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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2-22 18:50:56

헨리 콕번(1921)

파일:Henry Cockburn.jpg
이름 헨리 콕번
(Henry Cockburn)
생년월일 1921년 9월 14일
사망년월일 2004년 2월 2일 (향년 82세)
국적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잉글랜드
출신지 그레이트브리튼 및 아일랜드 연합왕국 애슈턴언더라인
포지션 레프트 윙 하프
신체조건 165cm | 63kg
소속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1944-1954)
베리 FC (1954-1956)
피터버러 유나이티드 FC (1956-1958)
코비 타운 FC (1959-1960)
샌키스 (1960-1961)
국가대표 13경기 (1946-1951)



1. 개요2. 생애
2.1. 어린 시절2.2. 선수 생활2.3. 이후
3. 플레이 스타일 & 평가4. 수상
4.1. 클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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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잉글랜드의 전 축구 선수.

2. 생애[1]

2.1. 어린 시절

랭커셔의 애슈턴언더라인(Ashton-under-Lyne)에서 태어난 콕번은 스탬포드 고등학교에 다녔으며 1940년대 초 고슬링스 FC(Goslings FC)에서 포워드로 축구 경력을 시작했다.

2.2. 선수 생활

2.2.1. 클럽

콕번은 1943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 입단했고 1944년 8월에 유나이티드와 프로 계약에 서명했다. 그러나 제2차 세계 대전으로 인해 콕번의 정식 리그 데뷔는 1946년까지 기다려야 했고, 그때쯤에는 포지션을 레프트 윙 하프로 전환했다. 유나이티드에서의 프로 10년간 콕번의 주요 타이틀로는 1951-52 시즌의 리그 우승과 1947-48 FA컵 우승이 있다.

1954년, 슈퍼 신인 던컨 에드워즈로 인해 콕번이 자리에서 밀리게 되자 그는 유나이티드를 떠나 베리 FC로 이적했다. 그 이후 그는 피터버러 유나이티드 FC코비 타운 FC 등을 거쳐 1961년까지 선수 생활을 했다.

2.2.2. 국가대표

콕번은 1946년 9월 28일, 북아일랜드를 상대로 잉글랜드 대표팀 데뷔전을 치렀고 이 경기는 잉글랜드가 북아일랜드를 7대2로 대파했다.

콕번은 1950년 월드컵에 참가했지만 그의 경기 출전은 없었다.

2.3. 이후

선수 은퇴 후 콕번은 나중에 올덤 애슬래틱에서 보조 트레이너로, 허더즈필드 타운에서 보조 코치로 일했다. 콕번이 허더즈필드 타운에서 지도했던 선수 중에는 나중에 울버햄튼 명예의 전당에 헌액될 데렉 파킨이 있었다.

또한 그는 1960년대에 애슈턴 크리켓클럽(shton Cricket Club)에서 크리켓 경기를 펼쳤으며 주로 커버 포지션에서 뛰었다.

3. 플레이 스타일 & 평가

콕번은 체격이 작은 편이었지만, 필드에서 뛰어난 재능과 막강한 위력을 발휘했다. 체력, 일관성, 빠른 다리와 정신력으로 그의 작은 체격을 보완했다. 그는 활동량이 많았고 회복력이 뛰어나며 패스와 태클에 능숙했다. 태클과 스프린트를 최대한 활용해 공을 따냈지만 그러지 못할 때는 동료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가장 인상적인 점은 뛰어난 운동 능력, 거의 완벽한 타이밍과 서있는 자세에서 훨씬 더 큰 상대보다 더 높이 점프하는 점프력의 조합으로 가능한 공중볼 경합능력이었다.
헨리의 앞에서 플레이하는 것은 정말 멋진 일이었습니다. 그가 공을 잡으면 저는 항상 제가 그 공을 만질 다음 사람이 될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선수로서도 동료로서도 정말 믿음직했어요.
(It was fabulous to play in front of Henry. When he got the ball I always knew that I would be the next to touch it. He was totally reliable, both as a player and as a comrade.)
찰리 미튼(콕번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시절 동료)

4. 수상

4.1. 클럽



[1] 출처: 위키피디아, 11v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