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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3-02 18:58:48

안휘군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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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양군벌|
파일:중화민국 북양정부 국기.svg

북양군벌]]
안휘군벌 직계군벌 봉천군벌
安徽軍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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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환계군벌.jpg
환계의 거두인 돤치루이, 돤즈구이, 쉬수정

1. 개요2. 역사3. 참고문헌4. 관련문서
4.1. 관련 인물4.2. 사건

1. 개요

돤치루이를 중심으로 하는 북양군벌의 파벌. 안휘계, 안휘파, 혹은 안후이성의 약자인 환(皖)을 붙여서 환계, 환계군벌(皖系軍閥)이라고도 불렸으며 위안스카이 사후 중화민국의 정국을 장악하였으나 1920년 안직전쟁으로 몰락했고 1924년 2차 직봉전쟁으로 재기하나 싶다가 직봉풍전쟁으로 완전히 쇠퇴하였다. 북양군벌의 계파 중에서 가장 먼저 권력을 잡고 가장 먼저 몰락한 파벌이라 할 수 있다.

2. 역사

1916년 위안스카이가 제제 취소 후 부총통인 리위안훙(黎元洪, 여원홍)에게 자리를 물려준 후 사망했다. 이후 돤치루이(段棋瑞)는 쉬수정(徐樹錚)[1] 등을 규합하여 안휘군벌이라는 파벌을 조직했고 자기자신은 국무총리 겸 육군총장이 되어 대리총통 리위안훙과 부원지쟁이라 불리는 권력다툼을 벌였다. 돤치루이가 고위직에 있고 쉬수정도 국무원 비서장에 있는 등 안휘군벌의 위세 자체는 등등했으나 이 당시 군벌들이 다 그렇듯이 구성원들이 이해관계에 따라 갈라질 가능성이 높아 조직력이 떨어졌고, 대부분이 군 실무직이 아닌 고위층에 위치한 탓에 실제적인 군권이 약했다.

1917년 돤치루이는 연합국들이 제1차 세계 대전 참전을 요구하자 이를 구실로 군사력을 강화하고 중화민국의 대권을 차지하려 했다. 하지만 국회는 돤치루이의 대독선전안을 거부했고 돤치루이가 리위안훙에게 국회 해산을 요구하자 리위안훙은 도리어 돤치루이를 국무총리에서 면직시켰다. 분노한 돤치루이는 안휘군벌을 규합하여 반란을 준비하였고 겁에 질린 리위안훙은 안휘독군인 장쉰(張勳, 장훈)에게 정치적인 조정을 요청하였다. 그런데 장쉰은 중재는 커녕 국회와 약법을 폐기하고 장훈복벽이라는 왕정복고 쿠데타를 일으켜 선통제를 복위시켰다.

리위안훙은 돤치루이를 다시 국무총리에 임명한 다음, 총통자리를 부총통이자 직예군벌의 수장인 펑궈장에게 물려주고 달아났고 돤치루이는 직예군벌과 연합, 장쉰을 토벌했는데 정치적 야욕을 위해 국회와 약법을 부활시키지 않고 신국회를 조직하여 매국적인 니시하라 차관을 들이는 등 독재를 하였다. 이에 반발한 쑨원(孫文, 손문)이 광저우로 이동, 서남의 전계군벌 탕지야오, 계계군벌 루룽팅과 합작하여 호법정부를 조직, 1차 호법운동을 전개했다. 돤치루이는 단호히 토벌을 주장하였고 1917년 가을, 호법전쟁이 일어났다. 쉬수정은 장쭤린의 봉천군벌과의 동맹을 주선하고 독군단회의를 통해 강경한 무력통일 노선을 주장했지만 차오쿤, 우페이푸 등이 반감을 품어 전선에서 이탈하고 장쭤린과 쉬수정의 사이도 악화되어 직계와 환계의 동맹도 결렬되었다. 1918년 직계와 환계의 대립 속에서 북양군벌의 원로인 쉬스창이 대총통에 당선되었다.

1918년 호법전쟁은 흐지부지하게 끝났지만 돤치루이는 여전히 참전군이라 불리는 강대한 사병 집단을 거느리면서 잘 나갔다. 문제는 이 참전군이 세계대전이 끝난 후에 조직되었다는 것이다. 국내외적인 비난이 빗발치자 돤치루이는 외몽골 출병 등을 구실로 참전군을 변방군으로 개칭하여 안휘군벌의 독재를 정당화했고 분노한 직예군벌봉천군벌이 연합하고 호남에 주둔한 우페이푸가 북상하면서 정치적 위기가 고조되었다. 대총통 쉬스창은 장쭤린에게 중재를 요청했다. 장쭤린은 직예군벌의 공적인 쉬수정을 면직하고 변방군을 육군부에 귀속시킬 것을 요구했지만 돤치루이는 완고했다. 결국 협상이 결렬되자 쉬수정이 장쭤린 암살을 시도했고 이것이 실패로 돌아가면서 1920년 7월 안직전쟁이 일어났다. 그간 안휘군벌을 지지하던 일본 제국은 안휘군벌에서 봉천군벌로 파트너를 교체했고 실전 경험이 없던 변방군은 봉천군벌과의 싸움에서 허망하게 와해되었다.

직예군벌과의 싸움에서도 우페이푸가 취퉁펑을 비롯한 안휘군벌의 고급 장령들을 대거 사로잡으면서 안휘군벌은 몰락했다. 돤치루이는 하야했고 쉬수정 등에게는 체포령이 하달되었다. 1922년 1차 직봉전쟁이 일어나자 돤치루이는 장쭤린과 합작하여 재기를 노렸으나 실패했고 1924년 쉬수정이 상하이에서 강절전쟁을 이용해 다시 재기를 시도했으나 또 실패했다. 1924년 2차 직봉전쟁이 일어나자 돤치루이는 장쭤린, 펑위샹과 연합하여 북경정변을 통해 직계가 옹립한 대총통 차오쿤을 실각시키고 임시 집정 정부를 출범, 임시 집정에 취임하면서 다시 권세를 잡았으나 실권은 장쭤린과 펑위샹에게 있었다.

돤치루이의 임시 집정 취임 이후, 쑨원이 북상 선언을 발표, 베이징을 방문해 관세자주권 회복 등을 주장했으나 돤치루이는 이에 소극적으로 나와 비판을 받았고 쑨원 사후 린썬, 쩌우루, 셰츠, 쥐정 등이 서산회의를 개최하여 돤치루이의 독재를 비판했다. 1925년 직계의 쑨촨팡이 손봉전쟁을 일으켰고 봉천군벌 궈쑹링도 펑위샹과 연계하여 반봉사건을 이르켰다. 1926년 대고 사건, 3.18 시위 등이 일어나 돤치루이는 궁지에 몰려 펑위샹의 압박 속에서 하야해야 했다. 쉬수정도 펑위샹의 음모로 암살되면서 안휘군벌은 완전히 실권,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3. 참고문헌

4. 관련문서

4.1. 관련 인물

4.2. 사건



[1] 쉬수정의 아들이 헌법 교과서의 '헌법의 변천' 편에 나오는 쉬다우린(Hsü Dau-Lin, 徐道隣, 서도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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