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순군의 역사간략표
1. 고대
원삼국시대에는 화순군에 삼한 중 마한 54개국의 하나인 여래비리국(如來卑離國)이 있었는데, 현 능주면, 화순읍 일대를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도암면의 용강리 유적에서는 집자리와 토광묘, 옹관묘 등이 출토되어 당시 화순 일대에 있었던 고고학적 세력을 확인할 수 있다. #삼국시대에는 백제에 정복된 뒤 3개의 행정구역이 설치되었는데, 현 능주면 일대의 넓은 평야를 끼고 있는 이릉부리군(爾陵夫里郡)[1], 현 화순읍 일대의 냇가변에 자리잡은 잉리아현(仍利阿縣)[2], 현 동복면 일대의 항아리 같은 바위가 있는 두부지현(豆夫只縣)이 그것이다. 잉리아현은 이릉부리군에 속했으나 두부지현은 전라남도 곡성군 일대에 있었던 욕내군(欲乃郡)에 별도로 속하고 있었다. 능주면의 천덕리 고분은 6세기 전후로 백제 이릉부리군에 강력한 세력이 형성되어 있었음을 보여준다. #
남북국시대인 757년에는 통일신라 경덕왕이 전국의 지명을 한화하는 작업을 하면서 이릉부리군(爾陵夫里郡)은 능성군(陵城郡)으로, 잉리아현은 여미현(汝湄縣)으로, 두부지현은 동복현(同福縣)으로 변경된다.
2. 고려시대
940년에 이르러 능성현은 한자를 바꾸어 능성현(綾城縣)으로 하고, 여미현은 오늘날의 지명인 화순현(和順縣)으로 개칭했으며 1018년에는 동복현(同福縣)을 곡성에서 보성군 소속으로 변경했다. 1143년에 처음으로 중앙에서 능성현에 감무(監務:현재의 군수)라는 행정관이 파견됐으며 이어 충열왕 때인 1280년경 동복오씨 조영(祖英) 혹은 조염(祖琰)국사의 고향이라 하여 동복에도 처음으로 감무가 파견되고 고려말 1390년에 화순에도 감무가 파견되면서 남평현을 겸임했으니 이때에 이르러 중앙행정이 직접적으로 이곳까지 미치게 됐다.감무관이 파견되기 이전에 이곳은 모두 자치고을로서 토호들에 의한 간접지배를 받았던 것으로 보이는데 동복현이 있었던 자치고을로는 보령현(保寧縣:현 이서면지역), 대곡현(大谷縣:현 사평면지역), 수촌현(水村縣:현 백아면 수리부근), 압곡현(鴨谷縣:현 백아면 옥리부근) 등으로 나뉘어 있었다. 오늘날 이 군의 이름인 화순이 고려시대에 생기게 된다.3. 조선시대
화순, 능성, 동복 이 세 현이 불과 몇 년만에 폐치분합을 거듭하게 된다. 처음 1396년에는 화순현을 없애고 능성현과 동복감무(화순현 겸임)만을 두었다가 1405년에 능성현, 화순감무(동복겸임), 1407년에 능성현, 복순현(福順縣.동복과 화순 합함), 1413년에 능성현, 화순현(동복겸임), 1416년에는 순성현(順城縣.화순과 능성 합함), 동복현으로 하였다가 다시 1418년에 이르러 세 지역의 통합이 불가하여 능성현, 화순현, 동복현으로 두었다. 1597년 정유재란의 피해가 너무 심하여 화순현의 백성들은 스스로 폐현을 자청 능성현에 합하였고 1611년에 이르러서야 화순현이 복현되기도 하였다.[3]1895년 5월 1일 행정구역개편, 이른바 23부제에 의해 능주군, 화순군, 동복군이 되었고, 1908년에[5] 화순군이 능주군에 합병되어 능주군, 동복군의 2개 군으로 줄어들었다.
4. 일제강점기
1914년 부군면 통폐합 때 능주군과 동복군을 통합하고 군청을 화순에 둠으로서 화순군이란 명칭이 부활하였다.1932년에는 행정구역에 개편에 의해 서면을 폐지하고 화순면에 통합, 13개 면으로 조정하여 오늘날의 읍면체제를 갖추었다. 화순면사무소를 훈리 34번지에서 교리 100번지(현 100-5,6번지)로 신축 이전하였다.
5. 대한민국
1963년 1월 1일 군청이 있는 화순면을 읍으로 승격시켰다. 1966년 5월 18일 영외, 묵곡, 용강출장소를 각각 설치하였다.[6] 이후 자잘한 구역 통폐합을 거쳐 현재 1읍 12면 1출장소 342행정리로 운영하고 있다.그러다 2019년부터 북면, 남면, 이서면, 동면에 대한 면 명칭 변경이 진행되었고, 이후 주민들의 의견을 받아 이중 북면과 남면의 명칭이 변경되는 걸로 결정되었으며 동면과 이서면은 개칭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2020년 1월 1일부터 남면이 사평면으로, 북면이 백아면으로 개칭됐다. 그런데 명칭 변경을 하는 이유 중에 '일제 잔재 청산'이 있었으나, 명칭 변경 전까지 쓰였던 면명 자체는 일제가 작명한 게 맞지만 사실 일제가 면을 새로 짜기 전 조선시대에도 해당 지역의 면명에 다 동서남북이 들어갔다(...).
6. 기타
조광조의 유배지이자, 김삿갓으로 널리 알려진 김병연이 최후를 맞은 곳이다(이 때 몇 년을 살았는지가 영월군과의 논쟁거리. 화순군 측은 6년을 살았다고 주장한다). 임진왜란 때는 문홍헌과 최경회가 "전라우의군"을 일으켰다.인구는 1966년 15만 998명으로 정점을 맞고 감소세이며, 2003년 초에 잠시 79,496명으로 증가 후 다시 감소세로 돌아섰다.
[1] 다른 명칭으로 죽수부리군(竹樹夫里郡)과 인부리군(仁夫里郡)이 있었다.[2] 진내군(進乃郡)이라는 지명이 진잉을군(進仍乙郡)으로도 불렸으며 신라 상대의 인물 내숙(乃宿)이 잉숙(仍宿)으로도 기록되었다는 점을 참고하면, 삼국시대 당시 잉(仍)은 내(乃)와 마찬가지로 '나'에 가깝게 읽혔을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잉리아현의 당시 발음은 '나리아'가 된다.[3] 이 복현을 기념하여 당시 객관앞에 심은 것이 바로 화순군청에 서 있는 은행나무이다.[4] 왕을 상징하는 나무패로, 대궐 전(殿)을 큼지막하게 새겨 전패라 불렀다. 관리들은 망궐례(望闕禮)라 하여 이 패에 절하는 의식을 매월 초하루와 보름, 설 추석이나 동지 같은 명절, 임금이나 중전의 생일 등 특별한 날에 행하였다. 국왕의 상징물이었으므로 그 보관 및 관리가 매우 엄격했는데, 이를 훔치거나 훼손하는 자는 대역죄에 해당되어 본인은 물론 일가족까지 처형되었고, 그 고을은 10년간 혁파되어 이웃 고을에 병합되며 수령은 파면되었다...[5] 이때 창평군과 옥과군도 통합되며(1914년에 다시 갈라선다), 낙안군은 2개로 잘려서 보성과 순천에 각각 편입되고 만다.[6] 현재는 한천영외출장소를 제외한 나머지 출장소들은 폐지되었다.[7] 참고로 화순읍 인구가 이웃한 나주시의 시내(구 나주읍+영산포읍, 기존 시내와는 떨어져 개발된 광주전남혁신도시 지역인 빛가람동은 제외) 인구보다 더 많으나, 도심을 제외한 나머지 지역(나주의 읍면 지역+빛가람동, 화순의 면 지역)의 인구를 비교했을 때 나주시가 더 많기 때문에 시군 전체로 비교하면 나주의 인구가 더 많다. 화순읍이 광주의 위성도시화 된 것이 화순군으로서는 천만다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