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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10-11 01:30:12

헨리 빙켈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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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군 총사령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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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 육군 및 해군 총사령관
Opperbevelhebber Nederlandse Land- en Zeemac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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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르넬리스 스네이더르스 빌럼 프레데릭 폽 이자크 레인더르스 헨리 빙켈만
<rowcolor=#ff9900> 제5대 제6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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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6666><colcolor=#fff> 제4대 네덜란드군 총사령관
헨리 헤라르트 빙켈만
Henri Gerard Winkelman
<nopad> 파일:Henri Winkelman.jpg
출생 1876년 8월 17일
네덜란드 림뷔르흐주 마스트리흐트
사망 1952년 12월 27일 (향년 76세)
네덜란드 위트레흐트주 수스테르베르흐
국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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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력 네덜란드 왕립사관학교
직업 군인
계급 대장
참전 제2차 세계 대전

1. 개요2. 전쟁 전3. 제2차 세계 대전
3.1. 홀란트 요새 전략3.2. 독일의 침공3.3. 정권 위임 및 항복
4. 전쟁 후

1. 개요

네덜란드의 군인으로,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네덜란드군의 총사령관이었다.

2. 전쟁 전

1876년 8월 17일 네덜란드 림뷔르흐주 마스트리흐트에서 율리우스 헨드릭 빙켈만[1]과 샤를로트 헨리에테 브람스[2]의 아들로 태어났다. 네덜란드령 동인도군의 장교가 되는 것을 목표로 네덜란드 왕립사관학교에 진학했다. 그러나 훈련 도중 보병 장교가 되기로 마음을 바꾸었다. 1896년에 중위로 진급한다.

군사 훈련을 마치고, 그는 본격적으로 진급을 거듭하기 시작한다. 1913년대위로 진급하였고, 1923년에는 소령, 1931년에는 소장으로 진급하여 네덜란드 육군 제4사단을 지휘하게 된다. 1934년에는 중장까지 진급하지만, 얼마 안가 군을 떠난다. 빙켈만은 네덜란드 참모총장이 되기 위해 나섰으나, 이자크 레인더르스 장군에게 패배한다. 이후 은퇴를 결심하고 명예 전역한다. 이후에도 퇴역 장교로써 다양한 방도로 활발한 활동을 이어갔으며, 자문을 하기도 하였다.

네덜란드독일의 폴란드 침공 4일 전인 1939년 8월 28일에 동원령을 선포한다. 참모총장인 레인더르스 장군이 네덜란드군 총사령관에 임명되었으나, 국방장관 아드리안 다익스호른과의 마찰로 인해 1940년 2월 5일에 사임[3]하게된다. 이에 네덜란드 국가의회에서는 짧은 회의 후에 빙켈만을 헤이그[4]로 소환하여 총사령관 자리를 제안한다. 빙켈만은 하루 뒤 제안을 받아들인다.

3. 제2차 세계 대전

3.1. 홀란트 요새 전략

빙켈만은 네덜란드군의 한계를 잘 알고 있었다. 당시 네덜란드군의 인력은 약 28만명으로, 이는 전 국토를 방위하기에 턱없이 부족한 인력이었다. 게다가 네덜란드군전차를 단 한대도 보유하지 못하였고, 야포와 대공포 또한 부족했다. 따라서 빙켈만은 네덜란드군이 현대식 기동 방어 전략을 수행할 수 없다고 판단한다. 이에 그는 "홀란트 요새" 계획을 수립하게 된다. 인구가 밀집되어있는 란트스타트[5] 지역을 중심으로 정적이며 요새화된 전선을 유지하는 다소 전통적인 전략이다. 빙켈만은 네덜란드군독일군을 네덜란드 국경 밖으로 밀어낼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연합국 병력이 네덜란드에 도착할 때까지 독일군의 진격을 늦추고 홀란트 요새 지역을 사수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북부의 3개 주[6]는 사실상 방치되었다. 빙켈만은 북부로는 아프슬라우트 다이크[7]의 동쪽 끝에 위치한 최첨단 요새에서 독일군의 진격을 제지할 계획이었다. 동부에서는 아이셀강과 뫼즈강을 따라 최전방선이 그어졌다. 그러나 네덜란드군의 중심 방어선은 네덜란드 정중앙에 위치한 흐레베선[8]으로, 제2군단 및 제4군단이 방어를 맡는다. 흐레베선은 홀란트 요새의 동부전선으로써 필사적으로 방어될 계획이었는데, 이는 본래 네덜란드 방어체계의 핵심이었던 신 네덜란드 흘수선[9]이 노후화되었을 뿐만아니라, 암스테르담이나 위트레흐트같은 대도시와 너무 근접했기에 치한 조치였다.[10]

3.2. 독일의 침공

독일의 본격적인 침공은 1940년 5월 10일 오전 3시 55분에 시작된다. 공수부대를 헤이그로 진입시켜 네덜란드 정부네덜란드 왕가, 그리고 네덜란드군 총사령부를 생포하여 네덜란드를 24시간만에 굴복시키겠다는 히틀러의 대담한 계획은 결과적으로 실패한다. 독일군은 네덜란드 동부 국경을 비교적으로 쉽게 넘을 수 있었으나, 앞서 언급한 흐레베선 및 아프슬라우트 다이크 요새에서 멈추게 된다. 전쟁 하루가 경과했을 무렵, 빙켈만은 독일군의 1차 공격을 막아낸 네덜란드군의 성과에 만족했다고 한다.

사태가 심각했던 곳은 네덜란드 남부로, 독일 공수부대가 이미 로테르담도르드레흐트로 가는 무르다이크[11]다리를 이미 확보한 상태였다. 이 와중에 막강한 독일 보병은 제9전차사단의 지원하에 이미 남부 독일 국경의 페일-람선[12]을 돌파하여 네덜란드 남부의 노르트브라반트주를 거침없이 휘젓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그대로 무르다이크 교두보와 접선하여 홀란트 요새를 남부로부터 진입하여 네덜란드벨기에프랑스로부터 사실상 고립시킬 수 있기 때문에 엄청나게 위험한 상황이었다. 이에 5월 11일, 네덜란드군프랑스군과 협력하여 무르다이크 다리를 되찾으려 하지만 실패하고, 흐레베선에서 잃은 고지를 되찾는 것 또한 실패하게 된다.

3.3. 정권 위임 및 항복

5월 13일빌헬미나 여왕은 이미 런던으로 떠났고, 대부분의 각료 또한 망명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이에 재무장관 막스 스테인베르헤가 독자적으로 국왕정부의 이름으로 네덜란드의 유럽 영토 전역에 대한 정부 권한을 모두 빙켈만에게 넘겨주면서, 의회가 빙켈만에게 충성할 것을 요구했다. 이는 나중에 정부국왕 모두에게 승인받게 된다.

그러나 같은 날 흐레베선은 네덜란드 2군단장의 삽질끝에 독일군에 큰 피해를 전혀 입히지 못한채 붕괴되었다.[13] 한편, 제9전차사단은 무르다이크 교두보와 연결하는데에 성공하며 홀란트 요새를 남부에서 돌파하며 로테르담까지 진출하는데 성공, 뫼즈강 남쪽 기슭까지 나아간다. 전황은 전술적으로 가망이 없었지만, 강의 북쪽 기슭은 아직 네덜란드군이 확보한 상태였다. 북쪽 기슭의 네덜란드 기관총과 로테르담에서 시가전을 펼치는 네덜란드 해병대 때문에 독일군은 로테르담을 완전히 점령하기 위해선 격렬한 시가전을 펼쳐야했다. 로테르담 공격을 맡은 건 9기갑사단, 22공중강습사단, LAAH연대와 7항공사단으로 신편된 39군단이었다. 39군단 상급부대인 18군 사령관 게오르크 폰 퀴힐러는 B집단군 사령관 페도어 폰 보크프란츠 할더로부터 빨리 벨기에-프랑스 전선으로 합류하라는 압박을 받고 있었다. 하인츠 구데리안을 비롯한 A집단군의 전과를 알고 있는 후대 사람들 시점에선 B집단군에 대한 집착이 다소 의문스러울 수 있는데 1940년 5월 13일 독일군에게 A집단군은 도박에 가까운 수였고 공세의 성공 역시 불분명했다.[14]네덜란드와 벨기에로 투입된 B집단군은 조공이었지만 A집단군이 실패할 경우 주공의 역할을 맡을 수 있도록 조공 이상의 전력을 배치받았고 기대치 또한 높았다. 5월 14일, 39군단은 로테르담 방어군에 항복하지 않으면 도시를 파괴하겠다고 협박했는데 네덜란드측은 최후 통첩안에 발신자 서명과 직위가 명시되지 않은 점을 들어 절차에 맞게 항복 요구안을 달라고 요청했다. 이에 39군단은 네덜란드군이 항복할 것이라고 기대하고 폭격을 중지하기로 했지만 로테르담 폭격을 맡은 54전투항공단은 이미 출격해버린 상황이었다.

54전투항공단은 로테르담 동쪽과 남쪽 두 갈래로 나뉘어 진입했는데 협상을 진행 중이던 39군단은 난데없이 나타난 아군 폭격기에 크게 당황했다. 독일군은 급히 폭격 중지를 알리는 붉은 조명탄을 쏘아 올렸고 남쪽에서 접근하던 독일 공군은 이를 보고 회항했지만 동쪽에서 접근하던 독일 공군은 이 신호를 보지 못했다. 동쪽에서 진입해온 독일군 폭격기들은 250kg 고폭탄 158발, 50kg 고폭탄 1150발을 로테르담 시내 구시가지 중심부에 투하해 로테르담의 중심부를 쑥대밭으로 만들었고 이 과정에서 민간인 884명이 사망했다. 때문에 현재도 네덜란드의 다른 도시와는 달리 로테르담 도심에는 전통적인 건물이 거의 남아있지 않다.[15]한다. 북쪽 프리슬란트 방어선을 제외한 모든 지역에서 밀려나고 있는 상황에서, 독일 공군위트레흐트에도 폭격을 가할 것을 위협하자, 빙켈만은 결국 항복을 결심한다. 그는 다음날, 라이소르트[16]에서 공식적으로 독일군에 항복한다.

4. 전쟁 후

네덜란드의 항복을 서명한 뒤, 독일 측은 빙켈만에게 네덜란드에서 독일군을 더이상 저항하지 않겠다는 선언을 할 것을 요구했다. 이를 거부하자, 7월 2일에 억류되어 남은 전쟁동안 전쟁 포로가 되었다. 이후 1945년 10월 1일에 네덜란드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높은 훈장인 빌렘 군사훈장[17]을 수여받으며 명예 전역한다. 그가 5월 15일에 항복에 서명한 장소인 라이소르트의 초등학교 앞에는 아직도 그의 동상[18]이 서있다. 뉜스페이트[19]에 위치한 군 부대 또한 그의 이름으로 명명되었는데, 공교롭게도 항복을 서명한 날과 같은 2007년 5월 15일에 폐지되면서 하르스캄프[20]의 한 군 부대로 이름이 이전되었다. 빙켈만은 1952년 12월 27일, 자택에서 76세의 나이에 평화롭게 숨졌다.
[1] Julius Hendrik Winkelman[2] Charlotte Henriëtte Braams[3] 명예 전역[4] 네덜란드 정부가 위치한 도시이다.[5] 노르트홀란트, 자위트홀란트, 위트레흐트[6] 드렌터, 흐로닝언, 프리슬란트[7] 프리슬란트노르트홀란트를 잇는 긴 제방[8] Grebbe Linie[9] Nieuwe Hollandse Waterlinie[10] 후에 로테르담공습이 일어났다.[11] Moerdijk[12] Peel-Raam Linie[13] 5월 11일 독일군이 흐레베선 전초기지를 아주 간단히 함락시키자 부사관을 탈영죄로 총살시켰고 4보병사단으로 하여금 야습을 강행하게 했다. 준비가 제대로 되지않은 역습은 네덜란드군끼리 오인사격하다 끝났고 바로 다음날 주 저항선이 붕괴되었다. 흐레베선을 공격한 독일군 207사단이 200여명의 전사자를 낼 동안 네덜란드군 4보병사단은 2배에 달하는 400명이 전사했다. 방자가 공자보다 전술적으로 유리하며 흐레베선은 비록 급조되었지만 침수지대와 참호 진지로 방호되고 있었기 때문에 공자보다 더 많이 죽으며 분쇄되어버린 네덜란드군의 방어는 냉정히 실패였다.[14] 구데리안의 19기갑군단은 이날 뫼즈강을 도하해 스당을 점령했지만 A집단군의 공세가 승기를 잡은건 5월 17일이었고 프랑스군의 방어선을 완전히 붕괴시키며 대서양으로 뻗어나간건 5월 19일이었다.[15] 파일:rotterdam bombing.jpg[16] Rijsoord[17] Militaire Willems-Orde[18] 파일:winkelman statue.png[19] Nunspeet[20] Harskam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