터를 구성한다. 다만 조선 시대에는 따로 사대에 사정을 세우지 않고 활 쏠 적당한 거리[5]가 갖춰져 있는 곳에 대강 사대와 과녁을 두고 활터로 운용했을 것이라고.

활터가 세워지면서 ‘터과녁’이라고 불리는 고정된 과녁도 등장하게 되었다. ‘터과녁’이 등장하기 이전에는 솔포(帿布) 또는 사포(射布)라는 베로 만든 과녁을 사용하였는데 터과녁은 나무로 과녁 전면을 만들고 그 위에 사각형 또는 원형(圓形)의 흑심(黑心) 또는 홍심(紅心)을 그려 넣는 형태였다. 솔포나 사포는 주례를 기준으로 신분에 따라 크기와 무늬가 달랐는데, 터과녁의 경우 모든 활터의 과녁이 통일된 규격이나 형태가 갖추어져 있었는지는 알 수가 없고, 그 형태는 숙종 28년(1702년) 제주목사 이형상(李衡祥)의 명으로 제작된 탐라순력도(耽羅巡歷圖)에서 확인할 수 있다.

활터는 활쏘기가 한민족 사회에서 전통문화로 정착되는데 크게 일조했다. 활터는 활쏘기를 배우고 즐기고자 하는 사람들이 모이는 조직이자 시민 수련의 도장이라는 공동체적 특성을 가지고 있었고, 이러한 특성은 이른바 사풍(射風)이라는 활터만이 가질 수 있는 독특한 활터 문화를 형성하게 되었다. 활터 안에 모인 사람들을 통제하고 활터의 업무를 관장하기 위해 활터를 대표하여 활터의 전반적인 업무를 관장하는 ‘사두(射頭)’와 말 그대로 활쏘기 교육을 담당하는 ‘선생(先生)’, 그리고 각 한량들을 감독하는 ‘행수(行首)’라는 조직과 직위가 생성되었으며, 직제는 간단했지만 그 규율의 빡빡함은 흡사 군규(軍規)와 조금도 다름이 없었다고. [6] 그리고 활터 단위로 각 활터 대항 활쏘기 시합을 벌이기도 했는데, 활터뿐 아니라 마을 단위, 한양도성 및 성밖 대항전으로써 벌어졌다. 이를 '편을 갈라서 활쏘기를 겨룬다'는 뜻으로 '편사(便射)'라고 했으며[7], 활터 대항 활쏘기 시합은 따로 사정편사(射亭便射)라고 한다.
“궁술은 ‘편사(便射:Hpyen-sa-ha-ki)'라는 이름으로 현재 한국에서 놀이로서 행해지고 있다. 그것은 보통 한 도시의 서로 다른 마을 또는 서로 다른 지역 간의 시합이다. 놀이 참가자들은 매일 연습을 하고 가장 좋은 기술을 선택해 연마한다. 각 편에 열두 명의 선수들이 참가하며, 보통 서너 편으로 나뉜다. 네 팀이 싸우게 되면 각각 다른 깃을 가진다. 같은 편의 남자들은 비슷한 옷을 입고 비슷한 띠를 팔에 두른다. 네 팀에 있는 각 선수들의 이름을 넉 장의 종이에 쏘고, 이 종이에는 점수도 적는다. 과녁은 가운데 검은 사각형이 있는 네모난 판이다. 각 선수들은 한 번에 다섯 개씩 세 번, 모두 열다섯 개의 화살을 쏜다. 과녁의 중앙에 맞으면 2점, 중앙을 벗어나면 1점을 얻는다. 쏜 화살이 중앙에 맞으면, 그 선수가 속해 있는 편의 선수들은 깃발을 흔든다. 때때로 네 팀에 각각 기생을 한 명씩 두어서, 화살이 과녁에 맞으면 그 팀의 기생이 노래를 부르거나 성공시킨 사람의 이름을 외친다. 동시에 음악이 연주된다. 밤에 놀이가 끝나면 음악은 승리자의 마을을 옮겨 가고 다른 시합 참가자들은 그 승리자를 따라 간다. 진 사람들은 연회 비용을 부담하며, 이긴 편은 다음 시합에서 우선권을 차지한다. 각 편에서 가장 솜씨 있는 사람이 마지막에 화살을 쏘는 것이 관례이다. 팀의 리더를 ‘편장(便長)’, 또는 ‘수대(首帶)’, 즉 문자 그대로 ‘우두머리 띠’라고 부른다. 순서대로 두 번째 사람을 ‘부편장(不便長)’ 또는 ‘부대(副帶)’, 즉 ‘삼대(三帶)’, 즉 문자 그대로 ‘세 번째 띠’라고 부르며, 마지막 사람을 종대(終帶)라고 부른다.”
스튜어트 컬린(1858-1929)[8] <한국의 놀이>[9]

현재 대한민국의 활터 관리는 각 지자체에서 맡고 있고 2016년부터는 생활체육과 합쳐지며 지자체 체육회가 일반 체육 종목과 같은 기준으로 활터를 관리하고 있는데, 이 과정에서 활터 고유의 전통이 퇴색되고 문화재보다 스포츠로써의 측면이 더 강해지는데 이마저도 수요가 차츰 줄어들고 있다고 아쉬워하는 목소리도 있다. #

한편 북한 지역의 활터에 대해서는 알려진 정보가 많지 않은데, 일단 개성의 경우 관덕정 외에도 호정, 군자정, 명월정(明月亭), 반구정, 보선정, 채빈정, 구군정(九君亭) 등의 활터가 있었으며, 이 가운데 호정과 반구정 그리고 관해정을 개성의 3대 활터로 꼽았다고 한다. 구군정의 경우는 6.25때 폭격으로 파괴되고 주변의 정원이나 숲도 다 없어진 것을 1954년에 원래대로 복구했다고 한다. 소설가 박태원이 황해도 배천온천을 방문했을 때 배천온천 인근에 문무정(文武亭)이라는 활터가 있었다고 적고 있으며, 이성계의 고향으로 알려진 영흥에는 용흥각(龍興閣)이라는 곳이 있어 평해의 월송정과 함께 조선에서 경치가 가장 아름다운 활터로 꼽혔다고 전해진다.

2. 목록

대한궁도협회 활터현황

2.1. 서울특별시

2.2. 세종특별자치시

2.3. 부산광역시

2.4. 대구광역시

2.5. 인천광역시

2.6. 광주광역시

2.7. 대전광역시

2.8. 울산광역시

2.9. 경기도

2.10. 강원도

2.11. 충청북도

2.12. 충청남도

2.13. 전라북도

2.14. 전라남도

2.15. 경상북도

2.16. 경상남도

2.17. 제주도



[1] 다만 제주 관덕정은 현재 활터로써 기능하고 있지는 않으며, 황학정보다 오래된 활터들도 그 위치가 세워졌을 때 그 자리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또한 광복 이후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아예 사라져 버린 활터도 적지 않다.[2] 난중일기에도 계사년(1593년) 3월 15일에 관덕정에서 활을 쏘았다는 기록이 나오며, 현재까지 활터로 기능하고 있는 곳만 보더라도 광주, 대구, 남원, 사천, 보성, 함평, 강진, 함양, 이리 그리고 북한의 개성에도 해방 직후까지 '관덕정'이라는 이름의 활터가 있었다. 창경궁 안에도 관덕정이라는 이름이 붙은 전각이 존재한다.[3] 활을 잘 쏘기 위해서는 우선 자세를 잘 잡아야 하는데 자세가 잘 나올 정도로 평소에 신체가 잘 단련되어 있는 사람이라면 그 성격도 어느 정도는 바르게 교정되어 있을 것이라는 발상.[4] 한양도성 안에만 무려 48개나 되는 민간 활터가 있었다고 한다. 2016년 기준으로 전국의 공인 활터는 401곳.[5] 현행 한국의 활터에서 사거리는 145m이다.[6] 조선일보, 1934. 06. 13.[7] 활쏘기 권장을 위한 팀 대항전으로써 대사례나 향사례(鄕射禮), 사회(射會)도 있기는 한데 대사례나 향사례는 유교적인 예법을 함양하기 위해서, 그리고 주로 상류층(왕이나 양반 및 사족)들이 주도했다는 점에서 민간이 주도하고 레저, 오락으로써의 성격이 더 강했던 편사와는 달랐다. 대사례나 향사례, 사회라고 해서 오락적인 성격이 전혀 없었던 것은 물론 아니고.[8] 미국 브루클린 박물관 민족학 분야의 큐레이터로서 세계의 각종 놀이에 대한 전문가로 알려졌다.[9] 2003년에 한국에 번역되었다.[10] 2022년 9월 23일 하동군청에 의해 이용 중지 조치됐다. 궁도장 인근에서 음주 등을 즐긴 흔적이 발견됐고, 오발된 화살이 농지로 날아들어 주민을 위협하는 등 물의를 일으켰기 때문. 궁도장 건물 자체가 무허가 건물이라 폐쇄까지 검토 중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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