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밝은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04-10 13:18:31

현준극

1. 개요2. 생애3. 여담4. 참고문헌

1. 개요

玄峻極

북한의 정치인, 외교관.

2. 생애

1924년 1월 14일, 함경북도 길주군 남양리에서 화전민의 아들로 태어났다. 1939년부터 서울에 있는 경성중등학원과 경신중학교를 다녔으며 농민운동에 참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북한의 주장에 따르면, 일제의 징용에 끌려가 홋카이도에서 노동자로 일하느라 공부를 할 시간이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북적북도 아니고 조선대백과사전을 보면 길주군 웅평공립보통학교 졸업 이후 1928년 4월, 서울 경성중등학원, 경신중학교에 진학했다고 한다.(...) 해방 이후 1946년 11월, 공청 길주군 웅평면위원회 조직부장에 임명되었고 1946년 로동신문 함경북도 특파기자,생활부 기자로 일했다고 한다. 만경대혁명학원을 나와 1950년 5월에 모스크바 대학으로 유학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조선대백과사전에는 6.25 전쟁 중 종군기자로 활약했다고 한다.

이후 로동신문 편집원, 편집국장을 거쳐 1954년 선전선동부 지도원이 되었으다. 1956년 로동신문 편집부장으로 승진했다. 1959년에 로동신문 부사장 겸 부주필로 승진했다. 1960년 조선기자동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에 임명되었다. 1961년 8월, 중앙위원회 후보위원에 선출, 1962년에 조선로동당 출판사 사장 겸 책임주필이 되었으며 1964년 선전선동부 부부장을 지냈다. 1966년 12월 21일, 박세창의 뒤를 이어 중국 대사에 임명되었다. 대사에 임명될 때 김정일이 현준극을 현지지도에 불러서 대화를 나누고는 그의 집까지 방문하여 현준극과 그 일가를 위문하면서 현준극이 중국에 간 사이에 그 생활을 책임져 주겠다고 했다 카더라.

1972년에 5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선출, 김일성훈장을 받았으며 1990년까지 5선을 연임하였다. 1972년 8월에 중앙위원회 후보위원으로 보선되었으며 1979년에는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승진했다. 1977년 3월 22일, 전명수가 후임 중국 대사로 임명됨에 따라 중국 대사에서 퇴임하여 귀국한 이후 중앙위원회 국제사업부 부부장 및 대외문화연락협의회 부위원장에 임명되었으며 1976년 일본에 파견되었다. 1980년에는 총리 회담 실무 협상을 위해 수석대표로 남한에도 왔는데, 완벽한 양복 차림에 커프스 단추까지 차고 와서 남한 대표단을 놀라게 했다고 한다. 1980년 10월, 6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위원에 재선되었다. 고영환의 증언에 따르면 거대한 체구에 술을 아주 잘 마셔서 북한 안에서 별명이 헤르만 괴링 원수였다고 한다. 말주변이나 두뇌는 좋은 편이 아니었는데 술을 잘 먹고 재롱 떠는 것으로 김정일의 총애를 받았으며, 김정일은 길재경과 현준극이 없으면 술파티가 재미가 없다고 했다고 한다.

1982년 4월 2일, 중앙인민위원회 정령에 따라 김일성 칠순 기념 김일성 훈장을 수훈받았고, 7기 최고인민회의에서 중앙인민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83년 12월, 6기 8중전회에서 대남비서 김중린이 아웅산 테러의 실패를 추궁당해 해임되면서 국제비서 김영남이 외교부장으로 이동하고, 외교부장 허담은 대남비서로 이동하였다. 그리고 공석이 된 국제비서로 김용순이 임명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현준극도 국제부 제1부부장에 임명, 국제부장을 대리하였다. 하지만 김용순이 1984년에 지나치게 세도를 부리다가 혁명화를 가면서 주체사상연구소장 황장엽이 새 국제비서로 이동해왔다. 1987년, 김용순이 국제부 부부장에 임명되어 복권되면서 국제부의 주도권을 놓고 김용순과 현준극의 세력다툼이 벌어졌다. 이 싸움에서 황장엽은 김용순을 지지하였고, 김일성이 김용순을 싫어한다는 이유로 잠시 뜸을 들이던 김정일이 1988년 김용순을 국제부장, 허담을 국제비서에 임명하게 되면서 현준극은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된다. 북한의 선전에 따르면 김정일의 총애에 오만해져서 아랫사람들의 의견을 무시하면서 권위적으로 변했고, 이 때문에 김정일에게 의리를 저버렸다고 큰 질책을 받고 요양소로 내려가서 한달간 자아비판을 하면서 심장병 치료도 받았다 카더라. 아마도 혁명화를 돌려서 표현한 것으로 보이는데 조선대백과사전에 따르면 1989년 10월, 로동신문 책임주필 겸 조선기자동맹 중앙위원장에 임명되었다.

김용순은 1990년 5월, 앓아누은 허담의 국제비서 자리까지 물려받게 되었으나 1992년 12월, 최태복에게 국제비서 자리를 물려주고 대남비서로 이동하였다. 하지만 최태복은 사상문제에 정통하지 않았기 때문에 국제비서 업무를 잘 수행하지 못했고 1993년 황장엽이 다시 국제비서에 부임하였다. 이러한 와중에 1994년 7월, 김일성이 사망하면서 장의위원을 지냈으며, 10월에 당 부장 자격으로 등장하면서 국제부장 임명이 확인되었다. 1995년 2월, 오진우 장의위원을 지냈으며, 1994년 12월 중국, 1996년 그리스 공산당 15차 당대회에 참석하였다. 그러나 조선로동당 국제부장 역임 중 1997년 황장엽 망명 사건이 발생하자 이에 대한 책임을 지고 경질되어 김양건에게 국제부장 자리를 물려주었다. 이후 강철환이 그가 수용소에 끌려갔다고 주장하기도 하였으나 2001년에 출판된 조선대백과사전 24권이 입수되면서 죽음이 확인되었다. 국제부장 경질 직후인 1997년 8월 14일에 대장암으로 사망하여 애국렬사릉에 안치되었다. 2004년에 그가 정치범수용소에 있다는 엉뚱한 주장이 나오기도 했다. #

조카 현송월 덕을 봤는지 김정은 시대에는 '실력 있고 박식한' 당의 일군이라고 선전물이 나오기도 했다.

3. 여담

현송월의 삼촌이라고 한다.

아들로 현용민이 있는데, 아버지의 일생을 정리한 영상에 증인으로도 나왔다.

4.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