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colbgcolor=#0047a0> 자 | 순일(順日) |
본관 | 남양 홍씨 토홍계[1] |
출생 | 1847년 6월 2일 |
경기도 남양도호부 서여제면 전곡동 (현 경기도 화성시 서신면 전곡리[2] 400번지) | |
사망 | 1919년 4월 16일[3] (향년 71세) |
경기도 수원군 서신면 전곡리 | |
묘소 |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4묘역-289호 |
상훈 |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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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2005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1847년 6월 2일 경기도 남양도호부 서여제면 전곡동(현 화성시 서신면 전곡리 400번지)에서 아버지 홍추(洪樞, 1824 ~ 1886. 7. 3)와 어머니 청주 한씨(1825 ~ 1883. 11. 12)[4] 사이의 2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1919년 3월 26일 오후 5시경 수원군 송산면(현 화성시 송산면) 사강리에서 홍면(洪冕, 일명 洪冕玉) 등 시위군중이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그는 이날의 만세시위에 참가하였고, 이틀 뒤인 28일 사강리 장날 재차 만세시위가 벌어지자, 그는 다시 다수의 동지들과 함께 만세시위에 참가하였다.
이때 수원경찰서 순사부장 노구치 고조(野口廣三)가 출동하여 시위군중에게 해산을 명령하였다. 그러나 시위군중이 해산하지 않자 순사부장은 주도자인 홍면 외 2명을 체포하여 앉혀두었다. 오후 3시경, 앉아있던 홍면이 갑자기 일어나 만세를 부르자, 순사부장은 홍면을 향하여 권총을 발사하였다. 탄환은 홍면의 등에 명중하였는데, 이에 격분한 홍면은 그에게 돌진하며 군중을 향하여 죽이라고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홍면의 동생인 홍준옥과 문상익·왕광연 등이 격노하여 순사부장에게 달려들었고, 겁에 질린 순사부장은 자전거를 타고 음덕면(現 남양읍) 방면으로 도망하였다.
당시 송산면사무소 뒷산에서 만세시위를 벌이던 군중들은 순사부장을 추격하여 동리 동쪽 끝에 있는 사강주재소 부근 도로에서 그를 포위하였다. 이때 분노한 군중들은 순사부장에게 돌을 던져 땅바닥에 넘어뜨린 뒤 곤봉으로 그를 가격하여 순사부장은 현장에서 뇌진탕과 골절로 즉사하였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일제는 만세시위 참가자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에 나섰다. 일본 헌병과 경찰은 민가를 닥치는 대로 불지르고 주민들을 연행하였다. 홍대우의 집은 수원군 서신면 전곡리 400번지에 있었는데, 일본 경찰은 4월 16일 그의 집에 들이닥쳐 집을 불지르고 자택 인근에서 사격을 가하여 그는 사살되어 현장에서 순국하였다.
2005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8월 15일 광복절에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그의 유해는 당초 화성시 송산면 칠곡리에 안장되었다가 2010년 10월 3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4묘역에 이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