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세 이라라고리의 감독직 및 기타 직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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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팀 | ||||
클럽 | ||||
18대 |
스페인의 前 축구감독 | ||
<colbgcolor=#eeeeee,#191919> 이름 | 호세 이라라고리 José Iraragorri | |
본명 | 호세 이라라고리 에알로 José Iraragorri Ealo | |
출생 | 1912년 3월 6일 | |
스페인 왕국 바사우리 | ||
사망 | 1983년 4월 27일 (향년 71세) | |
스페인 갈다카오 | ||
국적 | [[스페인| ]][[틀:국기| ]][[틀:국기| ]] | |
신체 | 키 178cm | 체중 75kg | |
직업 | 축구 선수(공격수[1] / 은퇴 ) 축구 감독 | |
소속 | <colbgcolor=#eeeeee,#191919> 선수 | 아틀레틱 클루브 (1929~1936) CD 우스카디 (1938~1939) CA 산 로렌소 (1939~1942) 레알 클루브 에스파냐 (1942~1946) 아틀레틱 클루브 (1946~1949) |
감독 | 아틀레틱 클루브 (1949~1952) 레알 바야돌리드 CF (1952~1953) RC 셀타 데 비고 (1953) 에르쿨레스 CF (1955~1956) SD 인다우추 (1959~1960) SD 인다우추 (1962~1963) | |
국가대표 | 7경기 2골 (스페인 / 1931~193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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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생애[2]
1.1. 어린 시절
이라라고리의 어린 시절은 다소 불우했다. 그의 아버지는 운전일을 했는데 이라라고리가 태어난 지 9개월 만에 사망해서 가세가 크게 기울었다.이라라고리는 홀어머니의 보살핌 속에 어린 시절을 보냈고 학교에서 축구에 흥미를 갖게 되었다.
1.2. 축구 선수
1.2.1. 클럽
어린 시절에 이라라고리는 생계를 위해 여러 일을 하며 체력을 키웠고 16살의 나이에 아틀레틱 클루브의 1군에 속할 정도로 축구에 재능 있는 소년이 되었다. 이라라고리는 1930년 1월 5일에 바스크 라이벌 레알 우니온과의 경기에서 데뷔전을 치렀다. 당시 아틀레틱 클루브는 말 그대로 리즈 시절을 보내고 있었는데 1929-30 시즌의 무패 우승[3]을 포함한 2년 연속 더블을 기록하며 7시즌 동안 리그 우승 4회, 코파 델 레이 우승 4회라는 위엄 넘치는 성적을 찍었다.하지만 스페인 내전이 터졌고 이라라고리 역시 다른 팀 동료들과 함께 유럽 각지로 투어를 떠났다. 결국 그들은 멕시코까지 건너가서 1938-39 시즌에 프리메라 푸에르사에 CD 우스카디(Uzkadi)라는 팀으로 참가했고 시즌이 끝난 후 멤버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이라라고리의 행선지는 아르헨티나였다.
1939년부터 1942년까지 이라라고리는 의 CA 산 로렌소 소속으로 아르헨티나 무대를 누볐고 이 시기에 팀은 2차례의 준우승을 차지했다. 1942년부터 이라라고리는 1946년까지 레오나르도 실라우렌, 이시드로 랑가라와 함께 멕시코의 레알 클루브 에스파냐에서 뛰었고 1946년에 빌바오로 다시 돌아가 1949년까지 선수로 뛰었다.[4]
1.2.2. 국가대표
이라라고리의 첫 스페인 대표팀 경기는 1931년 4월 19일의 이탈리아전이었고 루이스 레게이로의 부상으로 교체 선수로 출전했다. 이 경기는 0대0으로 비겼다.이라라고리는 1934년 월드컵에서 스페인의 2경기에 참가했다. 그는 특히 1라운드 브라질전에서 페널티 킥을 포함 2골을 기록했고[5] 스페인의 8강 진출에 기여했다. 하지만 그는 8강전 재경기에는 부상으로 참가하지 못했다.
이라라고리의 마지막 대표팀 경기는 1936년 2월의 독일전이었고 스페인은 독일에 1대2로 패했다.
이라라고리는 총 7경기 출전, 2골의 스페인 대표팀 기록을 남겼다.
1.3. 감독
1949년 선수 생활을 마무리한 이라라고리는 선수 생활을 마무리하자마자 친정팀 아틀레틱 클루브의 감독이 되었다. 그리고 감독이 된 첫 해 빌바오는 코파 델 레이 우승을 차지했고 1951-52 시즌엔 라리가 준우승도 이루었다. 그는 빌바오에서 총 103경기 중 54경기를 승리했다.하지만 이라라고리는 구단 수뇌부와의 갈등으로 아틀레틱 클루브의 감독직에서 물러났고 이후 레알 바야돌리드, 셀타 비고, 에르쿨레스, 인다우추의 감독을 맡았다.
2. 플레이 스타일 & 평가
기술이 빼어났고 축구 지능이 좋은 포워드였다. 그러면서 피지컬과 힘도 좋았다고 한다.아틀레틱 클루브에서 경기당 0.77골을 기록할 정도로 득점력도 좋았다.
3. 사생활
- 이라라고리의 형 빅토르는 과학과 수학에 재능을 보였고 이라라고리도 원래는 회계사를 준비했지만 축구로 크게 성공해서 계획을 접었다.
- 이라라고리는 1960년에 결혼했고 슬하에 두 아이를 두었다.
4. 수상
4.1. 클럽
- 아틀레틱 클루브 (1929~1936 / 1946~1949)
- CD 우스카디 (1938~1939)
- 프리메라 푸에르사 준우승: 1938-39
- CA 산 로렌소 (1939~1942)
- 아르헨티나 프리메라 디비시온 준우승: 1941, 1942
4.2. 감독
[1] 인사이드 라이트 포워드, 센터 포워드[2] 출처: 위키피디아, 11v11[3] 18전 12승 6무. 라리가 최초의 무패 우승 기록이기도 하다.[4] 첫 시즌을 빼면 이라라고리는 빌바오의 선수로 많은 경기를 뛰지 않았고 이 시기에 바라칼도의 감독을 맡았다고도 한다.[5] 이라라고리의 페널티 킥 득점은 스페인의 FIFA 월드컵 본선 첫 득점이다. 그리고 25분에 기록된 이라라고리의 두 번째 득점은 이시드로 랑가라의 득점이라는 기록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