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colbgcolor=#0047a0> 이명 | 한유한(韓悠韓)[1] |
호 | 먼구름 |
본관 | 청주 한씨[2] |
출생 | 1910년 2월 21일 |
경상남도 동래군 읍내면 교동 (現 부산광역시 동래구 명륜동 278, 279번지)[3] | |
사망 | 1996년 6월 15일 (향년 86세) |
묘소 | 경상남도 양산시 하북면 답곡리 솔밭산공원묘원 |
상훈 | 건국훈장 애국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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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연극인, 작곡가, 교수. 본관은 청주, 일명 한유한(韓悠韓), 호는 먼구름.한국광복군에서 독립운동을 했고, 해방 후 부산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로 재직했다.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에 서훈되었다.
독립유공자 한흥교(韓興敎, 1885. 11. 25 ~ 1967. 8. 6)의 차남이다.
2. 생애
2.1. 초기 및 독립운동
1910년 2월 21일 경상남도 동래군 읍내면 교동(現 부산광역시 동래구 명륜동 278, 279번지)에서 당시 오카야마의학전문학교에 재학 중이던 아버지 한흥교(韓興敎, 1885. 11. 25 ~ 1967. 8. 6)와 어머니 안산 이씨(安山 李氏) 이인옥(李仁玉, 1883. 3. 3 ~ 1968. 3. 11) 사이의 4남 3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조부 한규용(韓奎容, 1863. 12. 18 ~ 1927. 6)은 동래군 지역의 유지로서 1900년부터 담뱃대 공장을 경영하고 중농 이상의 농사를 지어 상당한 재산을 축적했던 인물이며, 아버지 한흥교는 오카야마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한 동래군 최초의 양의사이자 독립운동가로 중국에서 의료활동 및 독립운동을 병행했던 인물이다. 8.15 광복 후 도립마산병원 병원장으로 근무하고, 1948년 부산시에서 한내과를 개원, 운영했으며, 진보당 초대 경상남도위원장을 맡기도 했다.
그는 1915년 가족과 함께 중화민국 상해 프랑스 조계로 건너가 아버지를 처음 대면하였고, 1917년 부산제2상업학교 재학 중이던 형 한원석(韓元錫, 1903. 9. 5 ~ ?)과 함께 아버지가 있던 경조지방(京兆地方) 북경시로 건너가 동사패루(東四牌樓) 십조(十條) 호동(胡同)[4]에 거주하면서 1년여 동안 아버지로부터 중국어를 배웠다. 그 뒤 아버지가 중국국민당원이 됨에 따라 중화민국 국적을 취득할 수 있었고, 본적지를 완평현(宛平縣)[5]에 두었다. 1919년 육영소학교(育英小學校)에 입학해 1923년 7월 졸업했고, 이 무렵 동사패루 오조(五條) 호동[6]으로 이사했으나 일제 밀정들의 아버지에 대한 끊임없는 감시를 피해 3개월간 10여 차례 이상 이사를 다녀야 했다.
1923년 9월 사립 노하중학교(潞河中學校)[7]에 입학해 1926년 7월 졸업한 뒤 노하고급중학교에 진학했고, 1929년 졸업했다.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 조성환(曺成煥)의 권고로 상하이시에 있던 신화예술전문학교(新華藝術專科學校)[8] 예술교육과에 입학해 1933년 졸업하였다. 졸업 당시 윤봉길 의사의 훙커우 공원 의거가 있었고, 일제가 상해에 있던 독립운동가들을 색출하자 이름을 한유한으로 개명하고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졸업 후 국민혁명군에 복무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1934년 산동성 당읍현(堂邑縣)[9] 무훈중학교(武訓中學校)의 예술교사 겸 영어교사, 산동 행정인원훈련소 교관, 제남시(濟南市) 산동성립여자사범(山東省立女子師範) 부속 소학교[10] 교사를 맡았고, 1937년 중국희극학회 소속 제2항일연극대장, 1939년 중국 국민혁명군 중앙군 34집단군 제10사 정치부 공작대장을 역임하며 항일 투쟁에 나섰다.
항일가극 아리랑의 공연 모습 |
1939년 10월 중경시(重慶市)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산하 한국청년전지공작대가 창설되자 음악교관 및 예술조장에 임명되어 연극, 음악을 통한 항일 투쟁을 하였다. 항일 가곡이자 국내 최초의 창작 오페라인 "아리랑", "국경의 밤" 등을 섬서성 서안시 등지에서 공연해 군인들과 현지 주민들을 위로했고, 군가인 "한국행진곡(韓國行進曲)", "항전가곡(抗戰歌曲)"을 작곡해 국민혁명군을 위문하고 항일의식을 고취시켰다.
광복군 복무 당시 한형석 |
1940년에는 중국 중앙전시간부훈련 제4단 특과총대학원대 한청반에서 교관으로 근무하다가 한국광복군 창설 후 1941년 1월 한국청년전지공작대가 한국광복군 제5지대에 편입되어 한형석 또한 한국광복군 소속이 되었다. 그 뒤 광복군가집 1·2집을 발간하고 "국기가(國旗歌)", "한국광복군 제2지대가", "압록강행진곡", "조국행진곡" 등의 군가 및 항일가곡을 작곡했다.
또한 1944년 10월 한국광복군 제2지대 선전대장에 선임되어 복무하면서 군가를 작곡하고 항일가곡극을 연출하여 침체된 항일의식을 고취하고 한국광복군과 국민혁명군의 연합전선을 견고히 하는 데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2.2. 광복 후
8.15 광복 후 산둥성 지난시에서 교포 송환 귀국 사업에 종사하다가 1948년 귀국하였다. 1948년 11월 서울중앙방송국 촉탁 방송 위원을 맡았고, 이후 부산에 내려갔다. 1950년 사재를 털어 부산 국립극장인 문화극장을 설립하고 극장장을 맡았으나 6.25 전쟁 중이던 1951년 3월 폐업하고 극장 건물이 경상도 계엄사령부에 징발되어 미군 극장으로 사용되다가 1953년 4월 화재 이후 부산지방체신국 창고로 활용되었다. 1953년 12월 29일 경상남도 문정과로 반환되었으나, 화재 복구 비용 문제 등으로 국립극장으로 활용이 어려워지자 1954년 1월 13일 백두진 총리에게 문화극장 반환 및 복구를 위한 진정서를 제출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화극장은 재건되지 못했고, 계속해서 부산지방체신국 청사로 활용되었다.1953년 8월 15일 부산시 서구 부민동에 색동야학원과 자유아동극장을 설립하였다. 자유아동극장은 전국 최초의 아동 극장으로 1955년 2월 까지 약 11만 8000명의 아동들에게 무료로 아동극을 보여주었으며, 색동야학원에서 매일 8,90 여 명의 결식, 부랑, 행상 아동에게 무상 교육을 실시하였다.
1955년 2월 극장문화협의회 극장문화분과위원장을 맡았고, 부산대학교 문리과대학 중어중문학과 교수로 부임하였다. 1963년 2월 초대 한국연극협회 부산시지부장에 취임하였고, 곧 대만문화사범대학 교환교수로 근무하였다. 그해 8월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대통령표창에 서훈되었다. 귀국 후 1964년 1월 한국연극협회 부산시지부장을 사임했다.[11] 이후 동래민속예술보존협회 활동을 하면서 동래야류(東萊野遊)의 복원에 앞장섰고, 1967년 3월 하인리히 뤼프케 당시 독일연방공화국 연방대통령이 방한하자 부산방문 환영행사의 기획을 도맡았다.
1975년 부산대학교 교수직을 정년퇴임하였다. 퇴임 후 1975년부터 1985년까지 부산대학교, 부산여자대학교, 경성대학교 강사로 활동하였고, 부산 지역 원로들을 중심으로 만든 상록수합창단 단장을 맡는 등 부산 지역의 문화 발전에 많은 기여를 하였다.
1973년 제4대 광복회 부산지회장에 취임해 광복장학회를 설립하는 등 독립유공자 유족들의 복지와 독립운동사 조명에 힘썼으며, 1977년 건국포장에 추가로 서훈되었다. 1982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63주년 기념식장에서 "압록강 행진곡"을 직접 지휘하였다.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에 추가로 서훈되었다.
1996년 6월 15일 86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사후 경상남도 양산시 하북면 답곡리 솔밭산공원묘원에 안장되었다.
3. 여담
- 개인서예전을 개최할 정도로 서예에 조예가 깊었다. 힘있고 회화적인 독특한 서체를 구사했으며, 중국류 서체라고 하나 한글 작품도 다수 있으며 애국충정의 정신이 담겨있어 그의 호를 따서 "먼구름체"로 명명하였다.
한형석의 서예작품 "헌신조국"(광복회 부산지부 소장) |
- 부산직할시 곳곳에 그의 서예작품을 볼 수 있다고 한다. 임시수도기념관 사빈당 현판, 부산대학교 캠퍼스 이문회우(以文會友)비, 동래 대동병원 현판, 부산민주공원 충혼탑비, 낙동강 하구 이은상 낙동강 시비 등이 그의 작품이며, 결혼식 주례를 맡을 시 신랑, 신부에게 충효가문, 병원 개업 시 의인구국 이라는 글을 선물하였다 한다.
- 부산 상록수합창단 활동 당시 상록수합창단 공연 때마다 마지막 레퍼토리로 "압록강행진곡"을 불렀다.
- 1952년 전창근 감독의 영화 낙동강의 기획, 재정을 맡아 제작에 참여하였다. 영화 낙동강은 경상남도 공보과의 지원을 받아 제작한 영화이며, 부산 지역 내 예술인들이 참여하였다. 주제가 작사는 이은상, 작곡은 윤이상, 영화음악감독은 김동진이 맡았으며, 윤이상이 작곡한 주제가 낙동강은 부산 일대에 큰 인기를 끌었다고 한다.
4. 참고자료
독립유공자 공훈록부산역사문화대전
부산일보. 2016년 11월 17일 자.
[1] 悠 자는 멀다, 생각하다의 뜻을 가지고 있다. 머나먼 고국(韓) 을 뜻하거나 고국을 그리워하며 지은 이름이며, 후자에 더 가깝다고 본다.[2] 정당공파(政堂公派) 30세 석(錫) 항렬.[3] #[4] 現 중화인민공화국 베이징시 둥청구(東城區) 둥쓰스탸오(東四十條).[5] 現 중화인민공화국 베이징시 펑타이구 완핑성(宛平城).[6] 現 중화인민공화국 베이징시 둥청구(東城區) 둥쓰우탸오(東四五條).[7] 現 베이징시 퉁저우구(通州區) 루허중학(潞河中學).[8] 1926년 12월 18일 신화예술학원(新華藝術學院)으로 창립되어 1927년 봄에 정식으로 설립 인가를 받았다. 1928년 봄에 신화예술대학(新華藝術大學)으로 개칭되었고, 1929년에는 신화예술전문학교로 개칭되었다. 1937년 상하이 전투로 인해 학교를 옮겨 운영했고, 왕징웨이 정권의 핍박에도 1944년까지 학교를 운영했다. 1944년 마지막 남은 1개 반이 졸업하자 폐교를 선언했다. 이후 1953년 학교 재산이 모두 저장성 항저우시에 있던 중앙미술학원 화동분원(中央美術學院華東分院, 現 중국미술학원)[9] 現 중화인민공화국 산둥성 랴오청시 둥창푸구(東昌府區) 탕이진(堂邑鎭).[10] 現 지난사범학교(濟南師範學校) 부속 소학교.[11] 당시 동료 교수의 증언에 따르면 귀국 당시 연극협회의 기반이 어지러워지고 소극장 중심으로 재편되는 양상을 보고 사임했다고 한다.