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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13 13:51:07

혼인보 슈사쿠

1. 개요2. 생애3. 슈사쿠류(秀策流)4. 기타

1. 개요

本因坊 秀策

에도 시대에 활동했던 일본바둑 기사. 어릴 적 이름은 쿠와바라 토라지로(桑原虎次郎)이며, 빈고국(備後国) 인노시마(因島)[1] 출신이다.

2. 생애

어릴 때부터 바둑에 뛰어난 재능을 보인 토라지로는 1837년 8살의 어린 나이로 혼인보 가문에 입문했다. 당시 혼인보 가문의 당주였던 12세 혼인보 조와(本因坊 丈和)는 토라지로의 바둑을 보고 "이 아이야말로, 150년 만에 나온 천재다.[2] 우리 가문은 이 아이 덕분에 지금보다 더 높이 올라가게 될 것이다."라고 극찬했다고 한다. 입문 후 2년 만에 초(初)단, 이듬해에는 二단으로 승단했으며,[3] 1841년에는 三단, 1842년에는 四단으로 승단했다.

1846년에는 에도 시대 4대 바둑 가문[4] 중 하나인 이노우에 가문의 당주 겐낭 인세키와 대국했다. 처음에는 슈사쿠가 2점을 깔고 뒀지만, 겐낭 인세키가 슈사쿠의 실력을 인정하고 정선(定先)으로 치수를 변경해서 다시 두게 되었다. 그리고 이 대국에서 슈사쿠는 초반에 수세에 몰렸지만, 그 유명한 이적의 수(耳赤의 手)[5][6]를 둬서 국면을 역전시켜 겐낭 인세키에게 승리했다.

1848년에는 공식적으로 혼인보 가문의 후계자가 되었고, 동시에 六단으로 승단했다. 이듬해부터는 쇼군이 보는 앞에서 바둑을 두는 어성기(御城碁)[7]에 출전했는데, 슈사쿠는 여기서 13년 동안[8] 19연승이라는 대기록을 세우며 실질적인 당대 최강의 기사 반열에 올랐다. 이때 사람들이 슈사쿠에게 어성기 대국 결과에 대해 물었을 때 "선번(先番)[9]이었습니다."라고만 대답했다는 일화가 있는데, 이 일화는 겸손한 성격으로 유명했던 슈사쿠와는 어울리지 않기 때문에 원래는 "선번(先番)이었기 때문에 어떻게든 이길 수 있었습니다."라는 식으로 말했는데 앞부분만 알려진 거 아니냐고 보는 견해도 있다. 기록상 슈사쿠는 선번으로는 11회 / 백번(白番)으로는 8회 뒀다.[10]

1862년 일본 에도에서 전염병 콜레라가 유행하자 혼인보 가문 내에서도 콜레라 환자가 속출했는데, 이때 슈사쿠는 스승인 14세 혼인보 슈와(本因坊 秀和)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환자들을 간호하다가 본인도 콜레라에 감염돼서 33세의 나이로 요절하고 말았다.[11] 혼인보 가문의 당주가 되기 전에 사망했기 때문에 혼인보 가문의 가명(家名)을 세습하지는 못했지만, 후세 사람들은 슈사쿠의 뛰어난 실력과 업적을 기리기 위해 그를 혼인보 슈사쿠라고 부른다.[12]

3. 슈사쿠류(秀策流)

파일:Shusaku_opening.png

슈사쿠가 四단으로 승단한 이후부터 사용한 포석을 이르는 말. 위 이미지처럼 흑 1, 3, 5를 소목에 두는 포석으로, 1, 3, 5 포석이라고도 한다. 보통은 흑 5까지를 슈사쿠류라고 하지만 여기에 흑 7 마늘모까지 포함해서 슈사쿠류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 중에서 특히 흑 7 마늘모 행마[13]를 실전에서 활용한게 유명하다. 당시 기사들은 마늘모를 발이 느리고 실속이 없다는 이유로 잘 사용하지 않았는데, 슈사쿠는 이 없었던 당시 바둑에서 느리지만 튼튼한 행마로 바둑의 주도권을 잡아가기 위해서 마늘모를 활용해서 좋은 성적을 올렸다. 덕분에 이 마늘모는 슈사쿠의 마늘모(秀策のコスミ)라 불리며 크게 유행했다.

다만 슈사쿠의 마늘모는 기본적으로 덤이 없는 바둑에서 선번일 때 탄탄하게 이기기 위한 행마이며, 덤이 있는 현대 바둑에서는 발이 느리다는 평가를 받아 거의 사용되지 않았다.[14] 그런데 2010년대 중후반 등장한 인공지능 바둑 프로그램을 통해 덤이 있는 현대 바둑에서도 마늘모가 좋은 수라는 평가를 받았다. 몇백 년 뒤에 나온 최신 기술에 의해 슈사쿠류가 재평가를 받게 된 재미있는 케이스라고 할 수 있다.

4. 기타



[1] 현재의 히로시마현 오노미치시.[2] 150년 전은 4세 혼인보 도사쿠(本因坊 道策) 명인의 전성기였다. 즉, 도사쿠 이후 150년 만에 나온 천재라는 뜻.[3] 이 해에 13세 혼인보 조사쿠(本因坊 丈策)의 권유로 이름을 슈사쿠(秀策)로 개명했다.[4] 혼인보(本因坊), 이노우에(井上), 야스이(安井), 하야시(林).[5] 일본어로는 耳赤の一手. 당시 슈사쿠가 이 수를 두자, 겐낭 인세키가 귀가 빨갛게 물들었다고 한다. 이후 이적의 수는 묘수 중의 묘수, 상대의 허를 찌르는 결정적인 수를 의미하는 말이 됐다.#[6] 당시의 기보. 천원 바로 위에 둔 흑이 바로 이적의 수다.[7] 1626년 무렵에 시작해 1864년에 폐지될 때까지 230여년 동안 실시되었던 바둑 경기로, 4대 바둑 가문의 당주, 가문의 후계자, 七단 이상의 기사들만 참가할 수 있었다. 즉, 당대 정상급 바둑 기사들이 자웅을 겨루는 대국이었던 셈.[8] 1849년~1861년.[9] 흑을 잡고 두는 것. 흑번(黑番)이라고도 한다.[10] 여담으로 히카루의 바둑에서 후지와라노 사이신도우 히카루에게 "저는 흑을 잡았을 때 진 적이 없습니다."라고 말한 건 이 일화에서 모티브를 따온 것으로 보인다.[11] 슈사쿠의 극진한 간호 덕분에 혼인보 가문에서는 슈사쿠 이외에 콜레라로 인한 사망자는 없었다고 한다.[12] 실력 뿐만 아니라 인품도 뛰어나 혼인보 도사쿠, 혼인보 조와(本因坊 丈和)와 함께 기성(棋聖)으로 불리기도 한다.[13] 소목정석의 한 갈래로 한자 입 구(口)와 모양이 같기 때문에 '입구자 행마'라고도 한다.[14] 히카루의 바둑에서도 시라카와 미츠오 七단을 통해 이를 설명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